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7월14일 금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수도회] 끝까지 견딤으로써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46,1-7.28-30
† 복음 마태 10,16-23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장차 모함과 박해가 올 것을 예상하시며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롭게 되라는 말씀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뱀이 부정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창세 3,1 참조).
고대 근동 세계에는 뱀에 관한 신화와 숭배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지요.
뱀에게는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허물
벗는 것을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 뱀은 영원한 생명을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뱀 신화와 뱀을 숭배하는 의식은
유일신을 믿는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스라엘은 뱀을 악의 세계, 또는 악마와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박해자들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 시대 초대 교회는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고 식인종 취급을 하기도 하고, 노예들을 형제로
여기는 것을 보고는 그리스도교가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고
핍박하였지요.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리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부
종파는 중상모략마저 일삼고 있습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복음을 널리 전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에 충실하며 가톨릭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참으로 걱정거리가 많은 세상입니다.
2017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내가 너의 얼굴을 보았으니,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6,1-7.28-30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뉴스를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사건 사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교통사고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교통사고가 많으니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이 안전할까요? 어떤
분은 교통사고의 위험 때문에 여행 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대에서
생명을 잃는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침대부터 조심해 하는 것이 맞을까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위험은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 용기를 가지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용기란
원래부터 있어왔던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기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이름을
날렸던 위인들이 원래부터 초인적인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용기 있는 삶을 선택했던 것이었습니다.
김원각 시인의 ‘달팽이의 생각’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짧으니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조금 앞서 간 달팽이나 조금 뒤쳐진 달팽이나 지구 안에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말, 즉 조바심을 갖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걱정의 마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원하는 용기 역시 이 생각의 전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걱정을
버리고, 용기 있게 순교하셨습니다. 이분들이 처음부터 용기가
충만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생각의 전환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었고, 대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 참 행복의 길임을 확신했지요.
그래서 용기를 선택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걱정거리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조금만이라도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걱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으로 걱정의 틀에서 벗어나서 지금의 자리에서
용기 있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용기 있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꽃 심으면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피면 또 질까 걱정하네. 피고 짐이
모두 시름겨우니 꽃 심는 즐거움 알지 못해라(이규보).
제천 청풍호 자드락길을 걸었습니다.
이정표
저는 어제 제천의 청풍호 자드락길을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계속해서 성지에서 바쁘게 지내다보니 조금 걸으면서 여유를
즐기려고 혼자서 떠났습니다. 사실 그 동안 많이 걷지 않았기
때문에 걷는 것이 조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보니 이
자드락길이 원만해서 누구나 쉽게 오를 수가 있고, 또한 멋진 경관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다른 곳을 가려고 했으나
과감하게 이동 중에 목적지를 바꿔서 제천으로 떠났습니다.
드디어 자드락길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르면서 속았다는
기분이 가득합니다. 너무 힘든 것입니다. 거의 땀을 한 바가지는
쏟은 것 같습니다. 물론 다이어트에 조금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가파른 길과 더운 날씨(어제 뉴스를 보니 75년 만에 7월 최고
기온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계속해서 저를 공격하는 벌레들
때문에 정상에 오르기 전에 완전히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중간에 포기할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의지가 남달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이정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상까지 **Km 남았습니다.”
이 이정표를 보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래, 조그만 더
힘내서 가자.’
결국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힘든 만큼 정상에서의 기분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이정표 없이
오를 수가 있었을까?’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이정표를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삶 안에서,
그리고 성경 안에서, 기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정표를
보여주시는지 모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포기하려 할 때,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이정표를 찾아보십시오. 다시 한 번 힘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디로 갔을까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끝까지 견딤으로써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마태 10,16-23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끝까지 견딤으로써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이 당신 때문에 채찍질을 당하고,
재판을 받을 것이며, 가족들끼리 분열하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처지에 놓일 때 슬기롭고
순박해야 하며, 사람들을 조심하고, 끌려가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10,22).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주님께서 부르시기에 그저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사랑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아니 적어도 사랑에
이르기 위해 응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라나선 것은 결국 주님
안에, 그분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은 부르심을 받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길이 왜 그토록 박해와 저항과 고통의
연속일까요?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처럼 험한 가시밭길이라면
누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이 길을 걷다보면 과연 행복을 만날
수는 있는 걸까요?
