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8
1월9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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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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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pfgDYwY0Gw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임영준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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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시다.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꾸준히 희망합시다!🙏🏻
바야흐로 2025년, 정기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희년을 공식 선포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올 한해 우리 모두가 ‘희망의 순례자들’로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이기에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표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올 한 해 희망이 없어 보여도 희망하며,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는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희년의 주체이자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당신과 함께 하는 매일 매순간이 희년임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희년을 시작하는 우리를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초대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순례자는 단지 걷는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지닌 사람, 그중에서도 확실한 목적지를 지닌 사람이어야 하고, 성스러운 목적지를 지니고 있을 때라야 순례에 힘이 붙고 피곤한 여정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희년이 시작되면 몇 가지 관련 행사가 뒤따릅니다. 전대사의 은혜 부여, 그에 따른 성지나 성당 순례...그중에 첫 번째 이루어지는 행사는 성전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작년 성탄 전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활짝 여시면서 희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에 대한 광주대교구 김정용 베드로 신부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희년이 시작될 때 성문을 여는 상징 행위는 교회가 우리의 소유나 배타적인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있는 아버지의 집,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누구나 흔쾌히 환대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소요 표지여야 한다. 그러니 그 누구도 교회의 소유자인 양 행세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손님,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부비고 살며,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의 연대 공동체인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계속해서 오랜만에 맞이한 너무나 은혜로운 이 희년을 영원한 순례자인 우리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명쾌하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희망의 순례는 그저 자기만족이나 유희만을 위한 휴가나 수박 곁핥기식의 여행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성지나 성당을 방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희망의 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나서는 여정이다.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다. 인간이 둘러쳐 놓은 모든 장벽, 모든 경계, 곧 모든 형태의 차별과 혐오의 문화, 배타성과 불평등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순례는 그저 고행이 아니다. 마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설레고 신나는 여정이다.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만나는 행복한 여정이다. 예수님의 순례가 그러하였다.”(김정용, 희망의 순례자들, 바오로딸)
가치나 의미, 뚜렷한 목표의식이 부여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희망하는 것, 이 세상 것만을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희망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결국 만사를 선으로 이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심을 굳게 믿으며, 또다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기쁨 충만한 희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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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uIPyC5F3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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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람들이 하는 큰 실수 중에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해석은 벌써 그 안에 ‘의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말씀을 하시는 분보다 높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의대생들은 시체를 해부합니다. 이것이 해석과 같습니다. 해석은 자녀가 부모의 말에 하는 행동이 아닌 부모가 자녀의 말에 대해 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예화로, 부자가 두 아들에게 황무지 땅을 반으로 나누어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부자는 그 땅에 보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열심히 황무지를 팠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여겨 포기하고 폐인이 되었고, 한 아들은 이렇게 된 이상 농사나 지어보자고 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행복의 길입니다. 그 말씀을 따르면 무조건 행복해집니다. 불행해지라고 자녀를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말씀은 순종하기만 하면 행복해집니다. 만약 교만해져서 해석하려고 하면 자기 뜻대로 말씀을 조작하여 결국엔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불행에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당신께서 성취해야 하시는 ‘예언’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펴서 읽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누구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엿듣습니다. 당시 유럽에 기근이 들 때 정말 아이들을 버리는 부모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헨젤과 그레텔을 데리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헨젤은 미리 준비한 흰 조약돌로 길을 표시하여 그레텔과 함께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더욱 분노하며 아이들을 다시 버리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헨젤이 빵 부스러기로 길을 표시하지만, 새들이 그것을 모두 먹어버려 길을 잃고 맙니다.
길을 잃고 헤매던 헨젤과 그레텔은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발견합니다. 배고픈 아이들은 집을 먹기 시작하지만, 사실 이 집은 마녀의 집이었고, 마녀는 헨젤을 살찌워 먹기 위해 가두고, 그레텔을 하녀로 부립니다.
아이들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 마녀를 속이고, 그레텔은 마녀를 오븐에 밀어 넣어 탈출합니다.
아이들은 마녀의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 가족이 굶주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됩니다. 집에 돌아오니 계모는 이미 사라졌고,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며 기뻐합니다.
