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핵폭돔 2-조선 왕자 이우 원자폭탄에 8월 7일 히로시마 현장에서 사망
히로시마는 탑재항, 공업지역과 주요 군사거점
2차 대전중 미군의 폭격을 받지 않았던 도시
조선 왕자 이우도 원자폭탄에 8월 7일 사망
모토야스가와강이 흐르는 세계의 유산으로 남아있는 히로시마 핵폭돔이 있는 곳에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핵폭돔의 건물은 체코 건축가인 얀 렛트르의 설계로 1915년 4월 히로시마현 물산진열관으로 완공된 녹색 돔이다, 현지 특산물 전시, 판매, 상공업에 관한 조사, 상담등의 업무와 미술전이나 박람회등도 하였다. 히로시마현 산업 장려관으로 확대했으나 전쟁의 장기화로 업무가 축소되어 내무성 토목출장소, 관공서 사무소등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8월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의 B29 폭격기가 인류 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국 원자폭탄투하 목표 설정 위원회는 45년 5월11일 ◂지름 3마일(4.8km) 이상의 크고 중요한 표적이 큰 도시 안에 있을 것◂폭탄의 폭풍파(영어판)가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것◂1945년 8월까지 (연합군의 상륙 폭격 등) 다른 공격이 계획될 가능성이 적을 것을 토대로 선별했다.
선정한 원폭 투하 5개 도시는 ◂니가타 - 제철·알루미늄 제강·정유 시설 등 공업 거점과 항구◂요코하마 - 항공기 제조 시설·부두·정유 시설 ◂교토 - 주요 공업 거점◂히로시마 - 탑재항, 공업 거점, 주요 군사 거점◂고쿠라(지금의 기타큐슈) - 일본 최대의 군수품 제조 시설 중 한 곳이다.
5개 도시 중 히로시마를 택한 것은 대규모 산업도시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많은 병영이 설치돼 있었으며 일본 육군 5사단 사령부와 일본 영토 남쪽 전체 방어를 지휘하는 육군참모 하타 순로쿠의 제 2 육군 사령부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 해군 입장에서도 일본 최대 군사항구인 구레항에 인접해 물자와 부품을 공급하는 배후공업도시였다. 히로시마는 작은 규모였지만 병참기지였으며 통신 센터, 물류창고, 부대 집결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도시는 2차 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을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들 중 하나였고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원자폭탄 투하 시 폭발 규모를 쉽게 측정할 수 있었다
산업장려관(현 원폭돔) 남동쪽 약 160미터 지점의(히로시마 외과병원) 상공 약 600미터에서 작렬하여 건물은 대파, 전소, 관내 있던 사람들 전원이 즉사했다.(히로시마 시의 90%의 의사들과 93%의 간호사가 사망)
위에서 수직으로 폭풍을 맞아 건물 벽의 일부는 파손을 면하고 최상부에 남은 철골로 돔형의 건물임을 알 정도로 잔재만 남았다.
원폭돔에 대해 기념물로 남기자는 의견과 위험건조물로 피폭의 비참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므로 철거하자는 의견이 대립헸다.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1966년 히로시마 의회가 원폭돔의 보존을 결의했다. 보존공사를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져 1967년 1차 보존공사가 실시되었다. 1996년 12월 원폭돔은 인류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핵무기의 증인으로서 평화기념비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히로시마성과 히로시마 시의 현대적 풍경
조선왕족 이우 출근 중 피폭으로 하루만에 사망
원폭돔을 나서면서 고종의 9남이며 의친왕의 총애를 받은 이우공 전하(운현궁 오라버니, 사망 후 흥영군) 이우가(1917.5-1945.8,7) 히로시마에서 피폭으로 사망했다.
