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는 한국의 문화수도이다.
강남은 서울속의 서울이다. 한국을
알리는 강남스타일이 말해주듯이 강남은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이다. 가끔 외국인들로부터 강남스타일의 ‘강남’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파리의 센강 남쪽 리베 고쉬(Rive Gouche; 센 강 서안 쪽)를 이야기 한다. 흔히 세느 강이라 부르지만 정식 파리장의 발음은 ‘ㄴ’ 받침으로 끝나는 단어의 “~ㄴ 이지 ~느”라고 하지 않는다. 소위
우리말로 강남이다. 센 강은 동서로 776Km 의 장강이다. 센 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바다를 향해 나가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대서양을 바라보며 오른쪽 강 지역(Rive Droite)과
서쪽 강 지역(Rive Gauche)으로 나눈다. 이 리베
고쉬에는 주로 문인들과 주로 대학생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따라서 문학과 교육 중심으로 젊음과
문학의 향기가 넘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과 같이 파리의 강북은 상업지역으로 서울의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의 상업지역과 같은 느낌을 준다. 파리의 강남은 특히 우리 서초와 같은 점이 많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인들이 향수를 달래 줄 곳이 몽마르뜨 언덕을 닮은 경사진 서래 마을이라 생각되어 모여 사는
지 모르겠다. 『문학서초 』12호 서래마을 특집을 내면서 서래마을 소개를 해 주었던 미모의 파리지언
마리는 서래 마을은 서울 속의 작은 파리라고 했다.
소위 강남이란 의미는 강남 3구
즉 서초구, 강남구, 그리고 송파구를 말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필자는 우연히도 강남 3구에서 모두 거주
경험이 있고 또 3구에 사무실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서초가 자랑스러운 것은 서초구에는 국가대표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은 이곳에 모인다. 내가 쓰고 번역한
책들도 그 곳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내 영혼의 안식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술의 전당은
세계적인 수준의 규모와 무대장치를 지닌 예술의 공간이다. 우리 문학이 꽃으로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명문대학이 세곳이나 된다.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1~2% 정도되어야 입학 할 수 있는 서울교대는 초등학교 교사를 배출하는 명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예술계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성모병원이
속해 있는 카톨릭 대학이 우수한 의사를 배출하는 배움터가 서초에 있다.
서초와는 달리 강남구에는 명문대학은 물론 대학다운 대학이 없다. 수준 높은 문화공간도 없다. 단지 무역센터와 코엑스 등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고 입시학원이 많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송파구에도 종합대학이 없고 롯데월드를 중심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와
종합운동장 등 체육관련 시설이 대표적인 문화시설이다. 강남에서도 서초와 확연히 구별되는 도시다.
런던에 가면 하이드파크, 그린파크
등 공원이 많다. 파리나 뉴욕이나 세계의 대도시에는 공원은 많지만 산은 대부분 없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 쌓여 큰 공원 역할을 한다. 이 산들은 우리가
사랑하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이런 공원으로 포함하면 서울은 공원이 가장 큰 도시일 것이다. 서초에는 우면산과 청계산이 있다. 십 여년 전에 우면산에 시판(詩板)을 걸어 온 산을 시로 장식하여 문학의 향기를 뿌리기도 했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보다 크고 웅장한 산 공원이 있어 자랑스럽다.
예전에 서초문협에서 <문화공간>이라는 특집을 내기도 했지만 편집장으로부터 <문학공간>이라는 제하의 원고를 청탁 받고 보니 문학의 공간이 뚜렷이 뭐라고 떠 오르지 않는다. 문학은 예술분야 중에서 아름다운 우리말로 만들어지는 예술이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무한의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예술이 문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벨상에도 예술분야는 문학밖에는 없는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문학을 현재 움직이는 리더들이 모두 서초출신이다.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손해일, 한국시조협회 회장이 있다. 물론 전현직 문협회장을 지내신 분들도
많아 우리 서초 문협을 더욱 자랑스럽게 한다.