이 동화에서 아무래도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의 상징은 마녀입니다. 마녀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하나하나 해석하여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해석해야 하는 말을 하는 대상은 결국 우리가 이겨야 살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동화에서는 처음에 어머니였다가 차차 계모로 바뀝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절대 참 창조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예언으로 받아들여 나에게서 성취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창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록펠러는 부자 크리스천이었지만, 수전노였습니다. 병이 들어 가난한 여자 아이의 치료비를 대 주고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해석하지 않고 하나의 예언으로 자기에게서 실현시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지겠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결과는 엄청난 물고기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을 죽여야 하는 대상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의심이 생긴다면, 그래서 돌 주머니를 차거나 빵 부스러기를 버려야 한다면, 그 엄마는 마녀처럼 불에 처넣어야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반면 베드로처럼 말씀에 무조건 순종한다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창조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방황하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만나지 못한 하느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순종할 용기를 내어봅시다.
말씀은 무엇이건 나에게서 성취될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예언이 성취될 때 자신을 보내신 분을
진정으로 만납니다. 성경은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성취되도록 순종해야 할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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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합니다.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윤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세속오계, 삼강오륜은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를 토대로 법칙을 만들고, 법칙을 찾아냅니다. 과거로부터 현재 상황을 유추하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곳이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기존 과학의 법칙과 방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은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 중인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드러나신 사건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현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며 살아갈 때,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공현은,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예수님께 경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의미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매일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빛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빛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작은 마을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매년 겨울이면 마을의 빈곤층과 고아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나누고, 옷을 준비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소년이 눈 속에서 헤매다 노부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로 몸을 떨고 있었고, 노부부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소년은 그들의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마을의 작은 교회가 화재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놀랍게도 그 소년이 훌륭한 사업가로 변모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는 노부부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교회와 마을을 돕기 위해 큰 기부를 했습니다. 노부부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를 통해 더 큰 빛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출 때,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공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매일 일어납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때, 직장에서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일할 때, 이웃에게 친절과 나눔을 베풀 때, 우리는 그분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현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과 세상에 비추기 위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 작은 행동으로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기회를 찾아보십시오. 가정에서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이해로, 직장에서는 정직한 태도와 배려로, 이웃에게는 나눔과 친절로 주님의 공현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작은 빛이 모여 세상을 밝히듯, 우리의 작은 실천이 모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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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14-22: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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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밝히신 당신 공생활의 출사표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어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눈길이 당신께 향하고 있을 때 짧은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 당신 사랑의 행보와 더불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실현되고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은 저마다 사정은 다를지라도 모두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체념과 포기 한편에 또 그만큼의 간절함을 품고 살아왔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감격과 위안을 느꼈을지 짐작이 갑니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에 미사를 갑니다. 그때마다 열 분 조금 넘게 미사에 오십니다. 귀가 어두운 분들이 많아 제가 목소리를 높여 경문을 읽으면 그분들도 큰 소리로 우렁차게 화답해 주십니다. 치매 어르신들이 많은데도 기도문은 참 잘 외우십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또 힘을 내어 서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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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자유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14-22ㄱ)
1) 여기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선언이기도 하고, “메시아 시대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려면 ‘지금’ 나를 믿고 나의 복음을 받아들여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과 해방과 자유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옛날의 일도, 미래의 일도 아니고, ‘지금’의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중에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또 “나도 전에는 신앙생활을 했었다.” 같은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메시아 시대, 또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어서, ‘지금’ 진행 중이고, 종말의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메시아 시대의 복을 얻어 누리는 생활인데, 아직은 미완성 상태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하면, 한 만큼 이익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처음부터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2) 예수님의 선포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해방’입니다. <‘기쁜 소식’은 ‘해방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자유인’입니다.
3) 권력이나 재물 같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박하는 것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이고,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는 그 자체로 악이고, 죄입니다.
독재 권력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않고, 그 권력을 가지고 있겠다고 끝까지 고집 부리는 것은 정면으로 하느님께 반항하는 사탄의 죄입니다.
