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과서를 통해서 고려가 지금의 반도도 못 미치는 나라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것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역사지도집만 보더라도 통주, 개주, 료 동경 , 황룡부 등등이 지금의 요하에 있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요사지리지와 고려사등 특히 서희와 소배압의 대화 내용을 보면, 료의 동경은 고구려의 고지이자 평양성이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이 고려의 영역인 통주는 요하부근에 있고, 발해의 서경압록부이며, 고구려의 평양이며, 지도에서 개주 또한 요하와 지금의 압록강 사이에 있다. 통주는 황룡부에 속해있다고 했으며 황룡부는 옛 부여의 수도이자 발해 때 부여성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럼 반도 사관에 입각하더라도 당시의 압록은 지금의 요하이어야 한다. 그러한 것을 당시에는 없었던 압록강을 만들어서 지금의 북한 평안북도에다 끼워놓은 것이다.
어쨌든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시기의 압록강은 료하遼河이거나 료하의 지류인 것이 당연하다. 고로 반도사관에 입각했을 지라도 고려의 영역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본 고구려의 최대 영역과 대강 일치하며, 발해 고구려는 더욱더 북쪽에 있었던 것이 되어 앞뒤가 맞지가 않는다. 그러면 원래의 고려의 강동이 어디인지 알아보자
<자료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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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節要 卷之三
顯宗元文大王
[庚戌元年 宋 大中祥符三年,契丹 統和二十八年]
경술 원년(1010), 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1)
○五月,流尙書左司郞中河拱辰,和州防禦郞中柳宗于遠島,先是,拱辰,嘗從事東西兩界,擅發兵,入東女眞部落,見敗,柳宗聞之,深怨女眞,會,女眞九十五人來朝,至和州館,宗盡殺之,故皆流之,女眞,亦訴于契丹,契丹主,謂群臣曰,高麗康兆,弑君誦而立詢,大逆也,宜發兵問罪。
○秋七月契丹,遣給事中梁炳大,將軍耶律允,來,問前王之故。
○ 5월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었다. 이보다 먼저 공신이 일찍이 동서 양계(東西兩界)에 종사하였는데,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동여진(東女眞)의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니,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여진을 깊이 원망하였다. 때마침 여진 사람 95명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려고 화주관(和州館)에 이르니 유종이 이를 다 죽였다. 그 때문에 이들을 모두 귀양보내었다. 여진이 또한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康兆)가 임금 송(誦)을 시해하고 순(詢)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대역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어야 하겠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大將軍) 야율윤(耶律允)을 보내와서 전왕(목종(穆宗))에 대한 일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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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의 내용은 고려사 현종 1년의 강조의 난에 관한 내용이다. 강조가 난을 일으키자 거란이 군대를 일으키는 내용이며, 고려의 양계 밖에 여진麗震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犠令張顥,嬰城固守。
○壬辰,崔士威等,分軍出龜州北,恧頓,湯井,曙星,三道,與契丹戰,敗績。
○契丹主獲通州城外收禾男女,各賜錦衣,授紙封一箭,以兵三百餘人,送興化鎭諭降,
○ 신묘일에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 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 임진일에 최사위 등이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평북 귀성군(龜城郡)) 북쪽 뉴돈(恧頓)ㆍ탕정(湯井)ㆍ서성(曙星)의 세 길로 나가서 거란과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 거란주가 통주성 밖에서 벼를 거두던 남녀를 잡아서 각기 비단옷을 주고 종이로 봉한 화살 하나씩을 주며,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압령하여 홍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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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란契丹이 강조의 난을 구실삼아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공하는 장면인데, 여기에 의주,통주, 귀주, 흥화진의 지명이 나온다. 이 세지역은 압록강 동쪽에 있는 지명이며, 동시에 요하 동쪽에 있다. (고려 압록= 료하)
일전에 필자는 연운燕雲지역이 아프카니스탄 극동과 그 이북지역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탈라스가 탁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지리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본다면 고려의 압록은 시르다르여 상 중류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근처가 나중의 元의 대도大都와 연경燕京지역에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과 료의 동경은 시르다르여 유역에 있어야 하고 강동이라 함은 시르다르여 동쪽을 말함이다. 굳이 료의 동경을 추정하자면, 키르키스탄의 수도 Bishkek 나 카자흐의 구도Almaty쯤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강동육주 또한 그곳에 가까운 곳이어야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모르겠으나 대략 지금의 나린강 이동에서 신강성 파미르 이북 천산 북로 쯤이 아닐까 싶다.
3)
○甲戌,王,次楊州,河拱辰,奏曰,契丹,本以討賊爲名,今已得康兆,若遣使請和,彼必班師,王,筮得吉卦,遂遣拱辰,及高英起,奉表狀,往丹營,行至昌化縣,以表狀,授郞將張旻別將丁悅,先往軍前,告曰,國王,固願來覲,第懼兵威,又因內難,出避江南,差遣陪臣拱辰等,陳告事由,拱辰等,亦惶懼,不敢前來,請速收兵,旻等,未至,丹兵先鋒,已至昌化,拱辰等,具陳前意,丹兵,問國王安在,答曰,今向江南,不知所在,又問遠近,答曰,江南太遠,不知幾萬里,追兵乃還。
○ 갑술일에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니 하공진이 아뢰기를, “거란이 본디 역적(강조(康兆))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아갔으니,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점을 쳐서 길한 괘를 얻으니 드디어 공진과 고영기(高英起)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창화현에 이르러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어 먼저 군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국왕이 와서 뵙기를 진실로 원하나 다만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또 내란으로 인하여 강(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배신(陪臣) 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공진 등이 또한 두려워서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빨리 군사를 거두소서." 하였다. 장민 등이 다다르기 전에 거란 군사의 선봉이 벌써 창화현에 이르렀다. 공진 등이 앞의 뜻을 자세히 진술하니 거란 군사가 묻기를, “국왕 은 어디 있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지금 강 남쪽을 향하여 가셨으니 계신 곳을 알 수 없다." 하였다. 또 길이 먼가 가까운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강 남쪽이 너무 멀어서 몇 만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니, 뒤쫓던 거란의 군사가 그제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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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란이 고려를 치다가 실패하고 강조만 잡자 내세울 명분이 없어 군대를 회군하는 장면인데 , 고려왕이 강남 즉 임진강 남쪽으로 피난해서 직접 나가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이 임진강이 어디길래 그 강의 남쪽에 있는 고려왕이 있는 곳이 몇 만리나 된다는 말인가... ..그 임진강은 호로하로도 불리며, 칠중하이기도 한데 최두환 교수께서 위치를 잘 밝혀 놓으셨다. 그 위치는 현재 신강성 맨 서쪽 탑리목하塔里木河의 지류이자 아합기阿合奇,오십烏什을 경유해 흐르는 탁십간하托什干河이다. 현종은 이 임진강 남쪽으로 갔기 때문에 고려의 사자가 그 길이 몇 만리이라 되는지 알 수 가 없다고 했는데, 이유는 고려의 강역이 현 중국대륙과 카자흐 키르키스탄의 요동지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천산과 곤륜산이 막고 있는 천해의 요새이고 왕을 찾으러 가려면 너무 멀으므로 글란의 군대가 회군한 것이다. 고려가 반도에 있다면, 현종이 잡히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이며 고려는 쑥대 밭이 되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고려를 옛 적에 만리의 대국이라 한 것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