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7
1월8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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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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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zLqFJLRsHU
[의정부교구 김민준 빈첸시오 아 바오로(야당 맑은연못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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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래전 젊은 시절, 마음 맞는 형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뗏목 하나를 만들어 바다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낚싯대도 드리우고, 드러누워 하늘도 올려다보고, 참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시절은 늘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물살이 멈추는 정조 상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썰물이 시작되면서 저희가 탄 뗏목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육지는 점점 까마득해지고 저희는 점점 큰 바다로 흘러가 몇 시간 동안이나 표류를 계속했습니다. 이러다 죽는가보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순간 작은 어선 한 척이 저희를 발견했습니다.
구릿빛 젊은 선장은 우선 저희를 안심시키더군요. “이젠 됐슈. 아무 걱정들 마유.” 그러면서 어선의 꼬리에 저희가 탄 뗏목을 묶어 안전하게 항구에 내려줬습니다. 그 젊은 선장의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멋있던지 마치 예수님을 뵙는 듯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에 강한 맞바람을 만납니다. 하필 날까지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새벽녘까지 노를 저었지만 배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전문직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었지만 탈진한 상태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그 순간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혼비백산해서 비명까지 질러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제자들의 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건네시는 한 말씀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백성들 앞에 확연히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의 초인간적 위대성, 당신의 신적 본질의 신비를 드러내는 현현(顯現)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킵니다.
인간, 근본적으로 유약한 존재입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은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에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더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더이상 근심하지 않기 위해서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선장인 교회란 배에 승선하는 일입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마르 6,5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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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oQW9XW4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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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환경을 다스리는 연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후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에 타서 폭풍우를 가라앉히신 내용입니다. 주님 ‘공현’대축일 다음이 나오는 이러한 복음들은 우리가 이렇게 공적으로 당신을 현시한 주님을 보게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처음에 폭풍우와 물 위를 걷는 존재를 보고는 제자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환경에 지배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리 많은 사람도 배고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부르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과 함께라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 믿음으로 능력의 주님을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충남 예산의 한 17세 처녀가 19세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했지만, 19세의 과부에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며, 이제 더 이상 동정의 말을 듣기 싫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찾기로 결심하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처음엔 힘든 생활을 했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가정부로 들어갔고, 성실히 일하면서 주인에게 신뢰와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라고 물었고, 그녀는 공부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전했습니다. 주인은 그녀의 소원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그녀는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녀는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여자사범대학에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26세에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숙명여고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숙명여자전문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나중에 숙명여자대학교를 창설하여 초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임숙재 총장은 제자들에게 항상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환경을 다스리세요.”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난을 극복하고, 환경을 변화시켜 성공을 이룬 강한 의지의 예입니다. 임숙재 총장이 하고 싶었던 것은 공부와 교회에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분이 함께 계심을 계속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환경 탓하며 핑계 대는 사람은 자신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뵙지 못하게 됩니다. 능력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1996년, 목포의 작은 사업가 조호연은 회사 회식 중 나이트클럽에서 부당하게 청구된 요금을 항의하다 지역 조직폭력배 목포 오거리파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직원들 앞에서 심하게 폭행당하고 굴욕을 겪었지만, 조호연은 오직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나이트클럽 사장을 직접 찾아가 사과를 요청했으나 또다시 폭행과 협박을 받았습니다. 굴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조직폭력배들은 그의 동생까지 공격하며 보복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조호연은 전 재산을 들여 신문에 광고를 내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했습니다. 광고는 폭력배의 만행과 공권력의 무능함을 폭로하며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강력한 조직폭력배 척결 명령을 내렸고, 목포 경찰은 대규모 수사를 통해 관련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조직을 해체했습니다. 이 작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조직폭력배의 몰락을 이끌었습니다.