4)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면, 우선 먼저 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해방의 열쇠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 열쇠가 바로 ‘용서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열쇠를 받아서 스스로 감방 문을 열고 나가는 일인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참 자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여기서 ‘진리’는 무슨 ‘학문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는 “너희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 너희는 하느님 나라의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입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는 “죄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자녀’ 자격을 회복한 사람은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입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5) ‘죄의 종’이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2-25ㄱ)
인간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 도움을 잘 받으려면,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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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1요한 5,3)이고, "그분의 계명은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1요한 4,21)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어렵거나 버겁지 않습니다.(1요한 5,3) 왜냐하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4)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학 개론"을 전해줍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기승전'애'(起承轉愛)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사랑이고, 우리의 믿음도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참으로 맞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선되지 않았던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줄도,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가여운 존재로 남았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나자렛 회당에서 독서를 하시고 강론을 시작하시는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는 침묵중에 그분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사야가 전해 준 메시아의 소명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소명이 바로 예수님의 소명이고,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루카 4,18-19)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행업을 계속하는 것이 메시아의 소명이고 예수님의 소명이며,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소명입니다.
이 사랑의 소명은 언뜻 세상의 탐욕 앞에 패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승리자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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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이 자리, 이 시간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메시아가 어디 있는지, 은혜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복음을 읽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주어지는 이들을 되짚어 봅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잡혀갔는가? 나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억압받는가?’
우리가 외면한 이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은총을 진하고 강하게 체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준다면, 참 고맙겠지요.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은총은, 삶이 무너진 이들이 받아 누리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잘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허전하고 외로워지지 않습니까? 외롭지 않다며 으스대는 가식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서로의 손을 잡아 줄 줄 아는 따뜻함이 구원입니다. 루카 복음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갑니다.
그 길에는 가난한 이, 다리저는 이, 눈먼 이들이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위로 받고자 합니까, 위로 받기를 부끄러워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참된 은총을 받고자 합니까, 누군가에게서 저만을 위한 거짓 은총을 얻고자 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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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 (중략)...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우리는 너무 많은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삶의 본질보다 하찮은 일에 마음을 더 많이 빼앗기며 삽니다. 하찮은 일에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아닌 다른 헛된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자주 갈라집니다. 갈라진 마음으로 우리가 사는 것은 유혹에 약한 우리가 마음 둘 곳 한 곳을 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성을 받아들이는 겸손보다, 완전하게 되려는 지나친 욕망이 우리 마음을 갈라지게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어 굳게 닫아 놓고 삽니다. 굳은 마음으로 방어적인 태도로 사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입은 상처가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깊고 고통스러운 만큼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삽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차가운 얼음 인간처럼 냉혹하게 삽니다. 우리가 냉혹하게 되는 것은 때어나 함께 사는 사람들과 세상에게 경험한 배신과 버려짐 그리고 무관심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수용되어야 할 존재지만 사람들과 세상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이 오늘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흩어진 우리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갈라진 마음을 일치로, 굳은 마음을 치유와 부드러움으로, 냉혹한 마음을 따뜻함으로 채워 주시는 주님의 영이 오늘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2025년 희년(禧年)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성탄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25년마다 돌아오는 이 거룩한 희년에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 특별한 은혜, 주님의 영을 받도록 청동문을 열어 주셨읍니다.
갈라지고 흩어지고 고통과 상처로 인해 냉혹하게 된 우리에게 2025년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로 오늘 선포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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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38년 하버드 외과 대학 연구팀은 하버드대 남학생들을 모집한 뒤 평생에 걸쳐 그들의 삶을 추적 관찰했습니다. 일명 ‘하버드 그랜트 연구’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구학적으로 볼 때 일반화가 가능한 결과를 도출하기에 대상 범위가 너무 좁은 것으로 판단되어, 보스턴 빈민가 젊은이들도 포함해서 평생에 걸쳐 그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일명 ‘글루에크 연구’입니다.
이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행복을 주제로 최장기간 진행된 연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행복한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가 밝혀졌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 것입니다. 금연, 금주, 체중, 운동, 순응적 대처방식, 교육, 인간관계. 이렇게 7가지 목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뽑는다면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
행복하고 건강한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은 건강한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래서 50세에 인간관계에서 가장 만족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종 인간관계를 끊으려는 분들을 만납니다. 인간관계를 끊으면 순간적인 만족은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편하고 홀가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가장 큰 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말이 떠올려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셔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구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기 위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앞서 ‘행복한 삶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아니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면 누가 손해일까요? 결국 자기 손해로만 다가옵니다.
