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4)
5.성종시대를 풍미한 사람들(2)
논리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와 강동 6주.
서희는 광종대에 대광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 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광종이 귀화인들에게 지나친
대접을 하며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눠주자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하여 광종의 잘못
된 행각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서희는 943년 대쪽 재상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이천이고 아명은 염윤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곧
도 머리가 뛰어났던 그는 광종 11년에 18세로 갑과에 급제한 후 광평 원외랑 등을 지내며 승진을 거듭하였다.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십여년간 단절되었던 송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면서 처음으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았
다. 이때 송의 태조는 서희의 절도 있는 행동과 예법을 높이 평가하여 검교병부상서 벼슬을 내렸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후 서희는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좌승을 거쳐 983년에 정3품 병관어사에 올랐다. 그
리고 993년 그가 정2품 내의시랑에 있을 때 거란이 침입하자 중군사에 임명되어 시중 박양유와 문하시랑 최량과 함께
북계(지금의 평안북도)로 진출하여 방어전략을 세웠다.
당시 거란은 요(遼)를 세우고 막강한 힘을 형성하여 중원을 압박하는 동시에 고려와 여진에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
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과 외교를 단절하고 송과 접촉하였고, 거란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동경 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케 하였다. 이에 고려는 응징을 결의하고 성종이 직접 서경에서 진을 쳤고, 서희 등이 북계를 수비하였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은 일시에 봉산군을 격파하였으며,많은 고려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고려 조
정에 서한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소손녕은 자신들이 이미 발해를 멸망시켜 고구려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
구려땅 일부를 차지했기에 자신들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서희가 이 서한을 접하고 화의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성종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타진했다. 하지만 소손녕은 고려가 항복하
면 화의에 응하겠다고 답한다.
소손녕은 80만 거란군이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노골적으로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에선 항복하고 서경 이
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주고 황주에서 철령까지를 국경으로 하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성종 역시 이 의견
을 받아들일 마음으로 서경 창고에 있던 쌀을 모두 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록 명령했다. 그런
다음에도 쌀이 남자 그것이 적들의 군용으로 쓰일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서희는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 서희는 넉넉한 식량을 바탕으로 적과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
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 약점을 잘 알고 움직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
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쌀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양식이란 백성의 생명줄로서 비록 적에게 이용된다고 하더라
도 헛되이 강물에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희의 강력한 반대로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은 거둬졌다. 그러자 서희는 다시 고구려의 옛땅을 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이지백이 서희의 으견을 지지하며 서경 이북의 땅을 적에게 내주
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희와 이지백의 간언으로 가까스로 서경이북땅을 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은 수그러
들었다.
이에 소손녕 군대는 다시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소손녕의 서한에 대해 고려가 오랫동안 답변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위력을 과시하고자 안융진을 공격했던 거란군이 패배하자 소손녕은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을 보내 고려에 면대를 요청해왔다.
성종은 소손녕의 면대 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서희를 적진에 보냈다. 국서를 가지고 서희가 자신의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뜰에서 절을 하라고 말했다. 이에 서희는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만 있는 일일 뿐 양국의
대신끼리 대면하는 좌석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소손녕은 끈질기게 자신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그의 요구를 들어줄 서희가 아니었다. 서희의 이 같은 당당함에 감복한 소손녕은 결국
당상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절차를 승낙하게 되고, 비로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서희와 마주 앉은 소손녕이 먼저 두 가지 요구를 하였다. 첫째는 고구려의 옛땅은 거란에 속한 것이니 내놓으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요나라를 섬기지 않고 왜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
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국호로 이미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음을 내세
우면서 고구려 옛땅이 거란의 영토라는 주장에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오히려 거란이 동경(東京)으로 하고 있는 요양
(遼陽)이 고구려의 땅이므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거란과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거란과 고려 사이에 여진이 있기 때문에 거란을 왕래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려운 탓이라고 해명한다. 게다가
거란과 고려가 통교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쳐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여진이 머무르는 지역에 성을 구축
하고 길을 통할 수 있도록 거란이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희의 이러한 강변은 먹혀들었다.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를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의 왕에게 보고하여 고려와
의 화의를 승낙받음으로써 일단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종결된다.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화의를 얻어내고 압록강 동쪽 지역의 여진족들을 소멸하는 일에 거란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
속을 얻어낸 후 서희는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왕에게 소손녕과의 대면 결과를 보고하자 성종은 즉시 시중 박양유
를 예폐사로 삼아 거란에 파송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서희는 성급하게 사신을 보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역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땅을 회복한 연후에 국교를 통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오랫동안 왕래가 없으면 또 다시 거란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며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
희와 성종의 외교에 대한 관점 차이를 뚜렷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희는 거란과 대등한 힘을 형성한 다음 외교
관계를 성립시켜도 늦지 않다는 실리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성종은 무엇보다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는 화의가 우선이라며 정치적 안정을 먼저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거란과의 화의가 성립되었고, 서희는 이듬해부터 압록강 동쪽 장홍진, 귀화진, 곽주, 구주 등
에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구축하여 여진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확대하
였다. 이때 구축한 강동 6주는 후에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뻗어가는 기반이 된다.
이후 서희는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년(성종 15년)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요양해야 했다. 서희의 건강
이 점차 약화되어 근무할 입장이 되지 못하자 성종은 그에게 치사령을 내려 쉬도록 하였다.
요양을 하고 있던 서희는 성종이 죽고 난 목종 원년(998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
에 배향되고 덕종 2년 태사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에게는 아들 눌과 서자 주행이 있었다. 서눌 역시 벼슬에 올라 재상을 지냈으며, 그의 딸은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성종시대의 세계약사
성종시대 중국에서는 북방의 동호의 하나인 거란이 요를 세워 중원을 노리면서 송과의 패권다툼이 치열해진다.
이에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2세가 죽고 오토3세가 즉위하였으며 모후 테오파노가 섭정한다.
러시아에서는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가 동로마 정교회를 받아들여 러시아 정교회가 발족했다.
첫댓글
늘 애매하던 거란과 여진을
상세하게 알게되었습니다
국사를 배웠던 가물가물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온전한 고려의 지도를 만들게한
서희의 공로가 대단합니다.
왕과 신하 외교적 관점은 차이는
있었으나 고려는 서희와 같은
충신을 만났으니 홍복입니다.
갑자기 선조와 이순신장군을
생각했습니다.~
미미한 저의 게시글에 항상 좋은 말씀만 하여 주시는
보챙님의 성의에 감사합니다.
요즘같은 여름에는 서늘한 나무그늘아래서 부침개에다
곡차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