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럴 줄 알았다. 명진이는 어디 깊숙한 곳에 틀어 박혀 휴가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로
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멀리 갔구나. 서귀포라...... 그리고, 역
시 종합 교양인다운 행동이지만 이중섭의 흔적을 둘러보았구나. '종합 교양인'이라는 직함
이 마음에 드시나? 사실 '종합'이라는 말은 췌언으로, 불필요하게 붙여진 군더더기이다.
교양인은 원래 이것저것 여러 가지에 관심을 가져서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폭이 넓다 보니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
지 않는다. 깊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이가 너무 깊으면 도리어 좋지 않다
는 의견도 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인데, 노예라면 몰라도, 자유
민(노예 신분이 아닌 일반 시민)은 너무 깊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진이가 깊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문인, 즉 한 분야만 깊게 파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생각하지 않았는
데, 이러한 그의 생각이 위와 같이 (약간 오바하여) 표현된 것 같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전문인과 교양인은 대가를 기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서도 구별된다. 자유민(즉 교
양인)은 그림을 그리건, 레슬링 대회에 출전하건, 보수를 바라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
라,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종합 교양인 박명진의 글에
리플을 달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구나. 명진이가 글과 사진을 올려 주는 것은 순
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것"이잖아?
그런데,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떠올린 것은 어제 일 때문일 꺼야. 어제 나는 아리스토텔
레스 등등을 거론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기억 못하겠지만, 지지난 겨울에 '전국 국어교사모
임'에 갔다 왔다면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놀랍게도 '우리말 교육 대학원'이
라는 것을 설립하였다. 어제 나는 그곳에 가서 강의를 하였던 것. 강의 제목이 '교육철
학'이었다. 강의 시간이 장장 7시간이나 되었다. 어제 돌아 와서는 너무 피곤해서 곯아 떨
어져 버렸고, 이제서야 이렇게 어제 일을 돌아 본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말 것. 아리
스토텔레스나 교육철학 강의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돈 안 받고는 강의 안
해. 강의 이야기가 아니고 차라리 돈 이야기를 할 참이다. 강사료로 100만원이 되는 돈을
받았거든. 105만원이었나? 107만원이었나?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벌써 받
아서 벌써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매너 좋은 사람들이다. 강의를 하기 무려 한 달 전
에 강사료를 입금시켜 주다니. 그 분들의 좋은 매너 탓에 나는 벌써 빈털털이가 되어버렸
고, 일 끝내고 돌아 올 때도 두둑한 주머니에서 오는 흐믓한 감촉은 즐겨 보지 못했지만 말
이야.
강의 장소는 대전 교외에 있는 목원대학교였다. 방학 중의 지방대학교가 다 그렇지만, 한
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캠퍼스의 정취가 이 공부 모임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말 교육 대학원'에 등록한 수강생 선생님들(국어교사들)은 공부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바
라지 않는 분들이다. '우리말 교육 대학원'은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다. 그 흔한 공식적인 교육대학원을 다닌다면 석사 학위와 그에 따르는 승진 점수를 획
득할텐데, 이 분들은 거의 동일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그러한 보상을 고의로 포기하
고 있는 것이다. 어제가 이번 학기 첫 날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들 표정에는 설
레임이나 잔잔한 흥분 같은 것이 묻어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자부심 같은 것이, 혹은 최소
한 떳떳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분들은 외적 보상 대신에 마음의 떳떳함과
같은 내적 보상, 즉 보상 아닌 보상을 선택한 것이다.