동반자적 사랑의 관계가 주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또 자기 편한 것만 따지면서 그 관계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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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루카 4,14-22ㄱ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아파하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아파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나으리니
슬퍼하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슬퍼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기뻐하리니
울부짖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울부짖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환호하리니
굶주리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굶주립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배부르리니
쓰러지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쓰러집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일어나리니
짓밟히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짓밟힙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떨치리니
갇히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갇힙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헤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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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출세와 돈을 우선시하는 교육과 사회 분위기가 청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흥사단 투명사회 운동본부에서 수도권, 충청권 초중고생 1만1천명을 대상으로 윤리의식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이17(12)%, 중학생은 39(28)%, 고등학생은 56(44)%(괄호 안은 2014년)로 나타났습니다.
남의 물건은 주워서 내가 가진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은 36%, 중학생은 51%, 고등학생은 62%랍니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응답은 초등학생 19%, 중학생 30% 고등학생 45%로 나타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해가 갈수록 윤리의식이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장할수록 올바른 인성을 지니고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우리가 삶의 모범과 표양이 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며 성령의 비추임을 청합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 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 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 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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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 “주님과 일치의 여정” -
주님과 일치의 여정중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한결같은 분들을 보면 힘이 납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제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런 분들이 평범한 듯 하나 비범한 성인입니다. 오늘 역시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역시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27년째 치과 치료를 해주는 형제에게 어제 진료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 분이 세상 속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분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과 편안히 기다리는 환자들, 흡사 가정 같은 따뜻한 병원 분위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분위기 자체가 세상 속의 오아시스처럼 힐링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치과 형제로부터 작년 나눔에 큰 기여를 했던 “다산 어른의 하루”라는 2025년 365일 어록을 선물받았다는 것니다.
“위학일익(爲學日益;배움이란 매일 채워도 끝이 없다)이란 1월 말씀이 너무 멋집니다. 이 말씀은 제가 평소 절감하는 진리입니다. 이래서 진정 구도자들은 배움의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배움을 사랑하는 배움의 여정에 항구한 분들입니다.
“도리를 지키고 사명을 충실히 했을 때, 하늘의 도움을 구할 자격이 생긴다.”<다산>
“군자는 평이한 곳에 머물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요행을 바라고 위험한 짓을 한다.”<중용>
옛 어른들의 이런 지혜도 영적승리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영적승리의 삶의 원조이자 불멸의 모범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천하무적에 백전백승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제가 평범한 일상에서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다음 두 말씀이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의 사도들이, 교회 안의 무수한 성인들이 영적승리의 증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적승리의 원조,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에 앞선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도 같고 불교 선사(禪師)들의 오도송(悟道頌)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기전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기쁜소식이자 영적승리의 삶의 예견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서 자신의 사명을 확인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도대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세상 죄악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자 동시의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를 무지와 허무로부터 해방시켜 예수님처럼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며 참 자유인이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가 되어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참 통쾌한 예수님의 출사표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할 분은 주님의 진짜 종,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또 하나의 예수로 세상에 파견하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인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요 오늘 살아내야할 말씀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한 당시의 사람들의 심정에 저절로 공감이 갑니다. 참으로 우리 역시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입에서도 은총의 말씀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좌고우면할 것 없이 직진하면 됩니다. 예수님께 이겨놓은 싸움을 싸우는 우리들입니다. 이미 영적승리를 내다보며 하루하루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영적승리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산책 때 마다 일부 가사를 바꿔 부르는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는 늘 불러도 늘 좋은 제 애창곡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3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34세 늦깍기로 입회하여 이제 77세, 그래도 ‘영원한 현역’의 빛나는 청춘입니다. ‘바다’와 ‘아침이슬’과 더불어 세 애창곡을 부르며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서 영적전의를 새롭게 합니다. 주님의 전사에 그대로 적용되는 다음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의 매력적인 말씀에 더욱 공감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주님의 애제자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의 빛나는 모범 사도 요한이 우리 모두를 격려 고무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요, 모두 세상을 이기는 영적승리의 주님의 사랑의 전사들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이기며, 세상의 이긴 그 승리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사랑의 승리는 그대로 믿음의 승리로 직결됩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투의 현장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투는 계속될 것입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조언이 다시 생각납니다.
“날마다의 싸움들중에, 시선을 그리스도께 둡시다.”