조호연의 끈질긴 용기와 결단력은 불의를 향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으며, 한 개인의 노력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조호연 씨는 대통령이 자기 편이라고 믿으니 조폭들이라는 환경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조호연 씨가 그렇게 약자인 자신을 보호해주는 대통령을 새롭게 만났듯이,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환경도 바꿔보려 해야 무한한 능력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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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집안에 자녀가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안타깝게도 태어나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유전자의 결함으로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큰 수술을 몇 번씩 해야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이런 의문을 가진다고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아이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의 화목이 깨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분노에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심장 판막 수술해야 했던 아이, 태어나면서 신체의 일부가 없었던 아이, 태어나면서 뇌에 이상이 있었던 아이도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은 치료하고 고칠 수 있지만,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유전적인 결함이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은 아들이 두 명입니다. 한 명은 보통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잘 자라주었고,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다운 증후군’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자매님은 그 아이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달라스 지역에 장애인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임원이 되었고, 장애인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본당 자선 음악회 수익금도 자매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애인 학교에 기부하였습니다. 장애인 학교에는 자매님처럼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부모님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기쁘고, 당당하게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목사님도 열정을 다해서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꿈’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는 겁니다. 정부의 지원과 후원금으로 이 학생들이 언젠가 부모님들이 없어도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 주셨으니, 마땅한 길도 마련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호수 위를 걸을 때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만 두려움에 빠졌고,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우시고, 호수 위를 거르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앞선 사람은 컵에 남은 반 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컵에 남은 반 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컵에 남은 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생각에 따라서 그 물은 걱정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갈증을 풀어주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꽃이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본향으로 가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두려움과 걱정은 나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화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의 몸은 ‘두려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 사나운 동물, 독이 있는 벌레,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식물, 추위, 배고픔, 병, 폭력,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피하고자 인간은 두려움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인간의 지혜와 협력으로 하나둘씩 해결됐습니다. 지금,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걱정, 근심, 불안, 초조’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 차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 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희망, 믿음, 온유함과 친절로 가득 차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건강하지 못해도, 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빵 공장을 세우고, 수상 스키를 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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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45-52: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 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처럼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 모습에서 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않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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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모두 흩으시고는 기도하시러 산에 가십니다. 저녁 무렵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던 제자들은 맞바람을 만나 고생합니다. 실제로 큰바람이 불면 호수에서도 1미터가 넘는 파도가 일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유령이라 착각하고 비명을 지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하고 안심시키시며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풍랑이 멈춥니다. 그렇게 빵의 기적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제자들이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어둠을 헤치고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6-18)라는 확신에 찬 고백을 들려줍니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서로 사랑하자고 합니다. 울리히 샤퍼(U.Schaffer)의 시에 김종성(사도 요한) 신부님이 곡을 붙인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이라는 생활 성가를 소개합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아무도 그대가 준 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 (중략) /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이 모든 것을 당신 앞에 하나 되어 노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들으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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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면 사이비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5-52)
1)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맞바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어떻든 제자들은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권능은 하느님만 가지고 계시는 권능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증언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욥기 9장 8절에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의 등을 밟다.’ 라는 말은 ‘물 위를 걷다.’로 해석됩니다.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일은, 그 법칙을 만드신 조물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표징인데, 그 표징을 제자들만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제자들만을 위해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 보여 주신 것은, 아직 믿음이 부족한 상태인 제자들을 더욱 특별히 교육하기 위한 일로 생각됩니다.
2)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라는 말은, ‘빵의 기적’ 후에 곧바로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의 분위기에 제자들이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기적의 빵을 먹은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아마도 제자들은 그런 분위기에 이미 휩쓸렸거나, 휩쓸릴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이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군중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해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48절에 언급된 ‘맞바람’은, 제자들의 그런 혼란스러운 심정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 혼자 계시고,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상황은, 그런 들뜬 분위기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렸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만 먼저 가게 하신 것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약간의 시련을 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것이고,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48절의 ‘제자들을 보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보셨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장 무기력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세속의 임금이 아닌, 모든 것에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구세주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 쪽으로 가셨다.”라는 말과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라는 말은, 뜻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지나가다.’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탈출 33,22; 1열왕 19,11)>
유령이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해서 제자들이 겁에 질렸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려워했음을 뜻하는데,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탈출기 3장 14절의 “나는 있는 나다.”라는 계시와 같고,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52절의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뒤에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세속적인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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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50)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로써 모든 일을 대해야 삶이 잘 풀립니다. 우리를 소심하고 나약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두려움은 우리의 사랑스런 인간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합니다.
