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사계 / 고태현
꽃샘추위가 매섭다. 정원의 흰새덕이 나무에서 피어나는 뽀송뽀송한 꽃들과 먼나무의 앙증스러운 열매들이 유난히 붉게 빛난다. 냉랭한 하늬바람의 심술 속에서도 나무들은 뿌리에 힘을 모아 생명의 기운을 빨아올리고 있다.
가지에서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이제 우듬지에서 백목련, 자목련이 꽃눈을 틔우기 시작하면, 이어서 핏빛보다 더 붉은 영산홍과 진달래, 철쭉의 화신은 생명의 숨결들을 앞세우며 북으로 산으로 달려갈 것이다.
내 일터의 정원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조화롭게 자라고 있다. 돌하르방이 서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와싱토니아, 카나리엔시스, 당종려 등 큰 야자수들이 군락을 이루며 서있고, 서귀포 천지연 깊은 계곡에서 귀양 온 듯한 풍채가 넉넉한 담팔수가 눈에 들어온다. 남국의 완상玩賞거리로도 부족함이 없는 구상나무, 노가리나무, 구실잣밤나무, 왕벗나무, 굴거리, 비자목, 배롱나무, 병꽃나무, 주목, 생달나무 등이 즐비하다. 특히 조록나무는 목질이 단단하고 바위틈에서만 자라는데, 그 뿌리는 질박하면서도 오묘한 조형미를 보노라면 죽어서도 죽지않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정원의 넉넉한 그늘이 되어주는 붉가시나무, 낙우송, 느티나무 등의 풍채도 풍채지만, 분재처럼 멋을 부린 육송, 반송, 해송(곰솔)의 자태 또한 더없이 고아高雅하다. 그외에도 전나무, 주목, 측백, 팥배나무, 호랑가시나무 등이 정원을 풍요롭게 한다.
지금 색색의 동백꽃들이 피고 지는데, 그 중 제주 토종 동백은 꽃이 작고 곱다. 동백의 낙화는 처연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활짝 핀 고운 자태에서 꽃잎 하나 이즈러짐없이 단아한 자태 그대로 목을 꺾듯이 떨어지는 모습은 형장의 이슬로 순교하는 열사를 닮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소철이 진노랑 속을 뿜어내고, 후박나무에도 봉우리가 맺힌다. 6,7월쯤이면 담팔수에도 작고 흰 꽃이 잎겨드랑이에 달리고, 핵과는 녹색과 진한 자주빛, 흑청색으로 바뀌면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할 것이다. 장미꽃이 만발할 즈음이면, 토종 감나무에 팥감이 달리고, 초여름까지 금귤을 매달고 있던 귤나무에서는 또 다른 생명체가 잉태된다. 곧이어 가이스카향나무, 후피향나무, 비파나무, 치자꽃의 향기 속에서 계절은 여물어 갈 것이다. 가을이 당도하면 각종 꽃과 열매와 형형색색의 단풍이 어우러지는데, 홍단풍, 단풍, 은행나무 등이 색감을 주도하면서 몸무게를 줄일 차비를 한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맨 몸으로 수행자의 포즈를 취한다. 낙엽은 시려올 대지의 가슴을 덮어주며 뿌리마다 물기를 머금게 하여 새 봄엔 생명의 기운이 되어줄 것이다.
봄의 신선함과 꽃의 난만爛滿, 여름의 풍요, 가을의 갈색 음률과 내음, 겨울의 고즈넉함, 정원의 사계가 주는 질감은 음전한 멋스러움이 있다. 커다란 괴석을 감싸안은 넝쿨들, 벤치들 사이사이에 서있는 조명등과 울타리를 싸고 돌아간 가로등까지도 정원의 밤풍경에 어울린다.
매일 점심 후 정원에서 새소리를 경청하며 나무들과 보내는 시간은 귀하고 즐겁다. 시나브로 세월은 흘러 나에게 이 정원을 즐길 시간이 얼마나 허락된 것인지 궁금하다.
새싹 하나에도 신의 정치精緻한 숨결이 숨어있다. 그 생명은 거대한 신의 설계도 속에서 우주와 생명의 그물로 엮여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변화의 섭리 속에 삼라만상을 쓰다듬는 자비로운 손길의 흔적을 본다.
꽃샘 추위 속에서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바람이 셀수록 나무는 뿌리를 더 깊이 뻗어내려 가지와 잎을 지켜내고, 그 힘으로 여름과 가을의 태풍이나 무서리도 견디어낸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삶의 변곡점마다 고여 있는 부끄러운 마음을 만나곤 한다. 내 안의 욕망과 집착, 무지와 편견이 내 마음을 흔들고 나면, 인내와 순리의 길을 벗어나 있곤 했다. 나무의 의미와 겸손, 우직과 조화의 삶을 닮고 싶다. 고통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면서,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다. 떠남의 허망함을 극복하고 또 다른 차원의 만남을 준비하는 지혜를 낙엽에게서 배웠으면 한다. 나에게도 찾아올 겨울을 위해 남은 나날들을 절실하고 가꾸어 가고 싶다.
정원에 서서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계절이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내 속의 내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사그라져 가는 젊음의 자리에 눈물 자국이 선명해져가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