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역사학도도 아니고, 중국어 전공도 아닌데, 그저 불타는 애국심으로 지금 잠 안자고 번역하는 것이라 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아마 이쪽 전문가가 정확한 자료를 만드리라 생각하지만 먼저 제가 대강의 뜻을 번역해 보려 합니다.
고구려는 우리나라(중국)역사서에 칭하기를 고구려,고려라 했는데 기원전37년 출현한 동북지구의 변강(邊疆)민족정권으로 기원668년 당나라에 멸망했다. 7세기를 존속했다.
고구려정권의 귀속에 관해, 비록과거의 우리학술계에 조금의 부정확한면이 있었다, 심지어틀린 관점도 있었고, 그러나 이제 고구려는 고대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학술계의 다수학자의 공통된 인식이 되었다. 주요한 근거는 아래 몇개 방면에 있다.
[第一, 고구려는 우리경계내의 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다. ]
고구려정권은 西漢시기 현도군 고구려縣 경내의 변강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다. 史書와 비석자료기재에 나타난바 고구려정권은 부여의 일 가지로 남하하여 서한 고구려현 경내 기타변강민족과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그후 또 옥저,동예, 소수 貊등 기타 예맥족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漢人, 선비인, 숙신인등의 민족등이 성원으로 가입했다. 이들이 점차 융합하여 고구려민족이 되었다.
고구려정권 민족 구성이 비록 여럿이지만, 이들 민족 모두는 서한시기 활동한 동북변강지구의 민족이다. 더불어 일찌기 周나라 시기의 중앙왕조건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서한시기에 그들의 활동은 서한 현도군에 있었고 서한왕조의 유효한 관할하에 있었다.
고구려정권은 초기 西漢의 구체적관리하에 있었다.
[삼국지.위서.고구려전]에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常从玄菟郡受朝服衣帻,高句骊令主其名籍"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
이것이 설명하는 바는 현도군 총리가 고구려 事務를 했다는 것, 관복을 제공하고 고구려현령이 고구려국의 名簿즉 戶口을 장악 관리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구체적사무를 책임지고 처리했다는 것이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이은후 부단히 병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통일하려 했는데 , 그 이유는 고구려의 활동지역이 이미 前代통치지구였기 때문이다.
비록 고구려 민족기원문제에 관해 위에서 서술한 예맥설,부여설,高夷說, 商人說, 炎帝說 등등 일치하지 않는 여러 관점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민족들 역시 고대중국경내의 민족이며, 결코 고구려민족의 귀속성질이 변할 수 없다.
[第二. 고구려의 활동중심은 몇번의 이동이 있었으나, 결코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
고구려정권 건립후, 그 세력이 발전에 따라, 도성은 여러번 천도를 했다. 纥升骨城、尉那岩城、丸都城、平壤城、长安城은 모두 고구려의 도성이었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요녕성 환인현성 부근의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초기도성으로 본다. 尉那岩城은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패왕조산 산성이다. 환도성은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이며, 평양성,장안성이 곧 지금이 조선평양부근이다.
비록 고구려후기 도성이 지금의 우리나라 강역 밖으로 천도 했지만, 고구려 흥기이전, 西漢은 동북지구에 현도,낙랑,임둔,진번등의 郡을 두었다. 그 관리범위는 지금의 우리나라 동북과 조선반도 북부지구를 포괄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활동중심은 원래 서한사군의 관할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
[第三. 고구려는 계속해서 우리나라(중국)의 역대중앙 왕조에 신하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중국이외로 스스로 독립한 적이 없다. ]
일방면, 국내형세의 영향에 따라 역대왕조의 고구려 관리 방식은 직접에서 간접적인 방식, 간접적인 방식에서 직접적인 방식이 과정을 거쳤다. 兩漢왕조의 고구려 관리방식은 직접적이었다. 삼국,兩晋,남붑조시기 중원은 내란상태여서 고구려세력은 발전했다. 除邻近의 정권 이외에 다수 중국분열정권은 고구려에 대하여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隨唐시기, 중국은 분열을 마치고, 수당시기에 고구려에 대한 간접통치에 불만족으로 느끼고, 서기 668년까지 수나라와 당나라는 노력했다.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의 직접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관리방식은 같지 않지만, 그러나 역대 왕조이 각대 통치자는 모두 고구려의 활동구역이 중국이 고유영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나라 통치자는 고려의 영토는 본국의 고죽국(孤竹國)이다. 주나라때 기자를 봉했고, 한나라때 三郡이 위치했으며, 晋나라 역시 요동을 통치했다. 지금에 이르러 신하로 자처하지 않으니, 외역으로 둘 수 없어 선제께서 통탄스러워 했다. 그래서 그곳을 정벌하려 한지 오래이다" 라고 隨書에 나와있다.
당태종역시 고구려는 옛날 중국이 땅이라 而莫离支(高句丽的官名)贼杀其主,朕将自行经略之라고 했다. "(《新唐书·东夷高骊列传》)등등, 수당 양조는 이와여겼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역량을 고구려를 통일하는데 쏟았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고구려는 중국이외로 독립한 적이 없으며 7세기에 걸쳐 존속하는 동안 매 중국왕조, 삼국,양진,남북조중국이 대분열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각 분열정권은 모두 고구려와 밀접한 군신관계를 유지했다. 당나라 건립후 고구려는 고구려의 지도를 바쳤고 통전.고구려전에 "自东晋、宋至于齐、粱、后魏、后周,其主皆受南北两朝封爵"即言此라고 나와 있다. 이것 역시 고구려가 중국이외로 독립한 적이 없음이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한 후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은 조국통일의 유지를 위해 땀흘리고 공을 세웠다. 역사에 기리 남은 사람들은 천남생(고남생을 말함),고선지,왕모중,王思,이정기 등이 있다.
[第四. 고구려멸망후 주체부분은 漢族중에 융합하였다. ]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은 원래 70여만명이 있었는데, 당나가 고구려를 통일한 후 고구려인이 간 방향은 크게 네부분이 있는데 그 제일이 중원이다. 당태종,고종 兩朝에 근 30만명인 중원으로 피천도 당했고, 이것은 全 고구려인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들의 분포 지역은 지금의 북경,하남,안위,강소,호북,산서,섬서,감숙, 사천 등 많은 성이다. 이들 고구려 인들은 점차 漢족에 융합되어 갔다.
두번째로는 신라(지금의 조선족의 조상이 건립한 정권이다)이다.
신라에 간 고구려인들은 대략 10만명 좌우이다.
세번째로는 말갈(발해)에 갔다. 발해건국후, 고구려의 古地에 거류하던 고구려인들은 발해에 흡수 되었는데 그수가 10만 이상이다.
이부분의 고구려인들은 후에 발해민족의 구성부분이 되었다. 금나라때는 점차 여진족에 융합되었고, 금나라 멸망후 대다수는 漢族에 융합되었다.
네번째로는 흩어져서 우리나라(중국)의 고대 북방 돌궐등 민족에 들어갔다. 그 숫자로는 만명 좌우이다.
그리고 전쟁중 사망한 인원수를 더하면, 고구려의 원래 인구와 대부분 합치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고구려 멸망후 "절대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중화민족중에 융합되었다는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각 논점을 종합하면,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는 것은 역사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며, 고구려의 도성이 한번 지금의 중국 영토 이외로 천도한 것 이외, 작은 부분의 고구려인이 중국 영토이외의 민족에게 융합된 것을 가지고 고구려의 귀속이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