인간의 기본 감정 중 하나인 두려움은 위험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기에 두려운 대상에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우리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모른다면 그것은 두뇌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직면한 문제를 처리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느끼게 됩니다. 일어난 어떤 문제에 대하여 걱정만 되풀이하면, 두려움은 필수적으로 공포로 발전하게 됩니다.
걱정을 해서 얻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실제의 위험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두려움’인 공포증은 우리가 과거에 겪은 경험에 의한 지금의 반응입니다. 공포증을 이겨내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공포증을 직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회피하면, 우리의 신체 기능도 망가져 심장병, 고혈압, 위장장애, 면역장애를 앓게 됩니다.
위험한 것을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두려운 감정을 계속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하여 두려움의 실체를 바라 볼 때, 공포는 사라집니다.
공포증을 직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던 사람이 바다에 대한 공포를 없애려면 파도소리를 다시 듣기로 작정하고, 그 파도소리를 편하게 들을 수 있을 때, 바다는 공포가 아니라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움을 느끼고, 직면하며,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어내고, 연약함을 지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여 사랑할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며 수천번 넘어지는 좌절을 겪으면서도, 아기가 두려움을 잊고 걸음마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사랑만 믿고 바라보며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사랑만을 믿고 바라보며 여정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이기게 됩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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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다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착하게만 살면 되는 것 아니에요?”
미사, 기도, 성경 읽기, 봉사활동… 등등 너무 어렵다면서 그 끝이 없는 것 같아서 포기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포기하면 그것으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모르겠어도 계속 노력할 때, 분명히 변화되는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는 신부가 장염으로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말합니다. 뭐만 먹었다면 바로 화장실 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물만 마셔도 화장실이 자기를 불러서 나중에는 힘이 쫙 빠져서 화장실 갈 힘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화장실에 계속 가게 되니, 물도 마시지 않고 또 음식도 먹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야 할까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이온 음료를 많이 마시고, 죽을 먹으라고 권했답니다. 먹고 싸고를 계속 반복하더라도 계속 먹고 싸는 과정에서 장에 남는 것이 생기면서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남는 것이 자기의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다 나에게 들어오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더 큰 일 납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계속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져나가는 것도 있지만, 자기 안에 쌓이는 것도 많아집니다.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인 구원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얻는 것이 없다고, 또 누구가 미워서 하지 않겠다고 선언도 하지만, 자기 안에 쌓이고 있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시고 기도로 밤을 지새우신 다음, 바람을 멈추시고 물 위를 걸으시어, 노를 젓느라 애쓰는 제자들의 배에 오르십니다. 제자들은 빵을 많게 하신 그분의 기적이 담고 있는 사랑과 권능의 신비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인 줄로 생각하며 비명을 지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탄 배에 함께 오르시어 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을 때, 쉽게 두려움과 불안 속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과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냥 저절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아니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직접 봐야지만? 그 모두가 아닙니다. 계속된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의 신비를 깨닫게 되면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고 기쁘게 지금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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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 위를 걷는 사랑>
마르코 6,45-52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물 위를 걷는 사랑>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르 6,48)
고운 벗들을
집어삼키려
검푸른 입
힘껏 열어젖힌
거센 물살을
거침없이 꾸짖듯
흐트러짐 없이
지르밟고 나가는
애틋한 사랑
나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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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름다운 마무리>
오래전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브라질 국민들은 퇴임하는 그에게 87%의 지지율을 보냈습니다. 세계 각국은 그의 퇴임을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중 브라질을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으로 끌어 올렸고 좌우를 모두 끌어안는 포용의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에 다시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신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선물을 주지 않는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퇴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룰라 대통령의 ‘포용의 정치와 아름다운 퇴장’의 모습이 우리나라에는 언제나 올 것인가?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뒷모습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을 소개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요한 3,29) 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행동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연장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 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 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 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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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를 이중으로 드러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너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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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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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이사9,1; 입당송)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설교가 계속됩니다. 사랑이란 말마디가 어제는 10회, 오늘은 12회 나옵니다. 바로 이 사랑이 가리키는 바, 영원한 참삶의 모범이자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마치 온 누리를 환히 밝히는 태양처럼 온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 사랑의 태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 정답게 들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사랑의 통로이자 하느님의 사랑 자체입니다.
