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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대은. 대표팀에서의 느낌표를 제대로 풀어냈다.(사진=이영미)>
2014년 3월 초,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신분의 그를 만났었다. 옆에는 같은 팀에서 동고동락했던 하재훈이 자리를 지켰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는 트리플 A에서 메이저리그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엽, 김태균이 거쳐 간 지바 롯데 마린스였다. 37경기에 등판해서 9승9패 4홀드, 3.84의 평균자책점이 올시즌 그의 성적이다. 그런 그가 프리미어 12 대표팀에 합류했고 쿠바와의 평가전을 시작으로 베네수엘라와의 예선전, 그리고 일본과의 준결승전에 등판했다.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2경기 선발 등판, 1승을 챙겼고, 일본과의 4강전에선 3⅓이닝 동안 3실점 1자책의 성적을 거뒀다. 잘생긴 외모와 실력으로 그는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대표팀이 프리미어 12 우승컵을 안고 귀국한 공항에선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지금, 그가 기자 앞에 앉아 있다. 이대은(26)이다(2014년 이대은, 하재훈 인터뷰 참조)
비가 내리는 25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대은은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잘생겼다’는 말을 애써 하지 않으려 해도 절로 인사가 나올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기분 좋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다음은 이대은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태극마크가 이대은에게 준 선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격세지감’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2014년 3월과 2015년 11월, 불과 얼마 안 된 시간인데 엄청난 변화가 있는 것 같아서요.
“프리미어 12를 마치고 한국에 오니까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대표팀의 위상을 절감했습니다. 이래서 태극마크를 달려고 하는 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대표팀 선수들이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 국제청사가 마비됐다면서요? 특히 이대은 선수 때문에.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런데 정말 많은 분들이 제게 몰려들긴 했어요. 많이 당황스럽더라고요. 자꾸 웃음이 나기도 했고.”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는 게 신기했고, 어색하고 멋쩍은 기분에 그냥 웃었던 거죠.”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받았던 이대은. 그는 이런 상황이 신기했다고 말한다.>
대표팀에서 가장 ‘핫’한 선수였어요. 남다른 외모도 주목을 받았고요.
“야구를 잘해서 인기를 얻어야 하는데(웃음).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외모에 대한 얘기가 거의 없었거든요. 일본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입단식 때부터 외모와 관련된 얘기가 많았으니까요.”
여기선 외모 얘긴 그만할게요. 지겨울 것 같으니까(웃음).
“감사합니다(웃음).”
프로가 된 후 처음으로 경험한 대표팀 생활이었어요. 어떠하던가요?
“대표팀은 초등학교 때 한 번 해보고 이번이 처음이었죠. 대표팀 선수들 중 아는 사람은 (김)현수 형 밖에 없었어요. 신일고 선후배로 인연을 맺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어요. 거의 처음 보는 선수들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제게 형들이 먼저 다가와주셨어요. 정말 잘 챙겨주셨거든요. 그리고 선수들은 운동하다 보면 금세 친해져요(웃음).”
이번 대표팀에 꼭 발탁되길 바랐나요?
“그럼요.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대표팀은 초등학교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터라 한국 선수들끼리 모여서 야구하고 대화하는 생활이 그리웠어요. 더욱이 일본에서 하는 대회라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부담도 만만치 않았어요. 언론에서 김광현 선수와 함께 대표팀의 원투펀치라고 띄워주시는 바람에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대표팀 선수들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떠했나요?
“엄청 설레더라고요. TV로만 보던 선수들이 거기에 다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만 어색했지, 그 후엔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제가 미국이나 일본에선 외국인 선수 신분이잖아요. 그래서 더그아웃에 있을 땐 거의 대화하지 않고 야구만 보거든요. 약간 고립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대표팀에선 외국인 선수가 아니잖아요. 선후배들과 대화하며 같이 응원하고, 그 기분이 아주 짜릿했어요.”
고척돔경기장에서 펼쳐진 쿠바와의 평가전에서 4이닝 무실점을 거두며 데일리 MVP에 뽑히기도 했어요.
“잘 던져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긴 했지만 마냥 기분 좋지는 않았어요. 일본에서도 시범경기 때 굉장히 좋은 피칭을 했다가 막상 시즌 들어가선 힘든 경기를 할 때가 많았거든요. 평가전에서 아무리 잘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대회에서 잘 던져야지.”
