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실꾸리
강 수 니
뜨개질을 하다가 실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바늘 코에 실 한 올을 걸어 올리면 점 하나가 찍어진다. 태초의 인연점이다. 대바늘 위에서 옆으로 점점이 이어져 나가면 선이 되고 교직이 되면 면으로 넓어져 옷이 된다. 누구를 입히는 공간, 무엇을 감싸는 그 공간이 3차원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어머니는 이론적인 논리는 알지 못했어도 사람 사는 이치를 실에서 찾고 실에서 풀고 실로 맺었다. 가마타고 시집와 아버지 얼굴을 사흘 후에나 멀리서 훔쳐봤다는 조선시대의 여자. 묵정밭 같은 아버지의 텃밭에 심겨진 날부터 일생 엎드려 돌멩이를 골라내고 다진 터에 목화밭 같은 살림을 일구었다.
물레에 감아올린 실꾸리 같은 자식들을 베를 직조해내듯 씨실 날실이 성글지 않는 반듯한 사람으로 만들어 냈다. 목화를 키우는 농부의 바람은 하얀 목화꽃이 꽃으로만 피어 있지 않고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재료가 되는 것이리라.
“따순 사람이 되거라. 내가 따뜻해야 남도 뎁힌다.”
“따순 게 제일인기라. 덮어주고 감싸주면 뭐든 회동이 돌아 다 풀리는 기라.”
어머니의 역사책 사이사이 꽂혀있는 잠언들이다. 우리 집 마당은 오빠 다섯과 근동 시골에서 유학 온 친척오빠들로 늘 십여 명씩 북적되어 흡사 논산훈련소 같았다. 그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며 크고 작은 일들, 특히 먹고 입는 것을 최우선으로 아는 어머니는 늦은 밤까지 터진 옷을 기웠다. 야생마 같은 머슴아들의 옷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이 구멍이 났다. 그때 우리 집은 기차 종점인 소도시에 있어 시골 고향에서 대도시로 오가는 인척들의 터미널이었고 쉼터였다.
어머니는 며칠씩 묵어 가기도하고 급한 여비를 빌려 가는 사람들의 배를 소찬이라도 따뜻이 채워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춘기 시절, 나는 늘 그렇게 북적거리는 여관 같은 집이 싫었다.
어머니는 1908년생이다. 한일합병 이전, 대한제국 때라 이름 그대로 조선 여인이다. 아마도 어머니 몸의 세포에는 이 땅, 격변의 근 현대사가 알알이 박혀있어, 시대를 함께 살아낸 글자 없는 역사책이 아니었을까. 몸이 곧 역사책이었던, 어머니의 책장을 넘기면 일제 합방과 해방, 6.25 전쟁과 4.19, 5.16 등등 근 현대로 오는 굵직한 역사 행간 아래에는 어머니의 개인역사도 빼곡히 바느질로 누벼져있었다.
그 두꺼운 책,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우리에게 읽어줄 때마다 눈물, 콧물 훔쳐내며 며칠씩 걸리는 이야기, 하염없는 실꾸리처럼 풀어내던 이야기를 우리 칠남매는 듣고 자랐다. 돌아가실 때까지 늘 반복했지만 녹음기처럼 한 번도 틀려 본 적이 없는, 나중엔 우리들도 통째로 달달 외워버려 실밥 자국도 너덜너덜한 고서가 되었다.
다 큰 자식들도 외지로 나가고 시골까지 버스가 들어가 인척들의 수발도 뜸할 때 어머니는 철마다 조각보를 만들어서 나눠 주셨다. 색색의 비단조각은 비단끼리, 명주실 박음질로 이어 붙이고 모시자투리는 모시끼리 모아 두었다가 삼(麻)실로 이어야 한단다.
하찮은 조각천도 서로를 이어붙일 땐 같은 성품, 같은 방식이어야 탈이 없다고 하셨다. 두꺼운 천에 가는 실 바느질은 잡는 힘이 없어서 늘어져버리고 얇은 천에 굵은 실 바느질은 천이 울어 못 쓴다고 하셨다. 밖에서 들어오는 실은 천의 바탕에 맞춰야 매끈해지는 것이라며 결혼 날을 받은 날부터 “남 볼 때는 남 보듯이 님 볼 때는 님 보듯이” 라고 일러 주셨다.