어제 미사중 영성체 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마디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평화”로 들렸습니다. 놀랍고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영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평화가 되어 살 수 있게 되었다니 그대로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전 삶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흡사 예수님이 ‘하느님 사랑의 동사(動詞)’처럼 생각됩니다.
어제의 5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사랑의 기적에 이어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이니 이 또한 사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모두가 사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대중의 인기에 야합하는 허영이나 환상을 지닌 어리석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참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흥분한 군중들은 광신적이 되었고 이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할지도 모르니 참 달콤한 악마의 유혹입니다.
정말 광신이나 맹신에는 처방이 없음은 현시국을 보면 압니다. 잘못된 이념이나 종교에 경도되어 광신적이 되어 눈이 멀때는 상식도 양심도 이성도 마비됨을 봅니다. 참사랑과 함께 가는 분별의 지혜로 위기를 탈출해, 참으로 신속히, 기민하게 군중을 돌려 보내시고 제자들은 재촉하여 기적의 현장을 떠나게 하십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지혜와 일맥상통하는 예수님의 처신입니다. 모두를 떠나 보내신후 즉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홀로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와 친교의 관상기도입니다. 그냥 아버지 안에 머물러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전시키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늘날 믿는 이들에게 정말 절박한 것이 이런 주님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시간입니다.
현대 믿는 이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는 토마스 머튼의 말도 생각납니다. 고독과 연대는 함께 갑니다. 예전 사막교부의 생래적 특징인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도 하느님 사랑 안에, 공동체 중심 안에 깊이 머물려는 관상적 원의 때문이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처럼 믿는 이들의 앞문은 세상에,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어지는 장면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뭍에서의 깊은 관상 기도중에 열린 사랑의 눈으로 호수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런 맞바람으로 위기에 처한 배안의 제자들을 보신 것입니다. 말그대로 세상 속에서 인생항해중 갖가지 사유로 위기에 처한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시야는 멀리까지 활짝 열려 있었고 즉시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처럼 새벽녘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셨고 그냥 그들 곁을 지나가려 하십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인 예수님이었고 제자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우리가 인생항해 여정중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Take 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
바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쓰여져 있습니다. “나다(I AM)”은 바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로 정의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어 선장으로 자리잡자 바람은 멎었고, 제자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 모두 넋을 잃었으니 얼마전의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까닭입니다. 망각의 무지가 얼마나 영성생활에 치명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들의 두려움은 믿음 부족은 물론 사랑 부족에서 연유함을 사도 요한이 잘 밝혀줍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하튼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적 신원을 새삼 깊이 깨달았을 것이고, 이 충격적 체험의 기억은 남은 인생 여정중 제자들을 하느님 사랑에 늘 깨어 살게 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인생 항해 여정중 여러분의 공동체라는 배를 잘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요셉수도 공동체라는 배가 여러 차례 파선의 위기중에도, 1987년3월19일, 개원후 만38년 동안 무사히 세상 바다를 항해할 수 있었음도 순전히 하느님 사랑의 은총임을 깨달으니 바로 제가 그 증인입니다.