B조 조별리그 베네수엘라전에선 5이닝 2실점으로 대표팀의 13-2, 7회 콜드게임 승리를 이뤘잖아요.
“그건 타선이 제대로 터져 준 덕분에 부담 없이 던진 것이고요. 참, 베네수엘라전에서 3회 홈런을 맞았는데 홈런을 친 선수가 후안 아포다카라고 시카고 컵스에서 함께 생활했던 선수였어요. 미국대표팀의 엘리엇 소토와 케이시 콜먼도 컵스 선수였었고요. 캐나다 대표팀에도 한 명 있었는데 대회 내내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어서 문자만 주고받았어요.”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역투하는 이대은.>
두 차례의 일본전, 이대은의 깨달음
개막전으로 치른 일본과의 경기에서 0-5패를 당했어요. 당시 선수단 분위기가 어떠했나요.
“만약 그 경기가 단판전이었고,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굉장히 우울했겠죠. 그러나 형들이 다른 경기에서 다 이기면 결승전에 올라갈 확률이 있으니까 포기하지 말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그리 나쁘진 않았어요.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고.”
일본과의 준결승전에는 선발로 등판했어요. 한일전이고, 두 번째의 맞대결이라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그렇죠. 한국도, 일본도, 양 팀의 경기에는 목숨을 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무조건 이겨야 했고요. 선발 통보를 받은 후 의외로 걱정이 되지 않더라고요. 올시즌 내내 일본 타자들을 많이 상대해봤고,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선 그들이 내 공을 치기 어려울 거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대표팀에서 트레이닝을 잘 받은 덕분에 컨디션이 아주 좋았거든요. 제구만 제대로 잡힌다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던졌습니다. 1회부터.”
김인식 감독이 “김광현과 이대은은 투구수 60개가 넘어서면 베스트가 나오지 않는다. 투구수를 조절해줄 것이다”라고 얘기했었어요. 그런데 일본전에서의 투구수가 95개였거든요.
“사실 던질 때는 투구수가 늘어난 걸 느끼지 못했어요. 2이닝 마치고 더그아웃에 들어가서 형들에게 200개를 던져도 자신있다고 말했어요. 선동열 코치님이 등판하기 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가 선발이니까 최대한 오래 끌고 가겠다’라고요. 그래서 투구수를 확인하지 않고 던졌던 것 같아요. 3이닝 까진 잘 막았는데….”
4회에 실점하면서 우르르 무너진 셈이죠.
“첫 실점이 나올 때는 더 이상 점수를 주지 말자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또 실점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감독님, 코치님,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어요. 나 때문에 결승전까지 못 가는구나 싶었고요.”
8회까지 0-3으로 지고 있었기 때문에 9회에 우리가 역전하리라곤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마운드에서 내려가면서부터 우리한테 새로운 기회가 오리라 믿었어요. 그러다 9회 (오)재원이 형이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부터 더그아웃이 들썩이기 시작했었죠. (정)근우 형이 2루타를 치면서 첫 득점하는 순간, 그리고 (이)용규 형의 몸에 맞는 볼, (김)현수 형의 밀어내기 볼넷으로 한 점차까지 따라붙었을 때는 심장이 멎을 뻔 했습니다. 대호 형이 적시타를 터트리면서 4-3 역전에 성공했을 때는 모두가 미쳐있었어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까요. 마지막 타석에 대호 형이 들어섰을 때는 우리 모두 대호 형이 돼 있었어요. 모두 한 마음으로 형을 응원했던 거죠.”
<이대은은 대표팀에서 선동열, 송진우 코치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김인식 감독의 한 마디에 울컥하다
이대호 선수가 대표팀의 중심 역할을 맡았죠?
“대호 형과 (정)근우 형이요. 특히 근우 형이 후배들을 잘 이끌어줬어요. 그런데 근우 형이 야구를 정말 잘하시더라고요.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저를 가장 놀라게 했던 선배예요. 얼핏 보기엔 농담 잘하고, 장난 많이 치시는 것 같지만 야구 센스가 엄청나시더라고요. 근우 형 하는 거 보면서 속으로 ‘야구, 진짜 잘 하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프리미어 12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은 이가 오타니 쇼헤이 선수였어요. 일본 리그에서도 몇 차례 맞붙었던 적이 있었죠?