이우가 히로시마 주둔 제2총군 교육 참모로 부임하고 한 달 뒤인 1945년 8월 6일, 정시에 기마 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애마를 타고 출근 중,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곳에서 방사선에 피폭당했다. 이우의 시종 무관이었던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소좌는 핵 공격 사실을 알고 서둘러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이우가 발견된 것은 폭격으로부터 8시간이 지난 오후 4시경이었다.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 서둘러 인접 해군병원으로 후송하자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그를 진찰한 해군 군의관은 외상이 없다고 진단했고 이우 본인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증상을 보인 후 피폭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 5시경 사망하였다.(사진 이우)
당시만 해도 핵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아무도 알지 못했기에 이우 공은 단 하루동안은 살아나리라는 희망의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이우의 장례식은 해방일인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으며 무덤은 흥선대원군 묘역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으며 이우의 신도비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백비(白碑)로 남아 있다
히로시마시를 거닐다보면 오래된 일본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정통적 가옥과 현대식건물이 어우려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
모두가 정리된 계획도시와 같은 현대식 건물로만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6일부로 과거의 역사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아서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곳은 히로시마 성이다.(물론 천수각도 날아가 부분 수리를 하였다.)
히로시마시의 가로수나 모든 나무들도 불타버려 도로가의 나무들도 최대 수령 이 80살 정도이다. 히로시마 성에는 원폭에서 살아남은 버드나무를 애지중지 보호하며 역사적 상징수로 보존하고 있다.
유럽등 서양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히로시마시는 덴마가와강, 혼카와강, 모토야스가와강, 교바시가와강, 엔코가와강등을 오가는 수상택시가 운영되고 있다.
원폭돔을 중심으로 평화기념공원에는 추모관과 자료관, 로마교황 평화어필(프란치스코 교황,2019년), 피폭한 오동나무, 마하트마 간디 흉상, G7 히로시마 정상 회의 기념관(2023년,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 이탈리아 조르자 멜로니총리,일본 기시다 후미오총리, 영국 리시 수낙총리,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초청국 정상으로 호주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 브라질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코모로 아잘리 아소우마니대통령,쿡 제도 마크 브라운 총리, 인도 나렌드라 모드 총리,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 대통령,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 베트남 팜민찐 총리,/특별초청국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귀국기념 시계, 조선공업학교 위령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는 (이우 공 전하 외 이만여 영위)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히로시마 시청과 시민병원을 지나면 히로시마 성이 있는데 10월에는 국화전시회가 열린다.
히로시마성(1592년-1599년 완성으로 추정, 목조 소나무로 건축, 복원 후는 철근 콘크리이트로 구조, 연건평 411평)
히로시마의 지명 이름은 모오리의 선조인 오오에노 히로모토의 <히로>와 테루모토를 이곳으로 안내한 후쿠시마 모토나가의 <시마>를 합하여 히로시마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히로시마성은 리죠오(잉어의 섬)이라고도 불리운다, 히로시마의 프로야구 구단의 이름인 카프(잉어)도 이 이름에서 비롯되었다.(천수각 입장료 어른 370엔, 고령자 180엔)
히로시마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고다이로(보좌관)의 한사람인 모오리 테루모토가 지은 전형적인 평야에 쌓은 성이다. 모오리씨는 남북조 시대 코오리야마성(히로시마,타카다,요시다정)을 본거지로 하는 영주였다. 테루모토에 와서 추우고쿠지방인 히로시마, 시마네, 야구치현 전역과 톳토리, 오카야마현의 일부에 걸쳐 영지를 통치하였다. 1619년 마사노리는 홍수에 의해 파손된 히로시마성을 허가없이 수리개축한 책임을 물어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와카야마서 온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영주로 부임하여 약 250년간 아사노계가 12대 걸쳐 히로시마성주를 지냈다.
메이지 4년(1871년)에 실시된 하이하이치켄 개혁이후 군 시설이 늘고 청일전쟁 당시에는 군 최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원자폭탄 투하로 천수각이 부서졌다, 현재의 천수각은 1958년 복원했다.
(환경경영신문 http://ionestop.kr 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