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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이공항이다. “도모 아리가토!”
일본은 시각보다 청각으로 타국의 이미지를 먼저 풍긴다. 한국인과 외양이 가장 닮은 민족이 사는 땅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쪽도 매한가지일 터인데,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사뭇 달라 오랜 세월 두 나라 간 분쟁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을 두고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도 하는데, 요즘은 한류바람을 타고 그 간극이 상당히 좁혀진 걸 일본여행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그런 일본인들의 오래된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섯 명 일행이 3박4일간 걸을 일본 와카야마현의 길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출발 전, 코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 인터넷 검색조차 못 하고 김포공항 국제선 검색대를 지나고 말았다. 손에 쥐어진 정보라곤 스페인 산티아고길과 더불어 세계에서 ‘유이(唯二)’하게 이 길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놀라운 이력뿐이다. 물론 그 이력이 당장 급한 일을 밀어두고 길을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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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 년 된 거목과 수십만 기의 납골당이 어우러져 이뤄내는 풍광이 자못 경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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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전의
안부 통신망이 순례길 돼
일정의 첫 이틀은 일본 불교의 종파인 진언밀교의 총본산 고야산(高野山) 순례길이다. 20㎞에 달하는 이 길은 진언밀교를 개창한 고보대사 구카이(弘法大師, 空海 774~835)가 금녀구역이었던 고야산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고야산 밑에서 비구니로 수행하던 모친을 한 달에 아홉 번씩 만나러 오가던 길이다.
순례길의 시작점은 지손인(慈尊院)이라는 1,200년 된 사찰로, 여자의 몸으로 고야산에 들지 못한 고보의 어머니가 불법을 공부하던 자리에 그녀를 기리며 지어졌다. 어머니가 입적하던 날 고보가 꿈에서 만난 미륵불을 직접 조각한 목불이 지금도 남아 국보로 지정되어 본당에 가부좌를 틀었다.
결국 고야산 순례길은 고보대사가 어머니와 소통하던 길이었다. 요즘 같으면 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정리될 일이었으나 그때는 길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유일한 끈으로 기능했고, 길 위를 오가는 것이 소통으로 이어졌다. 1,200년 전 모자가 안부를 묻던 통신망이 지금의 순례길이 된 것이고, 현세의 우리는 이 길을 걸으며 자신의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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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보대사가 고야산에서 가장 먼저 세웠다는 곤도(金堂)와 높이 50m의 곤폰다이토 (根本大塔). 피뢰침이 없던 탓에 1,000년 동안 여섯 번 불타고 일곱 번 재건됐다. 마지막 재건된 시기는 20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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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복을 기원하는 순례길을 시작하기 위해 지손인을 출발하면 처음 만나는 것이 니후칸쇼후(丹生官省符)라는 신사. 사찰 바로 위로 지어진 이 신사에서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도(神道)가 불교와 융합하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독특한 문화를 보게 된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일본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신불습합은 1,000년 넘게 이어온 일본의 오랜 전통이었으나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때 신도와 불교를 명확히 구분하는 정책을 쓰면서 지금은 외형적으로 그런 전통을 간직한 곳이 별로 없다. 하지만 지금도 결혼식은 신도식으로 치르는 반면,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치르는 경우가 많아 신불습합의 정신적 뿌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니후칸쇼후신사 곳곳에는 고보대사가 오지 중에 오지였던 고야산을 진언밀교의 총본산으로 삼게 된 사연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보가 고야산으로 오게 된 그림 속 이야기도 결국은 신불습합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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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야산 기슭의 여러 신사 중에 본사에 해당하는 니후쓰히메신사. 신불습합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고야산에서는 사찰을 지을 때 이곳에 먼저 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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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보가 AD 810년경 중국으로 불교 유학을 다녀온 후 밀교를 퍼뜨릴 성소(聖所)를 찾아 일본 전역을 편력하고 있을 때 검은 개와 흰 개의 인도를 받게 된다. 이 개가 이끈 곳에서 만난 사냥꾼이 지금의 고야산을 일러주어 이곳에 들어와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개와 사냥꾼은 이곳 토속신이 현신(現身)한 모습으로 풀이된다. 즉, 일본의 토속신이 불교인 진언밀교의 총본산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는 것이다. 고보 역시 이곳에 사찰을 지을 때 신사에 이를 먼저 고하여 허락을 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해발 800m에 있는 고야산 성지에 혹한이 찾아들거나 큰 불이 나면 산 밑에 있는 신사로 스님들이 거처를 옮겨서 수행하고 종무를 보았다는 기록도 있어 그 관계가 얼마나 오랫동안 정다웠는지 알 수 있다.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져야 아름다워지는 것은 종교도 다르지 않은가보다.
