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소송 있나’ 문항에 정순신 ‘아니오’… 허위 기재 못잡아내
[인사검증 구멍] 5년전 알려진 ‘학폭’도 못 걸러낸 인사검증
정순신 국수본부장 자진 사퇴… 아들 학폭 보도에도 검증 통과
대통령실 “후보자가 검증 봉쇄, 자녀문제 미흡… 검증 한계 인정”
경찰 수사전담기구인 국가수사본부(국수본) 2대 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57·사진)가 임명 발표 28시간 만에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5년 전 이미 언론에 보도됐던 정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관련 사안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탓인데 이를 두고 “윤석열 정부의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시스템이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 변호사는 지난달 16일 국수본부장 공모가 마감된 후 법무부 중심으로 진행된 인사검증에서 일부 항목을 허위로 기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대통령실이 공개한 ‘공직 예비후보자 사전 질문서’에는 “본인·배우자·직계존비속이 원고나 피고로 관계된 민사·행정소송이 있느냐”는 질문이 포함돼 있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이 질문이 포함된 질문서를 보냈는데 정 변호사가 아들 정모 씨(22)가 저지른 학교폭력 관련 행정소송 사실을 감추고 ‘아니오’라고 답해 몰랐다는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공직 예비후보자 사전 질문서에 기재하도록 명문화했음에도 정 변호사가 이를 우회해 검증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고 했다.
행정소송 판결문을 보면 정 변호사의 아들 정 씨는 2017년 한 명문 사립고에 입학한 후 “돼지 ××”, “빨갱이 ××” 등 상습적 언어폭력을 저질러 피해 학생이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이후 전학 처분이 내려지자 당시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이었던 정 변호사는 불복해 법정대리인으로 대법원까지 행정소송을 진행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해당 내용은 2018년 한 방송에 보도됐다.
대통령실 이도운 대변인은 26일 브리핑에서 “현재 공직자 검증은 공개된 정보, 합법적으로 접근 가능한 정보, 세평 조사를 통해 이뤄지는데 자녀 관련 문제다 보니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밝혔다. 다른 고위 관계자도 “5년 전 보도에 정 변호사 실명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인사 검증에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했다.
24일 국수본부장에 임명됐던 정 변호사는 아들 학교폭력 논란이 다시 보도되자 이튿날인 25일 오후 “국수본부장 지원을 철회한다. 가족 모두 두고두고 반성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김은혜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이후 서면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이 25일 오후 7시 반경 국수본부장 임명을 취소했다”고 했다. 정 변호사는 대장동 재판에서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 씨를 변호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인 정 변호사를 추천하고 검증하는 윤석열 정부 인사 라인에 검찰 출신 인사가 대거 포진해 검증이 부실하게 이뤄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검증 절차 총체적 부실 논란
A4용지 59쪽 사전질문서 토대로
법무부-대통령실이 1, 2차 검증
한달여 동안 아들 학폭 못밝혀
“세평-기사 확인도 안했나”지적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57)가 28시간 만에 낙마한 것을 두고 경찰, 법무부, 대통령실 등 관계부처의 총체적 인사검증 실패를 보여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정 변호사가 질의서 답변을 허위 기재했다는 이유로 5년 전 언론에 보도까지 됐던 의혹이 검증되지 않은 걸 두고선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법무부 1차, 대통령실 2차 검증에도 못 걸러
경찰이 국가수사본부장을 공모하겠다고 밝힌 건 지난달 5일이고, 공모가 마감된 건 지난달 16일이었다. 이후 경찰청 종합심사위원회에서 정 변호사를 단수 후보로 추천할 때까지 약 1개월 동안 경찰과 법무부, 대통령실의 검증이 진행됐다고 한다.
먼저 경찰청은 공모 마감 직후 서류심사위원회를 열고 지원자 3명 모두에 대해 인사 검증을 요청하기로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말 그대로 서류 심사만을 통해 적격성 여부를 살핀 후 인사 검증을 요청한 것”이라고 했다.
경찰청은 서류심사 결과를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실로 보냈고 이후 인사검증 요청을 받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에 1차 검증을 지시해 자료 및 평판 조회 등이 이뤄졌다고 한다.
정 변호사가 허위 기재한 사전 질문서는 이때 사용됐다. 사전 질문서는 A4 용지 59페이지 분량으로 169개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사생활 및 기타’ 항목에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 존비속이 원·피고 등으로 관계된 민사·행정소송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문항이 나온다. ‘예’라고 답할 경우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해야 하는데 정 변호사는 ‘아니오’라고 기재해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2차 검증을 진행했고, 경찰청은 두 차례 검증 결과를 바탕으로 17일 종합심사위원회를 열어 정 변호사를 단수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검증에서 걸러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정 변호사가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아 검증에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자녀에 대해선 학적, 병역기록, 범죄기록 등을 검증하지만 학교생활기록부까지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인사정보관리단에선 경찰 보직 인사라는 점 때문에 경찰보다는 경찰 외부의 세평을 주로 들은 것으로 안다. 경찰도 종합심사 때 자체 세평조사를 실시했는데 관련 내용은 파악되지 않았다”고 했다.
● 5년 전 보도됐음에도 못 걸러
그런데 해당 내용은 이미 2018년 한 방송에서 ‘가해 학생 아버지가 고위직 검사’라는 표현을 포함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권 내부에서도 “본인이 기재하지 않았다고 한 달여 동안의 검증 과정에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들의 법정대리인으로 정 변호사가 행정소송 등을 진행한 만큼 법원의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 ‘정순신’이라고만 넣어도 판결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 변호사가 2020년까지 검찰에 재직한 만큼 검찰 내에서도 일부는 해당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검찰 인사 실무 등을 담당한 검찰 간부는 “당시 보도가 익명 보도였고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아 아는 사람만 알고 인사자료에는 해당 기록이 담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 변호사의 아들 학교폭력 연루 사실이 알려진 이후 즉각 조치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정 변호사가 대법원까지 소송을 진행한 걸 두고도 “실망감이 크다”고 했다.
이번 사태로 검증 과정의 부실이 드러난 만큼 재발 방지를 위한 시스템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경찰 관계자는 “적극적으로 세평을 듣고, 관련 기사를 검색해 봤다면 알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걸러내지 못했다”며 “이대로라면 유사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기윤 기자, 장관석 기자, 유원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