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15일, 영부인 피격 장면을 나는 청와대 직원 관사에서
텔레비전으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기념식
중계 실황을 시청하다가 보게 되었고,
대통령 영부인이 피격되었다는 긴급연락을 받고 곧바로 서울대학 병원으로 황급히 달
려갔다. 부상을 당한 영부인은 을지로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을 거쳐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옮겨져 있었다.
내가 응급실에
황급히 들어서니 경호원 한 명이 간호사를 돕기 위해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는
영부인의 두 다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경호원 대신 영부인의 버선 신은 두 발을 위로 치켜든 채 안고
서서 간호사의 응급처치를 도왔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 총탄에 피격된
육영수 여사의 마지막 모습
머리에 총탄을 맞은 영부인은 이미 의식불명 상태에서
헉, 헉하는 불규칙적인 호흡소리를 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치명상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놀랍고 안타까워 몇 차례 영부인을 불러보았다.
가쁜 호흡만 몰아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절박한 순간이 내가 그토록 존경하며
따르던 영부인을 마지막 보내는 임종의 순간
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영부인이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에 광복절 기념식 행사를 모두 마친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의과대학장의 안내
를 받으며 들어왔다. 뒤에는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허리를 굽혀 영부인 소지품을 줍는 장면
나는 그 순간의 박 대통령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핏기가 가신 검은 얼굴은 거의 샛노랗게 변해 있었다. 입을 굳
게 다문 무서운 얼굴이었다.
참담하고 황당한 일이 불과 몇 십분 전에 대통령 본인의 면전에서 벌어진 것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주시오” 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는
대통령 전용 입원실로 올라가 수술 경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체포된 저격범은 조총련에 관련된 재일교포라는 긴급보고가 박 대통령에게 올라왔다.
영부인에 대한 수술은 오래 걸렸다.
비서실 직원이 총동원돼 영부인 수혈을 위해 채혈을 했다.
나는 영부인이 끼고 있던 반지
와 총상으로 떨어져 나온 이마의 뼛조각을 응급실에서 의료진으로부터 받아
시신 입관 때까지 호주머니에 보관하고 있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을 때 머리뼈가 부서지면서 떨어진 파편을 수습한 것이었다.
그분이 운명하는 순간, 가시는 이를 아쉬워하는
듯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치더니 병원 창밖으로 내다본 하늘이 영부인이 돌아가실 때 입으셨던
황금색 물방울 무늬의 한복 색깔
처럼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튿날 여러 신문에 그런 사실이 보도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매우 신기한 일이다.
공휴일이라 서산 농장에 내려가 있던 김종필(金鍾泌) 총리가
신직수(申稙秀) 정보부장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김 총리는 신 부장에게 “이것은 한사람이 한 짓이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이 시승식에 참석하게 돼 있었던 청량리 전철역도 조사하라”고 지
시했다. 내가 옆에서 보니 두 사람 모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대성통곡
그날 저녁 7시를 조금 넘어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영부인의 유해가 서울대병원을 떠나 청와대에 도착하였다.
나는 유해 운구차를 뒤따라갔다.
박 대통령은 검은 양복을 입고 지만, 근영 두 자녀분과 함께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는 청와대 본관 1층
영부인 접견실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유해를 모셔놓은 접견실 입구에서 나는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냥 서서 울고 있는데 나를 본 박 대통령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의 통곡 소리를
듣고 옆방에서 뛰쳐나와 대통령의 우는 모습을 보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이 내
옆구리를 탁 치면서 “각하 모시고 이러면 어떻게 해” 하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박 대통령을 집무실로 모셨다.
영부인의 유해는 대접견실로 다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빈소가 마련된
대접견실 구석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려니 갖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군 작업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니던 나
에게 취직하려면 양복이 필요할 것이라며
양복감과 외툿감 각 한 벌씩에 수공료까지 넣어주시던 영부인…,
평생 처음으로 입어
보는 양복과 외투를 입고 영부인께 꼭 보여드려야 한다며
그 바쁘신 영부인을 뵙겠다고 우기던 나를 웃으며 자상하게 만나주시
던 어머니 같은 영부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박 대통령은 매일 이른 새벽에 2층 침실에서 내려와 분향을 했다.
당직자들의 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오랫동안 영부인 빈소에 머물렀으며
때로는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고 했다.
“어머니 오늘 제가 텔레비죤에 나오니까 잘 보세요”
육 여사는 그날 아침 청와대에 와 있던 어머니 이경령 여사에게 행사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렇게 인사를 했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이경령 할머니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도 빈소에 끊이지 않았다.
그때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던 근혜씨는 장례식 3일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 대통령은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가 따님을
태우고 들어오면서 차내에서 저격사건의 전후사정을 설명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큰 따님이 너무 놀라고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귀국길에
오른 따님에게 편지를 써서 외교행낭으로 급히 주일한국대사관으로 보내
따님이 일본 공항에서 귀국 전에 아버지의 편지를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
랑과 존중이 배어 있는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장례 당일 청와대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 뒤에서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아 나갈 때까지 지켜서 보고 있었다.
그 인상적인 장면을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소형카메라에 담는 모습이 보였다.
운구행렬이 경복궁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신직수 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모시고 본관으로 올라갔다.
뒤따라 가면서 보니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코를 푸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1974년 8월 19일 청와대 정문에 서서
운구행렬을 마지막 지켜보는 박 대통령
글쓴 이 : 김두영 (前청와대 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