해발 100m에서 시작해 해발 840m에서 마무리되는 고야산 순례길. 표고차가 740m에 이르지만 넓게 다져진 길은 거친 경사와 부딪치는 법이 없다. 숲 경사면의 결 사이사이를 지그재그로 순하게 파고들면서 고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려보게 하는 고양감은 조밀하게 웃자란 삼나무와 편백림 때문일 뿐, 길은 수평에 가까운 경사를 지향한다.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기에 햇빛은 여간해서 송곳 같은 바늘잎의 집합을 뚫어내지 못한다. 그 덕으로 길 주변으로는 그늘을 터전으로 삼는 양치류들이 득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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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이시가 안내하는 고야산 순례길은 경관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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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세월을 견뎌낸 돌기둥들
지금의 찻길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리 높은 귀족이라도 이 길을 지나지 않으면 고야산 성지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길은 시작점부터 정확히 109m 거리마다 세워진 돌기둥 180개가 진언밀교의 총 본산인 곤고부지까지 걷는 이를 편안하게 이끈다. 초이시(町石)라 불리는 이 돌기둥 때문에 고야산 순례길은 초이시미치(町石道)라 부른다.
높이 3m에 달하는 초이시는 인도 경전의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로 우주를 뜻하는 다섯 단어(하늘, 바람, 불, 물, 땅)가 새겨진 5단 구조로 솟았다. 무려 800년의 세월을 버텨낸 이 기둥들은 제각기 사연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의 전령사처럼 살아 왔다.
각각의 돌기둥마다 서린 사연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단행본까지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쌓인 이야기는 세월만큼 무궁무진하다. 우리의 안내인도 겉과 속이 다 헐어버린 그 책을 옆구리에 꼭 끼고 남다른 의미를 지닌 초이시를 지날 때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당시 이 돌기둥들은 20년에 걸쳐 대부분 귀족들의 공양으로 세워졌다. 현세에서의 이익을 인정한 진언밀교가 당시 귀족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돌기둥은 그렇게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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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행이 첫날 템플스테이를 했던 렌게조우인의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붉은색으로 바닥과 장식이 채워졌다. / 극락왕생의 길로 든다는 오쿠노인 공동묘지에는 대동아전쟁 때 숨진 다섯 민족의 위령비도 있다. 비석 앞의 파란 나뭇가지가 고야마키라는 이곳 전통의 공양물이다. 고야산 입구부터 이곳에 이르는 거리에는 고야마키를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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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를 이뤄낸
고보대사를 만나는 길
우리 일행은 일정에 쫓겨 고야산 순례길 전체를 다 걷지 못했다. 순례길 중후반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 고야산 성지까지 4시간 정도 걷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내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바위 옆에서 이야기 한 자락을 풀어낸다. 이곳이 1,200년 전 여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고야산으로 가고자 했던 어머니를 고보대사가 막아 세운 장소란다. 더 이상 가지 말라고 막아서는 아들을 밀치고 아들이 세웠다는 불국토 고야산을 향하던 고보의 어머니.
얼마 못 가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이 치며 집채만 한 바위가 산 위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고보가 한 손으로 그 바위를 막아내어 어머니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때 떨어지다 고보가 막아낸 바위가 지금도 위태롭게 길 위에 얹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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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쿠노인의 지장보살상. 일본인들은 지장보살이 죽은 이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 렌게조우인의 저녁 쇼진요리(精進料理). 고기와 자극적인 향신료는 쓰지 않았으나 꽤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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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산중도시 입구에서는 우리의 일주문 개념인 다이몬(大門)이 어마어마한 위용으로 걷는 이를 압도한다. 1705년에 재건됐다는 이 문은 높이 26m의 목조 2층 건물로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붉은색으로 마감됐다. 문 양쪽으로는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 목상이 이곳을 찾는 이에게 달라붙어 있던 온갖 불행을 다 떨쳐내 줄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객을 맞는다.
일주문인 다이몬을 지나면 산중 신앙도시 고야산이다. 고야산의 정상은 어디에 있느냐고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갑자기 우물쭈물한다. 알고 보니 고야산은 지형도에 솟아 있는 산(山)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의 신앙성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야산은 일본인이 품은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만들어낸 현실 속의 불국토였다. 다이몬부터 시작해 고야산 신앙도시가 끝나는 오쿠노인(奧の院)까지를 통틀어 고야산이라고 칭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해발 800m 산 속에 제법 큰 규모의 도시가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고층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 속의 신앙촌이라고 보기엔 규모가 상당하다. 현재 인구가 4,000명으로 줄어들었지만 400년 전에는 사찰만 1,000여 개에 승려 1만 명을 헤아렸던 곳이라고 고야산 템플스테이를 했던 900년 된 사찰의 주지스님은 말한다.