“그렇죠. 서너 번 정도는 됐을 거예요. 상대팀 투수로 만난 게. 오타니가 우리랑 할 때도 아주 잘 던졌어요. 그때랑 똑같이 던지더라고요. 1회부터 전력을 다해서.”
우리 선수들이 오타니 쇼헤이 선수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선발 투수가 160km 넘는 공을 던진다는 건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요. 굉장히 빠른 볼을 던지는 데다 변화구 위주로 공략하니까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대표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람이죠. 감독님, 코치님, 선후배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내년 시즌 제가 야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동열, 송진우 코치의 지도를 받기도 했어요.
“처음엔 진짜 신기하더라고요. 이렇게 대단한 분들 옆에서 야구할 수 있다는 게. 두 분을 많이 귀찮게 해드렸어요. 제가 질문을 많이 했거든요. 두 분 모두 최고의 투수 출신이시잖아요. 많은 걸 배우고 싶었어요. 미국에선 코치들이 디테일하게 가르쳐주지 않거든요. 선수에게 맡기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평소 궁금했던 부분을 자주 여쭤봤고,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주셨어요.”
그 궁금했던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웃음).
“하하, 특별한 건 없어요. 이론적으로 다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잘 안 고쳐지는 게 있거든요. 그런 걸 여쭤봤었죠. 게다가 다른 분도 아닌 선동열, 송진우 코치님의 말씀이라면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믿고 따를 수 있으니까요.”
김인식 감독님은요?
“멋진 분이시더라고요. 묵묵히 뒤에서 선수들을 자상하게 챙겨주는 스타일이셨어요. 우승하고 선수단 회식 때 모자를 벗으시면서 ‘모두들 수고했어요.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우리가 감독님께 의미있는 선물을 드렸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 덕분에 우승까지 갔던 것이고요.”
“야구를 배우고 싶어 일본으로 갔다”
미국에서의 7년 여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건너간 배경이 궁금해요.
“트리플 A에만 머물면서 더 이상 이렇게 생활했다간 발전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점프를 해야 하는데 점프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함이 가중됐고요. 그때 일본에서 좋은 조건으로 오퍼를 보내왔어요. 고민 끝에 ‘일본에서 해보자’가 아닌 ‘일본에서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지바 롯데와 계약을 맺은 것이고요. 만약 일본행이 제 야구 인생의 마지막 무대였다면 선택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언젠가는 다시 메이저리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향했던 거죠.”
일본에서 한 시즌을 보냈는데, 소감이 어떤가요.
“일본 야구에 대해 좀 알게 됐어요. 일본의 야구 스타일, 투수들의 볼 배합, 그리고 투수들이 어떤 걸 중점으로 두고 하는지도 배웠고요.”
생활면에선요?
“음, 생활은 크게 변화가 없어요. 혼자 지내는 건 미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일본에서 백차승 선수랑 같이 있었죠?
“네. 차승이 형이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진짜 야구 밖에 모르는 분이에요. 이번에 대표팀 우승했다고 축하 문자도 보내주셨어요.”
일본에서의 데뷔전이 때마침 소프트 뱅크와의 경기였어요. 이대호 선수를 상대하기도 했는데요.
“경기 전에 팀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6.1이닝동안 9피안타 1홈런 9K 2볼넷 4실점을 기록했습니다. 다행이 우리가 5-4로 이기면서 데뷔전에서 첫 승리를 거뒀지만 경기 내용이 좋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타자들이 왜 이렇게 잘 치지?’ 싶은. 스프링캠프 때는 정말 잘 던졌거든요. 코치들이 오히려 너무 잘 던져서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로 공이 좋았어요. 그런데 첫 경기에서부터 홈런 포함해서 9개의 피안타가 나왔으니 정신줄 놓을 뻔 했었죠.”
“이대호만 만나면 전력 투구했다”
이대호 선수를 상대해선 1안타, 1삼진을 기록했어요.