(Amid daily struggles, keep eyes on Christ)
이래야 영적승리의 원조이자 빛나는 모범인 주님과 일치의 여정중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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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사랑 고수들의 사랑>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성서 말씀이기에 맞는 말이겠지만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러므로 서간의 이 말씀이 맞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기에 사랑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기에 보이는 형제보다 사랑하기 쉽기도 합니다. 특히 사랑하고는 싶은데 눈에 형제들이 다 꼴 보기 싫은 경우 더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기에 누군가 내 사랑의 대상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사랑해보고 저 사람도 사랑해보고 하는데 하는 사랑마다 실패하고 그래서 사랑의 쓴맛을 너무도 많이 체험하여, 이제 인간 사랑은 진절머리가 나 포기하고 꿩 대신 닭이랄까 닭 대신 꿩이랄까 보이지만 꼴 보기 싫은 인간 대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꼴 보기 인간도 싫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도 싫은 사람은 꿩 대신 닭 격으로 반려동물을 자기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느님 사랑에서 참사랑을 배운 사랑 고수들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보이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표지이자 공현이듯 보이는 인간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표지이자 공현으로서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라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을 형제로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참사랑을 배운 우리는 보이는 사랑에 머물거나 보이는 사랑은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이 사랑에서 저 사랑을 보고 저 사랑에서 이 사랑을 보는 사랑 고수들이 돼야겠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실버 성가대를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선 첫 모임을 갖고 어떻게 연습할 것인지 정하려고 합니다. 1월 19일(일) 11시 주일 미사 봉헌하고 연습 날짜와 방식을 정하겠습니다. 모임 장소는 여기 밥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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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늦게 사랑해도 괜찮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늦게 사랑해도 괜찮다. 오늘 요한의 편지를 읽으면서 탁 떠오른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그래서 하느님을 늦게야 사랑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늦게라도 사랑치 않는 것이요 끝내 사랑치 않거나 사랑이 점점 쪼그라드는 것일 겁니다.
아오스딩 성인도 고백록에서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또 늦게 사랑하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참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사랑을 참사랑인 줄 알고 방황했다면 먼저 그것을 아오스딩 성인처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그러므로 방황의 끝에 늦게라도 그 사랑을 발견하면 됩니다. 이에 대해 아오스딩 성인은 이렇게 계속 얘기합니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 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사랑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사랑을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똑같이 사랑하되 우리가 갈망하고 만족하는 사랑은 다릅니다. 만족은 하느님 사랑으로만 하고, 이웃의 사랑에서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사랑에서 만족을 구하려다 불만을 경험한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사랑에서 만족을 구하지 않게 된 사람도 있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인간의 사랑에서 더 이상을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된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더 완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느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는 말씀처럼 이웃 사랑이 힘들지 않기에 지치지 않고 사랑하고 완전한 사랑을 합니다.
그러니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먼저 충만해지고 그런 다음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순서를 어기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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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희년의 삶!>
오늘 복음(루카 4,14-22)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레위기 25장 8-13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반복하여 49년이 지난 그다음 해인 '50년째 해'입니다.
'희년의 본질'은 이사야 예언서 61장 1-2절의 말씀인 오늘 말씀(루카 4,18-19)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기쁨과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희년이 돌아오면 땅도 쉬고, 빚도 탕감해 주고, 노예도 해방시켜 내보냈습니다.
이 '희년 선포'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분명한 목적과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희년의 삶'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삶인 부활의 삶'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희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이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을 희년의 해(2024.12.24~2026.1.6)'로 선포하셨습니다.
각 교구마다 지정된 성지와 성당을 순례하고, 내가 먼저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합시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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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인간의 말과
인간의
뼈 사이에
주님의 말씀이
있다.
말씀과
기쁜소식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
말씀에
한없이 아프고
말씀에 한없이
기쁜 우리들이다.
말씀이
우리를 업고
걸어가신다.
주님 말씀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할
말씀이다.
듣는 법을
먼저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들어야
담을 수 있고
들어야
이룰 수 있다.
주님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닮아간다.
공현은
우리의
경청으로
신앙고백이
된다.
말씀은
경청의
신비로 오늘을
새롭게 한다.
말씀으로
자라나는
오늘이다.
말씀의 눈물이
말씀의 열매가
된다.
말씀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삶의
자리이다.
말씀으로
완성되는
경청의
여정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가운데에서
진정 듣고
있는지를
다시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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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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