|
종 목 | 국보 제2호 |
---|---|
명 칭 |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종로구 |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서울 탑골공원에 가면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조선 1467년, 높이 12m)이 우뚝 서 있다.
탑골공원 가는법을 알기 위해 일단 다음검색에 '탑골공원' 고고!!
![]() | |||||
▒ |
지정번호 |
: |
사적 제354호 | ||
▒ |
지정연월일 |
: |
1991년 10월 25일 | ||
▒ |
시 대 |
: |
1897년 | ||
▒ | 규모·양식 |
: |
15,720.9㎡ | ||
▒ |
소 유 자 |
: |
공유 | ||
▒ |
소 재 지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1 | ||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원각사(圓覺寺) 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파고다공원’이라고도 불렀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에는 고려 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가 있었다. 조선 태조 때 이를 중수하여 조계종(曹溪宗) 본사로 지정하기도 했으나, 태종의 억불정책 때문에 폐사되어 공해전(公廨田)이 된 일도 있었으며, 세조 10년(1464) 5월 절의 중건에 착수하여 원각사로 개명하였다. 이 때의 중건공사를 위하여 부근 가옥 200여호를 철거하였다. 완성된 사찰에는 본당인 대광명전(大光明殿) 이외에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두드러진 것은 세조 10년 전국에서 모은 동 5만근으로 주조하여 완성한 원각사종(국보 제2호)과 13년(1467) 4월 8일에 완성하여 그 안에 분신사리와 새로이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안치하였다고 하는 10층석탑이었다. 원각사는 도성 내의 3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으나, 연산군 10년(1504) 승려들을 몰아내고 다음해 기생과 악사들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로 옮겼다. 그 후 중종 9년(1514) 원각사의 재목을 여러 공용건물 영선(營繕)에 사용함으로써 사찰 건물은 얼마 안가 자취를 감추었고, 원각사종은 1536년 남대문으로 옮겨졌다. 원각사터는 대한제국 광무 원년(1897) 탁지부(度支部)의 영국인 고문이며 총세무사(總稅務司)였던 브라운[John Mcleavy Brown, 백탁안(柏卓安)]의 건의에 의해 서구식의 공원을 건립하고, 이곳에 남아 있던 원각사탑의 이름을 따 파고다공원이라 하였다. 파고다공원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경성부사(京城府史)≫에서는 “이 지점을 파고다공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26대 고종시대 광무 초년에 영국인 고문 총세무사 브라운이 이 곳을 보존하여 소공원으로 하고, 뒷날 황실 소속의 음악연주소를 설치하는 등의 연유로 파고다공원이라 칭하게 된 데 유래한다는 설과 대리석 또는 화강암 등 백색의 석재로 만든 탑을 백탑(白塔)이라 부르므로 이 음(音)이 전화하여 파고다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공원이 된 당초에는 빈 땅에 간단히 울타리를 두르고 몇 십 그루의 나무를 심고 의자를 갖다 놓은 정도에 불과했다. 일제 때부터 광복 후까지 파고다공원의 면적은 3,330평(11,003㎡)이었으며, 도서관 부지의 면적은 496평이었다. 탑골공원은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발생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아침부터 파고다공원에는 4,000~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소리가 울리자 학생 정재용(鄭在鎔)이 공원 내의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시위 행진을 감행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향하였다. 전국에 번진 3․1운동 만세시위는 이렇게 탑골공원에서 점화되었던 것이었다. 공원 경내에 있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10층석탑은 상층부 3층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1946년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당시 한국에 진주해 와 있던 미군(美軍) 공병대에 의하여 기중기로 위로 올려져 원래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밖에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 등 귀중한 문화재를 비롯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 그리고 독립운동 부조판, 손병희선생 동상 등 많은 기념물이 경내에 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1979년 3․1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공원을 넓혀 정비하였고, 1991년 10월 25일 이 공원을 사적 제354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겨레의 정신적 귀의처이며, 민족정기의 산 교육장으로서의 의미를 살려 ‘3ㆍ1운동 성지’로 조성하고자 2001년 3월 1일부터 재정비사업을 추진하여 2002년 3월 1일 개원하였다. |
파고다 공원은 종로3가역이나 종각역에서 내려서 찾아갈 수 있습니다.
국보 제 2호도 볼겸! 한번쯤 서울안에 있는 탑골공원 찾아가 보는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첫댓글 저 여기 가봤어요 ㅋㅋㅋ근데 왜 기억이 안날까요? ㅠㅠ
국보2호? 좋은 정보을 알게되었네요!!
국보 1호 서울 숭례문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모르더라구요 ㅠㅠ 국가에서 국보에대해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줬으면 좋겠네요^^
국보문화재 탑골공원에 있다니
몰랐던 사실이네요
이제 아는 척해야징

오.. 탑골공원에 국보2호가 있다는건 오늘 알았어요/ㅁ/ 나도 아는척하고 다녀야지♬
사실 저도 검색하다가 알게되었다는^^...;;허허
<미션 통과> 서울에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있는지 모르셨죠? 아닌가... 저만 몰랐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