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시간 정선역으로 가는 길은 분주하지도 시끄럽지도 않다. 초등학교 앞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학교 앞의 문방구도 문이 닫혀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사라진 교문은 가을날처럼 쓸쓸하다.
정선역이 보인다. 비만 오면 질척하던 역 광장은 아스콘이 깔려있다. 어린 시절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곳이다. 광장엔 가수 이미자 노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던 아낙네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역 광장을 둘러싸고 있던 가게들의 간판도 거의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곳은 단 두 곳, 부흥약방과 현대여관이다. 부흥약방집 아들은 지금 건설회사 상무로 있고 현대여관집 딸은 일본에 가 있다. 광장을 떠난 가겟집의 아들딸들은 그 흔한 소문조차 없다.
계단을 두고 옆길로 올라간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심부름으로 약재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던 길이다. 경사가 심해 몇 번은 쉬어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어쩌다 뒤를 밀어주는 아저씨라도 만나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황기나 당귀 등의 약재를 서울의 한약상에 보내는 것이 내 임무였다. 계산을 치르고 나면 꼭 몇 십 원은 남았다. 나는 그 돈을 벌려고 심부름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시절 수화물을 담당하던 이계장의 아들은 잡지사 편집장이 되었다.
▲ 기차를 기다리는 여행객. 정선엔 전날 도착했다고 한다.
ⓒ 강기희
오전 9시 30분, 기차가 도착한다. 기차에서 내리는 이가 셋이고 오르는 이가 일곱이다. 배낭을 메고 있는 걸로 보아 다들 여행객이다. 기차 안의 승객은 차장을 포함해도 열을 넘지 않는다.
기차는 단출한 승객을 태우고도 힘차게 기적을 울린다. 철교를 지나자 터널이 나온다. 여성 두 분을 제외하곤 각자 모르는 사이라 객실은 조용하다. 터널을 나온 기차는 강을 끼고 달린다.
설기현 선수가 송석 출신이래요?
기차가 예전 간이역이 있던 곳을 지난다. 당시 역 이름은 송석역이었다. 송석은 남평마을의 예전 지명이다. 송석역은 통학생이 많았던 남평마을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역이다. 하지만 지금은 역사는 어딜 가고 어설프게 만든 플랫폼만 남았다.
송석을 지나는데 누군가 축구선수 설기현이 이 마을 출신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다들 "그래요?" 하고 관심을 나타낸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놀랍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역시 정선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설기현 선수가 송석 출신이라고 말한 이후 자주 대화를 이끈다. 대화 내용을 듣자니 오래전 나전광업소에서 광부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여행객들. 창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강기희
기차가 나전역에 도착한다. 나전역에서는 한 사람도 내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차는 잠시 정차했다 출발한다. 나전을 지나며 광부였던 사람의 말수가 늘어 갔다.
나전은 집집마다 배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어릴 적 배서리를 했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큰 길이 만들어졌다. 탄광이 문을 닫은 이후로 나전도 많이 변했다.
아우라지역으로 바뀐 여량역
아우라지역에 도착한 기차는 종착역인 구절리로 가지 못하고 멈춘다. 구절리역은 폐선이 된 지 오래라 이젠 아우라지역이 종착역 역할을 한다. 폐선이 된 후 구절리 구간은 기차 대신 레일바이크가 운행된다. 탄광이 문을 닫은 이후 구절리는 버려진 마을과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구절리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이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아우라지역. 구절리를 가려면 레일바이크와 연결되는 풍경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 강기희
아우라지역의 원래 이름은 여량역이다. 사람들은 여량이라는 이름보다 아우라지가 더 알려져 있다며 몇 해전 역 이름을 아우라지로 바꾸었다. 햇살을 받으며 여량거리로 나가본다. 거리에서 여량의 옛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추억이 사라진 거리에서 잠시 방황하다 강변으로 걸음을 돌린다.
철길 넘어 어릴 적 자주 드나들던 친구집을 찾아본다. 친구집이 있던 일대가 거대한 문화재발굴터로 변했다. 지나가는 이에게 무슨 사연인가 물었더니 아우라지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려다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는 바람에 모든 개발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문화재가 무슨 소용있냐며 빨리 관광지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나는 문화재가 번듯한 건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그 말에 지나가던 이가 뭔 소리냐며 화를 벌컥 낸다. 괜한 걸 물었나 보다, 하고 후회하며 아우라지로 걸음을 옮긴다.
강을 사이에 둔 처녀 총각의 애달픈 사연
▲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아우라지. 정자 근처에 아우라지 처녀상이 있다.
ⓒ 강기희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이 하나의 물줄기로 어우러지는 곳이다. 합수머리나 양수리가 같은 말이다. 강변엔 강을 오가는 나룻배가 보인다. 손님을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뱃사공이 물수제비를 뜬다. 나는 백여년 전 아우라지 처녀가 서 있었을 법한 강 언덕에 선다. 그 시절 아우라지 처녀는 홍수로 인해 강 건너 총각을 만나지 못했다. 처녀가 뱃사공에게 이렇게 애원했다고 한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처녀의 애절한 소리를 총각이 이렇게 받았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처녀 총각의 애달픈 사연이 눈물겹다. 불꽃처럼 피었다가 사그라드는 요즘의 사랑과는 출발부터가 다르다. 여기에서 올동박은 생강나무를 말한다.
▲ 레일바이크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 홍콩에서 온 사람들이다.
ⓒ 강기희
아우라지역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뜻하지 않은 풍경을 만난다. 말로만 듣던 레일바이크가 줄을 이어 아우라지역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목도리에다 털모자까지 쓴 모습들이다. 말소리가 다르다 싶어 사진을 찍는 이에게 물으니 홍콩에서 온 관광객이란다. 그들은 어름치 카페를 배경으로 사진을 열심히 찍더니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잠시 숨을 돌린 기차가 다시 기적을 울린다. 정선으로 돌아가려면 기차를 타야만 했다. 서둘러 기차에 오르니 손님들이 낯익다. 다들 정선에서 출발할 때 함께 온 여행객이다. 반가움에 한 마디쯤 건네볼 만도 하지만 추억할 것이 각자 다르므로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기차는 필름을 되감듯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기차가 나전을 지날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기차여행을 하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던 삼십대 여자의 전화다. 옆 사람에게 미안했던지 여자는 조심스레 통화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