제자의 길에서 만나는 유혹과 고통과 박해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겪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고,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교만과 불의와 거짓이 고통을 만들고 세상을
어둡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정반대의 길을 가기에 저항에
부딪치고 시련을 겪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어쩌면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 때문에
더한 고통과 박해를 감당해야 한다니 쉽지 않은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두를 존귀한 존재로 여겨 평등하게 대하고 사랑하라 하시지요.
그러나 자신이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경쟁과 효율과
능력을 키워 수직의 지배질서를 만들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러니
신앙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신 당신을 본받으라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더 높이 오르려 하고, 더 힘을 지니려 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튀려고 합니다. 그런 세상살이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면 시련을 겪기 마련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가라 하십니다. 고통과 박해가 따르더라도 끝까지
견뎌낼 때 구원을 받는다 하십니다.
오늘 그렇게 우리는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통과 박해를 견뎌내지 않고서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르고
진실하며 정의롭게 살지 않고 겉으로 행복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그런데 고통을 견뎌낸다는 것은 불의와 불평등에 눈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견디라는 것은 덮어놓고 참으라는 것도, 홀로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도 아니지요.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십시오.”(수도규칙 10,8-9)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함께 사랑과 평화,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투신하며 견뎌야 합니다. 부조리하고 불의한 현실에 맞섬으로써
겪게 되는 그 고통을 통하여 주님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영(靈)의 이끄심에 나를 맡기고, 주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시련과 박해를 견딤으로써
‘인내이신 주님’과 일치하는 ‘거룩한 버팀’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것이며, 이것이 제자의 본분인 까닭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산다는 건 견디어내는 겸손입니다.
견디어내는 이 여정이 바로 우리 삶의 은혜로운 여정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어 내십니다.
견디어내시는 순종으로 끝까지 아버지 뜻에 충실하십니다.
견디어내는 이 여정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될 것입니다.
견디어내는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믿음과 겸손을 얻게됩니다.
견디어 낼 힘을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 구원을 위하여 용감히 이 길을 걷게하여 주소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끝까지 견디어내는 실천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 10,16-23
주변을 보면 ‘산티에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 중에도 4명이 다녀왔습니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진행되는
세상에서 길을 걷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전에 우리
어르신들은 이웃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식사는 하셨는지요? 어디 가십니까?’ 안부를 묻는 것과 식사를
하셨는지를 묻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는지를 묻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순교의 길을 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신자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박해를 피해서
몸을 숨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의 말을 듣고
로마를 떠나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예수님께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당신이 십자가를 포기하기 때문에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지난번 피정을 하면서 많이 걸었습니다. 걷다보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저수지의 물, 길가의 풀, 다람쥐, 새, 길가의 표지판, 작은
성모상을 보았습니다. 차를 타면 보기 힘든 것들입니다. 걷다보면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일에 대한 욕심도 있었고, 음주를 자주하였고,
기도를 소홀히 하였고, 나눔에 인색했습니다. 걷는 것이 목적일수도
있지만 걸으면서 주변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이 더 큰 보람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여름입니다.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순례의 길을
나서면 어떠실는지요?
가끔씩 글을 써야할 때가 있고, 강의를 준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글을 써야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저의
능력과 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늘 고민과 걱정이 제 앞을
가로막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주님께 기도를 하고, 주님께 의지를 하면 생각하지 않았던 좋은 글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합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2시간 강의를 하는 것도 큰 탈 없이 지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의 힘으로만 하려고 하면 몇 시간씩 책상에 있어도 좋은 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제 능력으로 강의를 하려고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마태10,16-23)
예수님이시라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