반포 주공아파트에서 거의 평생을 거주하다 마지막 생을 반포에서 마감하신
피천득 선생은 수필처럼 청빈하게 사셨다. 문인 중 가장 장수하신 문인으로 알려졌던 선생은 반포 주공아파트에서
비닐장판이 깔린 작은 아파트에서 겨울나무처럼 사시다가 2005년 97세의
나이로 하늘 나라로 가셨다. 큰 나무가 되어 우리를 잠시 쉬어 가게 만드는 <피천득 산책로>가 고속버스 터미널 7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이 길이 이어진다. 선생의 유품을 정리하여
롯데월드 3층 민속관 입구에는 금아문학관이 있다. 사용하던
비닐장판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롯데그룹차원에서 신격호 회장의 문화사업에 수억 원을 들여 10년 전 문을 열었다. 2008년 당시 『문학서초 』 편집장을 맡아 선생의 특집을 기획하면서 그 분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선생의 시 중에서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는 아산병원 소아과 의사인 둘째아들 세영씨와 남양주 묘소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그분이
남긴 말처럼 마음 부자로 사셨던 것 같다. 나의 선생의 이 말을 자주 되 뇌이곤 한다. “돈과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이 부자다.”
별로 수입이 없었던 옛 원로 문인들은 뭘 먹고 살았는지 궁금했다. 이슬을
먹고 살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도 그 고고한 세계를 동경하다 보니 글을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문인들은 물론 문인협회 관련 사무실은 늘 청빈한 모습이었다. 서초문인협회의 초기 살림도 그랬다. 회장 소유의 오피스텔이나 사무실이 아니면 자택의 주소를 협회의 사무실로 운영해야 하는 셋방살이만도 못했던 곁방살이였다. 4대 회장단은 남부터미널 근처 김양식 회장 개인 사무실에서, 5대회장단은
교대역 신길우 회장 오피스텔이 아지트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사무실이 없는 경우에는 회장 댁의 거주지가 사무실이었다.
사업에는 늘 빛과 그림자가 있다. 특히
중소기업은 대양을 항해하는 일엽편주 같다. 잘 되던 사업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필자는 사업을 하면서 제조 공장을 2곳을 운영하면서 1천만달러 수출탑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IMF 사태 때에 파고를 넘는 듯 했지만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몇 년 뒤 문을 닫았다. 이룩해 놓은 사업이 문을 닿는다는 것은
분신 같은 자식을 잃는 것 못지않게 고통스럽다. 시련에 맞닥뜨리면 온몸이 굳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지만 사람이 또 성숙해지는 계기도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고 나를 낮추는 축복의 기회이기도
했다. KOTRA와 KOTRA추천한 중소기업에서 기업자문을
맡다가 2012년 중남미 봉사를 나갔다.
우리나라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바뀐 세상에서 유일한 나라다. 미국의 원조물자 밀가루, 분유는 물론 나는 헌 옷을 얻어 입던 소년이었다. 이런 소년이 저개발
국가에 가서 경제발전자문을 해 준다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바로 우리 세대가
이룬 기적이란 이런 것이다. 2012년 봉사를 나갔다가 4년만에
귀국하여 보니 우리 문협의 위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예술회관 3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은 월셋방을 전전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문학공간의 터를 잡은 셈이다. 문학 사랑방이면서
정상 도전을 향해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문화수도는 서초구이다. 서초 문화속의 문학이 새집 단장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문인들이 이 공간을 중심으로 문인 사랑방으로 또 서로가 멘토가 되어 창작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큰 나무가 되어 준 피천득 선생, 피천득 산책로, 지금 문단을
이끄는 서초 출신 문학리더들, 국가 대표 도서관이며 우리들의 문학혼을 담아주는 국립중앙도서관, 문학 꽃이 피어나는 예술의 전당과 명문대학들, 한강과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양재천, 또 아름다운 공원으로 시민들이 좋아하는 청계산과 우면산이 있어서 머리를 맑게 한다. 서초예술관에 자리한 우리 문협 사무실이 얼마나 따뜻한 지 모르겠다. 서초는
서울 속의 서울이고 문학을 움직이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끝
첫댓글 초고는 일종의 막글이고
막글을 좋아합니다.
화장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처럼 수수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저는 막글을 좋아하고
우리 문학기행이나
문학세미나에서 느낀대로 오탈자 무시하고 막썹니다.
나중에 인쇄물로 나갈 때 쯤에
메이크업 즉 쬐끔 퇴고를 합니다.
이글. 또한 막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