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꽃이 있는 여름 풍경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며 기진한 무리를 예수는 민망히 여기시어, 그들에게 영의 양식인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석가도 무리를 위해 영취산에서 대중 법회를 열었으니, 이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한다. 이때 석가가 깨달음에 이른 그 진리를 말로서는 설명할 수 없어,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拈華示衆), 제자 중에서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의미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拈華微笑)는 진리의 교감을 흔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일컫는다.
왜 하필 연꽃이었을까. 싯다르타 태자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그를 떠받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연꽃이 상서로움을 지닌 대상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거룩한 부처와 그 가르침을 연꽃에 비유했다.
그러나 연꽃은 불교 이전에 인도 대륙에서 오래전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그곳 신화에서는, 비슈누의 배꼽에서 연꽃 줄기가 솟아오르고, 창조주 브라마는 이 연꽃 속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연꽃은 동양에서 종교성을 상징하는 신성한 대상으로 인식되어 와서인지, 우리의 생활과 정서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꽃이다.
우리의 시인들은 연꽃의 아름다움을 즐겨 노래했다. 그중에서 신석정 시인의 〈연꽃이었다〉라는 제목의 시는 한 사람을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에 비유하여,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나절 연잎 위/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떨어지듯“이라고 시작한다. 이는 연꽃이 날 때부터 다른 꽃과 구별이 되듯이 존경스럽고 기품 있는 연꽃 같은 사람을 노래한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시에서,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고 여유로운 이별의 노래를 하고 있다. 연꽃을 만나러 가는 설레는 모습의 바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맛보고 가는, 이미 철 지나간 바람으로 여겨달라는, 능청스러움을 떠올리게 한다.
봄날 두물머리 세미원을 갈 때마다 연꽃군락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여름 무더위가 되어야 볼 수 있는 꽃이므로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런데 어제는 다락방 집사님들과 함께 폭염주의보 발동임에도 강행했다. 세미원 가는 둘레길 옆 넓은 연못에는 푸른 연잎들의 군락이 장관을 이루었다. 더러는 하얀 연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만개하기에는 일조량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세미원 안에 있는 연못에는 백련과 홍련들이 있는 힘을 다해 우아한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산길이나 들판에서 만나는 외롭게 핀 작은 꽃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크고 많은 꽃이 군무를 이루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아름다움은 또 다른 미학의 세계이다. 네덜란드의 쾨켄호프 들판에 끝없이 피어 있는 튤립의 현란한 장관을 보는 듯하였다.
세미원(洗美苑)이란 이름은 출전은 알 수 없으나, 장자의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이란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물을 보면 마음을 깨끗이 씻고,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상징하는 것이 곧, ’물 위에 핀 연꽃‘이다. 그런 까닭에 연꽃이 이곳의 백미여서, 세미원을 즐기려면 한여름에 와 보아야 제격이다.
물 위의 꽃이 시원하고 우아하지만, 땅에서 피는 여름꽃도 아름답다. 그중에서 어제 본 꽃은 능소화이다. 이 여름꽃은 작열하는 태양 빛에 항거라도 하듯, 붉은 색깔을 토해내고 있다. 능소화(凌霄花)의 한자 말인 ‘능소(凌霄)’는 하늘을 능가할 만큼 고원(高遠)하다는 뜻으로, 덩굴 빨판이 있어 어디든 기어올라 기어이 하늘을 보는 꽃이다. 하늘은 임금을 상징한다. 임금을 보고 싶은 어느 궁녀의 슬픈 사연이 이 꽃에 있다고 한다.
옛날 궁궐에 소화라는 예쁜 궁녀가 왕의 총애를 받고 궁궐 한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임금은 그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언제나 임금이 찾아올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쓸쓸하게 죽어 갔다고 한다.
소화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있던 곳의 주변 담장에 진한 주황색 꽃들이 피어났는데 이 꽃이 능소화의 전설이라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움이란 비장한 슬픔에서 연유되는 모양이다.
흔히 전제군주 시대의 임금이 너무 많은 여인을 독점한 것에서 그러한 비극이 시작된다. 부귀와 영화를 한없이 누린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은 후궁이 칠백 명, 첩이 삼백 명이었다고 하니, 1,000분의 1인에 불과한 한 여인에게 돌아오는 성은의 기회란 산술평균으로도 3년에 한 번쯤이 될 것이다. 이 전설에 나오는 소화란 궁녀가 모시던 제왕이 어느 나라 누구인지 몰라도, 그 또한 상당수의 여인을 거느렸을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 오로지 한 임금의 시혜만을 고대하고 살아가는 궁중 여인의 슬픈 순애보는 노예의 노래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를 지으신 창조주의 창조 목적을 거슬리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제군주나 전체주의 체제는 백성이나 국민을 한 사람의 권력자를 위해 봉사하는 노예에 불과한 도구로 만든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이 능소화가 기품이 있는 꽃이라서 조선 시대에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이 꽃을 키우면 크게 혼이 났다고 한다. 오직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어서, 양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에서도 그 당시 차별당했던 민초(民草)들의 생활이 얼마나 견디기가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능소화 앞에 나팔처럼 긴 꽃잎을 늘어뜨리고 너무나 겸손한 모습으로 힘없이 핀 노란 꽃이 있었다. 이 꽃이 ‘천사의 나팔’(Angel’s Trumpet)이라고 지나가는 어떤 노인분이 설명해 주셨다. 이 노인분은 능소화의 사연도 자세하게 소개해 주신 친절한 분이셨다. 흥미로운 것이 이 꽃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꽃잎이 하늘을 향해 ‘악마의 나팔’(Devil’s Trumpet)로 불리는 ‘다투라’ 종이 있고, 땅으로 향해 ‘천사의 나팔’(Angel’s Trumpet)로 불리는 ‘브르만시아’ 종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이 땅을 향해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곡조를 들려주는 모습과, 악마들이 하늘을 대적하여 소리를 내는 극적인 대조의 몸짓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그 꽃들은 우리에게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겸손의 미덕을 가르쳐주었다. 그 연약한 꽃잎은 낮에는 나팔 모양이지만, 밤에는, 등불 모양으로, 나그네들에게 어둠을 밝혀주는 향기로운 길 안내자처럼 보였다. 물과 꽃이 있는 7월 초여름의 폭염(暴炎) 아래에서, 우리의 마음을 씻고 아름답게 가꾸는 ’관수세심(觀水洗心)과 관화미심(觀花美心)‘의 소중한 시간을 가진 것은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