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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경영학의 아버지, 반세기 전 ‘지식사회의 도래’ 예견하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피터 드러커 ‘단절의 시대’
경영학의 ‘구루’로 불린 피터 드러커는 지식사회에 대한 현실 진단과 미래 예측으로 1970년대 이후 탈산업사회론과 정보사회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영학의 ‘구루’로 불린 피터 드러커는 지식사회에 대한 현실 진단과 미래 예측으로 1970년대 이후 탈산업사회론과 정보사회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역사학자 H 스튜어트 휴즈는 <지식인들의 망명>에서 파시즘을 피해 유럽 대륙을 떠나 미국이나 영국 등으로 이주한 지식인들을 다뤘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등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대표적인 이들이었다. 이 독일인들 이외 또 하나의 이주 그룹은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이었는데, 프로이트, 슘페터, 포퍼, 비트겐슈타인, 하이에크, 폴라니 등이 그들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 지식인들이 전후 서구사회에 미친 사상적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이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1909~2005)다. 드러커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고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지식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부 유럽 출신의 이 지식인이 가장 미국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렸다는 점이다. <경영의 실제>(1954)를 위시해 그가 발표한 경영학 저작들은 전후 경영학의 발전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정신적 스승이 ‘구루’라면, 드러커는 경영학의 ‘구루’였다.
드러커의 저작이 경영학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현대 서구사회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저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미래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단절의 시대>(The Age of Discontinuity, 1969), <새로운 현실>(1989),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1993), <넥스트 소사이어티>(2002) 등은 그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드러커는 자신이 미래학자로 분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식사회(knowledge society)’와 ‘지식경제’ 등 그가 주조한 개념 및 시대 진단은 새로운 미래를 예감하게 했고, 그가 예측한 미래는 적잖이 현실화됐다. 전후 70년의 사상사를 통틀어 볼 때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의 소통에서도 드러커만큼 영향력이 컸던 대중적 지식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피터 드러커의 대표 저작 <단절의 시대>
■과거로부터의 네 가지 단절
드러커의 책들은 크게 경영학 저작과 시대 진단 저작으로 나눠볼 수 있다. <경영의 실제>는 경영을 종합적으로 파악한 최초의 책이라는 드러커 자신의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영의 정의, 경영자라는 주체, 경영자의 일 등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저작이다. 경영이 사람에 관한 것이라는 드러커의 경영 철학은 이후 경영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단절의 시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드러커의 현실 진단과 미래 예측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은 4부로 이뤄져 있다. 제1부와 제2부가 지식 기술과 글로벌 경제를 다룬다면, 제3부와 제4부는 조직사회와 지식사회를 분석한다. 부제는 ‘우리의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지침(Guidelines to Our Changing Society)’이다.
196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드러커가 주목한 것은 과거로부터의 단절 현상이었다. 그에 따르면, 네 가지 현상들이 중요하다.
첫째, 20세기 후반 성장 산업은 전후 1950~1960년대 이뤄진 양자물리학, 원자학 및 분자학 등 과학적 발견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둘째, 경제는 개별 국가가 주도하는 국제 경제에서 세계가 하나의 시장을 이루는 글로벌 경제로 변화하고 있다.
셋째, 사회와 정치 체제가 고도로 집중된 권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다원화되고 있다.
넷째, 지식이 경제의 새로운 자원으로 부상하고, 그 결과 지식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결론에서 드러커는 20세기 후반에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지식사회라는 개념이 이 책에서 최초로 체계적으로 분석된 것에서 볼 수 있듯, <단절의 시대>는 과학기술 지식의 중요성과 지식사회의 도래, 나아가 지식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선구적으로 다룬 저작이다. 이러한 드러커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현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넥스트 소사이어티>로 이어졌다.
■드러커와 지식사회의 미래
지식사회에 대한 드러커의 현실 진단과 미래 예측은 1970년대 이후 탈산업사회론과 정보사회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절의 시대>는 대니얼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 앞선 선구적인 저작이었다.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에서 제시한 지식사회론을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더욱 세련되게 다듬었다. 이 저작에서 드러커는 지식경영자·지식전문가·지식피고용자의 주도적인 역할, 다원적 탈자본주의 정치 체제의 등장, 지식사회에 대응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러한 드러커의 진단과 예측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렸다. 드러커의 장점은 경영학적 사고에 있었다. 현대사회가 기업사회인 만큼 기업의 변동을 통해 본 미래의 사회 변동에 대한 그의 전망은 매우 날카롭고 탁월했다.
하지만 최근 지구적 경제위기와 불평등 강화를 주목할 때 드러커의 분석은 너무 소박하고 낙관적이었다. 현대 기술지배사회는 생활의 편리함을 안겨주는 동시에 일자리 감소, 인간 소외, 획일적인 대중 통제와 같은 결과들을 낳아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지식이 중요해져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주목할 쟁점은 누가 지식을 통제하는가의 권력의 문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강조했듯, 권력은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지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드러커의 시각에서 보면 지식사회는 새로운 다원주의 사회이지만, 푸코의 시각에서 보면 우울한 통제 사회이다. 21세기 지식사회에 담긴 이런 야누스적인 특징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부각시키기는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류가 고전적인 산업사회 또는 자본주의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단절의 시대>는 이재규 전 대구대 총장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출판사는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책 내용의 순서를 다소 바꾸었다. 이재규 교수는 <한 권으로 읽는 피터 드러커의 명저 39권> 등 드러커의 학문과 사상을 다룬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시한 드러커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속 폴라니
드러커가 발표한 저작들 가운데 가장 이채로운 책은 <피터 드러커 자서전>(1978)이다. 이 책의 원제는 <한 구경꾼의 모험>(Adventures of a Bystander)이다. 드러커의 다른 책들 못지않게 널리 읽힌 이 자서전은 독특한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자기 삶에서 의미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 그들과의 관계가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돌아보는 형식을 취한다. 그 사람들은 할머니부터 제너럴모터스(GM)를 이끈 앨프레드 슬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폴라니 일가와의 만남이다. 드러커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사진)를 알게 됐고, 두 사람 간의 교류와 우정은 폴라니가 미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폴라니를 처음 만난 날, 드러커는 폴라니 가족의 식사에 초대됐다. 제법 넉넉한 수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폴라니 가족은 감자로만 저녁을 먹고 있었다. 드러커가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자 아내인 일로나 폴라니가 대답했다.
“빈은 헝가리 피란민들로 넘쳐나고 있어요. …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지만 칼(남편)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칼의 월급은 다른 헝가리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나가서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이 논리적인 일이죠.”
미국으로 이주한 직후 드러커는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1944)을 쓰는 것을 지켜봤고 논평했다. 드러커에 따르면, <거대한 전환>의 목표는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폴라니는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공동체와 그 안의 인간관계가 분열을 조장하는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폴라니 이론은 전후 진보적 사회과학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지속적인 영감을 안겨주고 있다.
폴라니가 20세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했다면, 드러커는 자본주의 안에서 기업의 혁신과 책임을 추구했다. 드러커는 자서전에서 폴라니의 진보적 이상주의와 자신의 보수적 현실주의를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기술하고 비교했다. 드러커가 초대받았던, 설익은 감자로 함께했던 식사는 크리스마스 만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