“생명(사랑)이 나타나셨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네.”(1요한 1,2; 영성체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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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갈망과 의지와 은총>
오늘의 서간은 하느님 사랑의 완성과 완전한 사랑에 관해 얘기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의 완성도 논하기 어려운데 감히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얘기하다니 솔직히 놀랍기도 하고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시 사랑 박사 요한이 아니라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하느님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완성된다는 말씀인데, 하느님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니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인간으로는 가능치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느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의 서간이 줄곧 얘기하는 것은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그러기에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올까요? 저절로 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끌어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에 관해 오늘 서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와야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 때 온다니 말장난 아닙니까?
비가 오면 맞아야 하고, 햇빛이 비치면 쫴야 하지요.
그런데 비가 싫고 햇빛이 싫으면 그래서 비와 햇빛을 사랑하지 않으면 맞지도 쫴지도 않겠지요.
하느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느님 사랑을 사랑하지 못할지라도 사랑을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현재의 사랑에 안주하지 않고 더 사랑하고 싶어 해야 합니다.
이런 더 사랑하고 싶은 갈망과 더 사랑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에야 원수까지 사랑할 하느님의 사랑이 비로서 오고 은총으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인간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마중물이고, 하느님 사랑이 우리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갈망과 의지와 은총, 이 세 가지가 사랑의 성장과 완성의 근본 요소들임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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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용기를 내게 하는 믿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가 사랑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다른 부부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여 좀 다릅니다.
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제 눈에는 냉골에서 서로 부등켜안고 있는 사랑처럼 보여 늘 안쓰럽고 안타까워 하는 사랑으로 봐 왔는데 이번에는 형제가 암에 걸려 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소식은 제게도 그의 어머니에게처럼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다 역풍을 만나 악전고투합니다. 그러나 역풍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어두움이고 두려움입니다. 어두움이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영성적 의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현재 좌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야 할지 수단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이란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이 알 수 없음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 있을 때 누가 다가오면 구해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해치러 오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유령 또는 악령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왔을 때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놀란 것이 바로 이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믿음의 용기입니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은 분명 계시다는 믿음이요, 계실 뿐 아니라 나를 보고 계실 거라는 믿음이며, 보고만 계시지 않고 나를 구하러 오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인해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던 입이 이제는 용기를 내어 주님이신지 묻고 주님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어두운 밤, 두려움에 쌓일 때는 옆에 강아지만 있어도 덜 두렵지요. 그렇긴 하지만, 오늘 제자들처럼 공동체가 전체로 위험에 처하고 두려움에 쌓일 때, 그때는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이 위안은 되겠지만 큰 힘이 되고, 큰 의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주님은 뭍에 계셨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계셨고,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셨지요.
우리가 오늘 복음을 공현 시기에 읽는 뜻은 주님께서 비록 아니 계시고, 아니 보시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우리의 고통과 애씀을 다 보고 계시다가 적절한 때에 엠마누엘 주님으로서 나타나시리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그러니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기 위함이겠지요.
다시 앞에 얘기한 부부를 하면 지금 이런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제게 지금 이 과정은 마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여정이기도 하고 머리로 이해하고 분석하던 신앙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의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올 한해도 염치없지만 감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린다고 신년 인사를 보내왔는데, 같이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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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완전한 사랑을 믿자!>
오늘 복음(마르6,45-52)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젖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 쪽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ㄷ)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놀라 넋을 잃었는데, 그 이유를 제자들이 빵의 기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당을 다니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의 외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 '완전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표지를 보시고 당신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요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 4,11-18)에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4,18)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죄 중에 있는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오후2시에 마산교구 서품미사(사제품3명. 부제품2명)가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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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맞바람을
이겨내는
지혜가
참된
용기입니다.
맞바람
속에서도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맞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뜻이십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물결을 일으킵니다.
숨겨진 것을
내보이게 되는
우리의
시련입니다.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맞바람의
물결입니다.
출렁이는
물결을 통해
허약한 믿음을
만납니다.
시련 속에서도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용기입니다.
거친 물결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해야 할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참된 용기를
가르치는
주님의
여정입니다.
절실한 기도가
필요한
이 시간을
용기로 건너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겁쟁이의
시간이 아닌
참된
믿음의
시간입니다.
용기와
믿음의
살아있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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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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