나도 강사료를 사양했어야만 할까? 그렇게 큰 강사료를 받아 본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
었거든...... 그 건은 그렇게 되고 말았고, 내 자랑을 좀 해도 될까? 지지난 겨울 '전국
국어교사모임'에 나갔을 때 교통비조로 강사료를 20만원 받았다. 그 며칠 뒤, 내 강의가 괜
찮았는지, 강의를 더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 왔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요청이 상당히
집요하고 진지하여서, 나는 조건을 달아 수락하였다. 강사료를 절반으로 줄여 주면 얼마든
지 해 주겠다고. 그 쪽에서는 한 참이나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그렇게 하기로 결
정하였고, 그래서 나는 네 번 더 출강하였다. 겨울날,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혜화동
으로 나가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단, 강사료를 받을 때 말이다. 특히 빌어먹
을 가방이 문제인데, 내 손에 매달려 있는 가방이 눈에 들어 올 때면 서글픈 느낌마저 들었
다. "20만원, 가방, 20만원, 가방....." 그러나 보상을 반으로 줄였더니 기분이 크게 달라
졌다. 서글픈 마음도, 위축된 마음도 모두 사라졌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지만) 아리스
토텔레스가 자유민은 교양인으로서, 보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데에는 보다 심오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이유 가운데에는 이러한 것도 들어 있지 않을까?
"일해 주고 그 보상을 받으면서도 위축된 마음이 든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는 친구
들이 있을 것이다. "구걸을 할 때라면 몰라도, 일을 해 주고 그 정당한 대가를 받는데 어째
서 위축된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 친구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 말에 의아해
하는 것이다. 그 생각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면, "정당한 대가를, 내 쪽에서 아예 요구하
는 것, 아니 남보다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해 받아내는 것, 그런 대접을 해 주지 않으면 일해
주지 않는 것, 그런 대접을 해 주지 않는대도 일해 주는 것은 내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 이런 것이 프로 정신이다."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요즈음은 전문인의
시대이다. 그러니 교양인의 정신(아마추어리즘)을 찬양하면서 전문인 정신(프로 정신)을 비
난하여, 전문인 정신은 노예들이나 가질 만한 것인 양 떠들어대는 내 말이 얼마나 시대착오
적으로 들릴지 잘 안다.
프로 정신에 투철한 사람과 아마추어리즘을 간직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여러 면에서 입장
차이를 보일 것이다. 양 쪽은 예컨대 이중섭의 비참한 삶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에서도 차이
를 보일 것이다. 나도 명진이가 올려 준 글과 사진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크게 놀란다는
점에서는 양 쪽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카페 게시글
♡자유토론 이야기방♡
Re:우리말 교육 대학원
조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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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2
06.08.02 08:1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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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흐흐~^^ 말랑거리며 연~한 영태의 글 참 재밌어. '종합'이란 단어에선 대뜸 '불놀이야'를 부른 홍서범을 흔히들'종합 예술인'이라 칭하던 게 생각나더니..."나는 조건을 달아 수락하였다. 강사료를 절반으로 줄여 주면 얼마든지 해 주겠다고..."이 부분에선 감동으로 다가오네. 그리고 그런 행동 한 것에 대해 프로 정신과 아마추어리즘을 비교하여 길게 설명했는데...우리 삶에 정답이 어딨겠어? (순리에 반하지 않은 채) 자기 마음 편하면 되는거 아닌가? 영태 교수께 외람된 말이지만 '배려'에 관한 책 1권 권해도 된다면...김형경의 '사람풍경'이란 책을 추천한다네.난 그 책의 후반부에서 참 느끼고 배운게 많았어. 장문의 리플(?)고마워~
앞으론 명강의 많이 하고 강의료도 듬뿍 받아라~~
7시간 강의료는 15만원/시간당 × 7시간 = 105만원이 맞을 것이고, 강의료는 주는 대로 받고 그 만큼 또는 이상 ≤으로 해주면 좋지 않을지요? 그리고 받은 것은 유익한 곳에 잘 쓰시고요. 자랑스런 조영태교수님 ^_^
노경이 형~ 안녕하세요?
ㅎㅎ 왜 절반이었을까??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하는갑다...
그래 난 명진이가 높은 사람이나 깊은 사람이 아닌 넓은 사람이라서 좋다... 절반의 강사료를 요구하는 친구 영태에게서 내가 말하고자하는 넓이마져 용해되는 느낌...
강의료받아서 뭐햇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