나도 밖에서 들어가는 실 같아서 시집의 풍속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리라. 시누이 많은 외아들에게 시집보내는 막내딸이 걱정스러워서였다. 시집 식구들 앞에선 남편을 멀뚱멀뚱 남 보듯이 하다가 둘이만 있을 땐 정답게 굴어야 한다는 당부였다.
두 가지의 변신이 어색한 나는 그냥 한 가지로 남 볼 때나 님 볼 때나 남을 보듯 하며 청춘을 다 보내고 나니 버릇이 되어버린 태도는 시어른 없는 지금도 고쳐지지 않아 남편은 평생 불만이다.
눈물 빼는 시집시절, 포기하고 싶은 간절한 딸의 마음을 읽을 때마다 어머니는 “아가, 시집 문턱은 넘어 나갈 땐 세치이고 들어올 땐 석 자니라” 하셨다. 문턱높이 가 세치면 한 뼘도 안 되고 석 자면 1미터 가까운 높이인데, 가벼운 결심으로 뛰쳐나가기는 쉬워도 후회해서 되들어 오는 것은 어렵다는 협박이었다.
엉킨 실타래는 한소끔 윗목에 밀어두었다 풀어라 하시며, 억지로 당겨서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실도 적(積)이 삭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가 살살 흔들다 달래다 보면 안 보이던 실의 촉이 보이고 순리대로 길도 찾아 나오는 거라고 했다.
8년을 중풍 든 아버지의 병바라지를 하고난 어머니. 공원묘지에 풀이불 덮어드리고 온 뒤 어느 따뜻한 봄날, 산소를 내려오며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두런두런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풋 조롱박같이 조롱조롱 달려있던 젊은 시절 어쩌다가 아버지가 성병을 걸려왔더란다. 특효약이 전혀 없었던 그 시절, 배우자는 물론 자녀들까지 기형아가 되고 폐가망신 하는 병. 종국엔 죽음으로 가는 병을 완치할 때까지 독방에서 그 긴 시간을, 그 독한 치료를 견디며 아내와 애들을 위해 일체 가족의 접근을 금하고서 그 병을 이겨냈단다.
그래서 그 뒤에 태어난 자식들은 물론 칠남매 모두 오뚝한 복코에 (그런 병은 자녀들의 코부터 망가져 내렸다고 한다) 훤한 인물도 다 아버지의 강한 의지 덕분이란다. 어머니 눈엔 당신 자식들의 인물은 제일가는 옥돌이라고 했다. 당시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가 그렇게 심지 굳게 마음 다져 이겨낸 사람 드물다고 아버지의 자랑을 풀어내었다. 이 대목은 우리가 여태 들어왔던 어머니의 역사책에도 없었던 내용이라 수용하기도 힘들었고 남편을 존경하는 어머니의 사고가 기막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데 차분히 다음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옛날 양복이 귀할 때 구멍 난 데는 짜깁기를 해 때워서 입었거든 짜깁기 할 때는 제 살 같은 천을 찾아내 오려내 대고 제 몸에서 뽑은 실로 한 땀 한 땀 이어 붙이다보면 내 살 네 살 구분 없이 말짱하거든. 금이 쩍 가는 바가지 같이 깨지려는 우리 집을 그 양반은 독방에서 문 닫아걸고 제 살 뽑아 그 틈을 깁고 메워서 감쪽같이 말짱해져 살아 나왔잖냐.”
아하! 그것이었구나, 세상사는 이치를 실에서 찾고 실로서 풀고 실로 매듭짓는 어머니의 철학. 밉고도 자랑스럽던 남편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 역사책 맨 뒷장에 숨겨진 못 다한 이야기였다. 바느질이 끝난 후엔 매듭으로 마무리를 짓듯, 숨은 역사까지 다 읽어 준 며칠 뒤, 책을 엮었던 실밥으로 매듭을 짓듯 새벽잠에 가셨다. 저승까지 들린다는 막내딸의 울음에도 모로 누운 어머니의 역사책은 딱딱하게 굳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페이지로 차디차게 닫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