“대호 형이 체격이 크다고 파워만 있는 게 아니에요. 공을 맞추는 컨택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요. 삼진도 잘 안 당하고. 그래서 대호 형을 상대할 때는 더 힘을 줘서 던지는 것 같아요. 대호 형도 그걸 눈치 챘는지 한 번은 ‘왜 나한테만 세게 던지느냐’고 가볍게 항의하시더라고요(웃음). 앞의 타자들한테는 그렇게 안하다가 자신이 타석에 들어서면 전력투구를 한다고요.”
이대호 선수에게 30호 홈런을 선물했었죠?
“맞습니다. 당시 대호 형이 한동안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절 상대로 30호 홈런을 때리시더라고요. 당시 제 상황이 많이 안 좋았거든요. 7월 30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시즌 9승을 챙긴 뒤 59일째 추가 승을 올리지 못했어요. 9월 26일 소프트 뱅크와의 경기는 10승을 올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는데 대호 형의 투런포로 10승이 날아가 버렸죠. 대호 형이 홈런치고 제게 굉장히 미안해 하셨어요. 제 상황을 아시고 계셨으니까요. 경기 후에 대호 형에게 연락드렸더니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선수에게 홈런 맞는 것보단 대호 형에게 홈런 맞는 게 훨씬 낫다고, 괜찮다고 말씀드렸죠. 그게 사실이고요.”
<이대은은 대표팀 생활을 통해 미국이나 일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끈끈한 정을 느꼈다.>
아무래도 선발투수로 뛰는 게 익숙하죠?
“그렇죠. 미국에서도 계속 선발로 나갔으니까 불펜보다는 선발이 익숙하고 편해요. 일본에서도 불펜보다는 선발을 희망했는데 성적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불펜으로 내려갔을 때는 제가 못했기 때문에 받아들였어요. 2군행도 마찬가지였고요. 한 번은 오치아이 코치님이 평균자책점을 4점대에서 3점대로 끌어 올리면 선발 기회를 주겠다고 언론에다 얘길하셨더라고요. 그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결국 다시 선발로 복귀했고, 9승까지 갔던 거죠.”
그런데 그 아홉수를 넘어서지 못했어요. 볼넷도 63개나 나와 리그에서 가장 많이 볼넷을 내준 투수로 기록됐고요.
“제가 지바 롯데 입단식에서 올시즌 목표를 두 자릿수 승수라고 말했거든요.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9승 이후부터는 1승을 더 챙기려고 도망가는 피칭을 많이 했었죠. 그러다 무너지게 되고. 너무 잘하려고, 안 맞으려고 버둥거리다 볼넷만 늘어나는 꼴이었어요. 그 남은 1승이 오히려 제 발목을 잡은 셈이었죠. 8승째 까진 정말 좋았는데.”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KBO리그에 대해 생각을 해봤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렇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KBO리그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힘든 부분도 있고요. 그러나 프로야구 규약(107조 2항)에 따르면 1999년 이후 해외에 진출한 선수는 국내 구단과 2년간 입단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돼 있잖아요. 외국에서 7,8년을 뛴 시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국내 들어와서 2년을 쉰 후 드래프트를 통해 KBO리그에 입단하게 된다면 제가 포기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 너무 큰 거예요. 결국 생각만으로 그치는 거죠.”
그럼 내년에도 지바 롯데에서 뛰는 건가요?
“글쎄요. 아직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에이전트랑 상의 중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2007년 신일고를 졸업할 때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될까요? 메이저리그?
“네. 전 그럴 것 같아요. 한국의 프로야구는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전 미국에서 야구하며 배운 게 정말 많았거든요. 메이저리그에 오르지 못하고 7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만 머물렀던 부분은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그곳에서의 생활이 행복했어요. 제가 처음에 얘기했던 거 기억나세요? 어떤 ‘선’을 넘어서야 그 다음의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데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 선을 넘지 못했다고. 미국에선 메이저리그의 문턱이었고, 일본에선 10승이었죠. 그런 가운데 경험한 대표팀 생활은 앞으로 야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제가 뭐라고 팬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겠어요. 야구를 하기 때문이잖아요. 이제 야구를 잘하는 일만 남았어요. 내년에는 야구 잘하는 선수로 인정받고 싶어요. 외모말고요(웃음).”
<정말 잘생겼다!^^(사진=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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