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5 – 21 라이프러리 아카이브 갤러리(T.02-363-5855, 인사동)
2019. 6. 15 – 6. 23 이천시 아트홀 갤러리(T.031-644-2100, 이천)
숨-안녕
이영숙 개인전
글 : 안진국 (미술비평가)
‘점’이 불어넣은 생명
이영숙의 미학은 점의 미학이다. 작가는 초창기 작업부터 점의 표현 방식에 심혈을 기울렸다. 하지만 초창기의 점은 그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했다. 그랬던 것이 작가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은 조금씩 점에게 생명을 불어넣었고, 마침내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서의 점으로 모습이 변한다. ‘죽어있는’ 점이 어느 순간 ‘살아있는’ 점으로 부활한 듯 보인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남종화의 대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외삼촌의 삶과 작업에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다가 2009년부터 전시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작가의 작업들은 산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나 풍경 소묘가 대부분인데, 이 작업들은 기본기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주요 소재가 된 산은 어머니와의 기억이 스며있는 장소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며, 어머니를 느낄 수 있는 포근함으로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어쩌면 이 시기 기본기에 충실했던 것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특성을 아주 잘 보여준 전시가 바로 2013년 한국화 개인전 《산-꿈꾸다》(경인미술관)와 《제2회 FACO Art Festival》(대한민국예술인센터 전시장)의 연필 소묘 개인부스전이다. 작가는 이 전시들을 통해 숙련된 산수화와 연필 풍경 소묘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 전시 이후 이영숙의 화풍은 점차 변한다. 붓 선으로 그리거나 면으로 농담을 표현하는 것을 줄이고, 이전보다 더 많은 점을 겹쳐 찍어 산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점법에서 점묘법으로
이영숙 작업의 이러한 변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동양의 점법’에서 ‘서양의 점묘법’으로 변한 표현 형식이다. 이런 변화는 점의 속성을 바꿔놓았다. 중국 청나라 초기에 편찬된 화보(畵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는 점법만 36종이 설명되어 있을 정도로 동양화의 점법(点法)은 다양하다. 산수화를 그릴 때 나뭇잎, 풀 등의 입체감, 양감, 질감 등을 표현하기 위한 점법을 점엽법(点葉法)이라고 하는데, 표현 대상에 따라 그 점엽법 또한 다양하게 존재한다. 작가는 기본기에 충실했던 2013년까지의 초창기 진경산수화에서 이러한 다양한 점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다양하게 구사하던 점법이 2013년 이후에는 유사한 형태를 지닌 점묘법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점찍는 방식에서 일정하게 반복해서 찍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표현 방식의 퇴보인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변화는 점을 표현의 수단에서 ‘점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의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2015년 당시 동양의 정신성을 기존의 전통 방식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고 벗어난 서구적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서구적 방식은 바로 점묘법(點描法, pointillism)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점법과 서양의 점묘법은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 변화가 중요한가? 동양의 점법이 표현 대상의 묘사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점을 찍는 방식이라면, 서양의 점묘법은 대기에 떠도는 미세한 빛입자를 찍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점묘법은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분해되는 색상을 고려하여 색점들을 병치하는 묘법이다. 그래서 점묘법은 대상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서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 드러난 대상의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다. 점묘법 그림이 마치 망울망울 떠다니는 색색의 빛입자들로 화면이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양의 점법에서 서양의 점묘법으로 변한 이영숙의 작업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 기존의 방식에서, 빛의 색입자를 표현하기 위해 점을 찍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러 동양화 점법 중 그 대상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점법을 찾아 찍을 필요가 없어졌으며, 빛으로 충만한 대기에 균일하게 존재하는 색상의 빛입자(빛점)들을 표현하면 되기 때문에 유사한 모양의 점들로 화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반복과 차이
이러한 변화는 최근의 <숨-안녕> 연작의 추상 작업으로 이어진다. 기본기에 충실했던 시기의 점찍기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점묘법으로 변한 이후 ‘반복을 위한 반복’에 가까워졌다. 작가는 어느 순간 이 반복에서 일평생 잠시도 쉬지 않는/쉴 수 없는 ‘호흡’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이 숨은 누가 불어넣어 준 것인가?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흙의 먼지, 흙의 점들은 사람이 되고, 하느님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이 시작된다. 결국 흙의 먼지, 즉 흙의 점은 사람이 되어 숨 쉰다. 칸딘스키가 말한 ‘죽어있는’ 점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은 일평생 쉬지 않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살아야 한다. 평생을 반복하는 호흡 속에서 작가는 ‘반복이 결국 삶’이라는 깨달음까지 얻게 된다. 또한, 자신의 내면에 들어왔던 들숨이 자신의 몸에 잠시 머물다 날숨으로 세상에 나가, 자연의 숨이 되고, 이웃의 숨이 되고, 타인의 숨이 되는 것을 떠올린다. 더불어 자신이 내뱉은 과거의 날숨이, 언젠간 자신이 들이마실 미래의 들숨으로 다시 되돌아올, 그 숨의 순환성을 떠올린다. 점은 그렇게 숨과 삶과 반복으로 깊은 사유의 세계로 작가를 끌어들였다. 이렇게 확장된 점의 상징성은 마침내 씨앗 모양으로도 보이는, 어쩌면 불씨를 의미할 수도 있는 촛불이 되어 우리 앞에 도착한다. 이것은 이영숙이 빛나는 무수한 점들을 상상하면서 그려낸 점의 형상이다. 개연성 있는 추측을 해본다. ‘점묘법의 빛입자가 빛나는 점들을 떠오르게 했으리라.’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작가가 빛나는 점을 상상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차원이다. 작가가 상상하는 빛나는 무수한 점들은 단순히 빛의 입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빛나는 점을 연결시키며,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된다는 낭만적인 별(점)에 관한 서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뇌리에 남아 있는 빛나는 무수한 점들은 2016년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촛불들이다. 그 광장에 모였던 한 명 한 명의 마음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이제 점은 단순한 점이 아니고, 점의 반복도 단순한 반복이 아니게 된다. 점이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이제 작가의 ‘반복을 위한 반복’은 그저 단순한 기계적인 반복의 차원이 아닌, 그 차원을 넘어선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