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8년 전에 쓴 글입니다. 마음 속의 찌꺼기를 다 태워야 비로소 순수의 세상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내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아직도 태워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위 작품 <선(線)>이 사회를 향한 '지성적·주지주의적 수필'이라면, <적요에 대하여>는 자신을 향해 깊이 파고들며 마음의 정화와 진리를 갈구하는 '명상적·성찰적 수필(또는 구도적 수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실험해 본 것입니다. <적요에 대하여>가 내면으로 향하는 깊은 '침잠'이었다면, 반대로 <선(線)>은 우리가 살아가는 차가운 문명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지성적 경고와 성찰'의 가치를 독자에게 전해줍니다. 부족하지만 독자들이 독서할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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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寂寥)에 대하여
고양이 새끼 세 마리가 아파트 입구 화단에서 서로 할퀴며 놀고 있다. 고양이의 장난, 일상일 뿐이지만 말 못하는 짐승들이 어떻게 소통하기에 저리도 신나게 뛰어 놀까하는 생각이 들어 한 참 동안 구경을 한다. 뒹굴던 한 녀석이 뒤란으로 달아나니 나머지 녀석들이 쪼르르 달려간다. 고양이들이 떠난 빈자리 그냥 조용하다. 적요인가?
파도소리가 들린다. 온몸으로 부딪친다. 소통하지 못한 바다는 멍이 들어 파랗다. 안으로 깊어진다. 바다 속의 고요. 깊음보다 더 무거운 적막. 적요인가?
적요(寂寥) - . 쓸쓸함이나 허전함과는 다르다. ‘고요’ ‘고독’도 아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적적하고 고요한 상태란다. 그래도 그 마음자리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자전을 보니 ‘고요하고 평온하고 쓸쓸하고 퀭한 상태’로 풀이 된다. 그 느낌이 조금 다가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빈 마음의 자리에서 까닭 모를 슬픔이 일렁인다. 그 기저는 바다 속보다도 더 깊다. 젊은 시절 밤중에 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산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퀭하니 뚫린 가슴 속을 바람이 싱싱 지나는 것 같았다. 그때 그 바람은 끝 모를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때와 흡사한 마음이 요 며칠사이 계속 일어난다. 마음이 추워지고, 세상과 단절된 것 같고, 누구도 내 마음을 모를 것 같고 그래서 아무나 부여잡고 자꾸 말을 쏟아내고 싶어진다. 이런 상태는 적요가 아니다. 쓸쓸하고 퀭한 상태는 맞지만 고요하고 평안함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다. 그냥 비워진 마음의 흔들림이다. 이 흔들림을 이겨내야 적요에 이른다. 수필을 쓰다 마음에 병이 들 수도 있겠다. 비워낸 마음자리에 터무니없는 것들이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여물을 끓이는 아궁이 속에서 청솔가지가 타고 있다. 불꽃은 보이질 않고 허연 연기만이 뭉실뭉실 피어난다. 흰 연기가 넘치는 것은 불이 제대로 타고 있다는 증좌이다. 아궁이에 가득 찬 연기가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할 즈음에 느닷없이 확-하는 불꽃이 아궁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솔잎은 불티가 되어 날고 화염이 날선 검처럼 찌르며 뻗어져 나온다. 검은 불꽃이 강물처럼 넘실대며 흐르다 자지러들 때 즈음에, 더 이상 탈것이 없는 청솔가지가 맑디맑은 어린 아기 손가락처럼 투명한 붉음으로 바뀔 때, 그 깊음 속에서 새로이 피어오르는 파르스름한 불꽃이 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린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불의 본색. 푸르디푸른 불꽃.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보고 있는 나. 파란 불꽃과 내 눈동자의 초점이 일치하는 그 자리. 무구(無垢)의 불꽃이 피는 그 순간. 완벽한 적요(寂寥)다.
감춰진 마음을 다 고백하고 나면 빈 마음자리에서 다시 불꽃이 피어난다. 수천도의 가마에서 불마저 녹아버린 후 다시 피어나는 불. 바다 보다 깊은 어둠에서 건 낸 청자 빛 감도는 불.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피어난다.
씨앗이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듯 생명은 어둠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진리를 향하는 자만이 고독으로 침잠한다. 고독이 더 이상 다다를 수 없는 자리. 결코 고독이 머무를 수 없는 자리. 인간의 모든 애태움이 끝나는 그 자리에서 별보다 더 푸른빛이 태어난다. 생명의 빛이 태어난다.
(200자 원고지 9.5매/200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