지금은 100개가 조금 넘는 사찰이 이 도시 안에 있으며, 그중 52개 사찰이 템플스테이를 하는 슈쿠보(宿坊)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의 사찰들은 보통 500년 이상 된 곳들이 많지만 화재로 인해 20세기 초에 재건된 곳도 적지 않다.
사하촌(寺下村)에 해당하는 거리를 잠깐 지나면 고보대사가 강당으로 가장 먼저 건립했다는 전각 곤도(金堂)와 그 뒤로 엄청난 고양감을 자아내는 높이 50m의 곤폰다이토(根本大塔)가 시선을 잡아끈다. 창건된 지는 1,000년이 넘었으나 피뢰침 시설이 없던 탓에 여섯 번 불에 탄 후 일곱 번 재건된 건물이란다.
잠깐 고야산 거리를 더 걸으면 진언밀교의 총본산인 곤고부지(金剛峰寺)에 이른다. 미로처럼 복잡했던 사찰 내부를 둘러보던 중에 눈에 익은 양각 문장이 문에 새겨져 있어서 살펴보니 도요토미 가문의 것이다. 물어 보니 이 건물은 고야산의 절반을 자기의 무덤으로 삼고자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원으로 재건된 것이었다. 사찰 안의 수많은 방은 저마다 일본 천황이 묵었던 곳,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셋째 아들이 할복한 곳 등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곳 외에도 고야산의 여러 사찰들은 각 유력 가문들의 후원을 받아 세워진 곳들이 많았다. 일행이 템플스테이를 했던 렌게조우인(蓮華定院)이라는 절은 엽전 여섯 개 문장으로 유명한 사나다 가문에서 지은 사찰로 절 입구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식기에도 가문의 문장을 사용한다. 일본 천황가문은 물론 여러 귀족들과의 관계가 긴밀했던 진언밀교는 그렇게 세를 펼쳐나갔고, 현재 일본 전국에 3,000여 개의 진언밀교 예하 사찰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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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라도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고야산 성지에 오를 수 없다. 물론 찻길이 생기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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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가까운 A급 자리엔 천황의 묘
다이몬(大門)을 지난 지 2㎞ 정도 되면 고야산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추앙받는 성지인지를 느낄 수 있는 오쿠노인 입구에 다다른다. 고야산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곳은 고보대사가 입적한 동굴 부근에 세워진 사당과 그 사당에 이르는 2㎞ 구간에 조성된 대형 공동묘지를 가리킨다.
이곳 사람들은 고보대사가 아직도 동굴 안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고보대사의 사당 부근에 가까운 자리일수록 극락왕생에 유리한 명당이라는 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사당에서 가장 가까운 A급 자리는 일본 천황의 묘가 들어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를 위시해 일본 전국의 유력 가문 가족묘가 이곳에 있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여러 기업들의 위령비도 자리한다. 이곳에 모신 유해가 약 50만 기라고 추정할 뿐 정확한 수는 고보대사 외에는 아무도 모른단다.
우리와 다르게 일본은 화장한 뒤 유골함을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쓴다. 크고 작은 비석과 현세로 올수록 점점 더 크게 세웠다는 공양탑, 여기에 망자를 조각한 석상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기의 개성 넘치는 구조물은 거대한 석조 전시장 같은 느낌도 준다. 여기에 수백 년 된 삼나무 군락이 묘지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고, 묘비와 석상 곳곳에 돌이끼가 붙어 음습함에 경건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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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야산에 남아 있는 사찰은 현재 100개가 조금 넘지만, 400년 전만 해도 1,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얀 옷에 삿갓 쓴 복장이 순례자의 전통 옷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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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민족의 위령비
입구에서 얼마 안 가 오른쪽으로 대동아전쟁 때 숨진 다섯 민족의 원혼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있다. 다섯 기의 묘비 중 일본 다음이 조선의 것이다. 이때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나 다음에 올 때는 고야산 거리에서 판매하는 고야마키라는 편백나무 가지를 사가지고 와서 이곳 전통대로 비석 앞에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쿠노인에서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묘비 옆에는 설명과 함께 한국어도 가능한 오디오 가이드가 넘버링되어 있다. 1,000년 전부터 자연스레 조성된 거대한 역사 유적인 오쿠노인은 이렇게 관광자원으로도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드디어 고야산의 가장 내밀한 곳인 고보대사의 사당으로 건너가는 다리 고뵤바시를 지난다. 이곳부터는 사진촬영 금지다. 사당은 주변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고, 다만 그 앞에 지어진 도로도라는 전각에서 발복을 기원할 수 있다. 그래도 고보대사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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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날 숙소 렌게조우인의 정원. 900년 역사의 사찰로 미로처럼 뻗은 복도를 꽤 지나야 숙소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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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불사의 몸으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고보대사는 58억 년 후에 인도어를 쓰는 미륵불이 중생을 구하고자 현신했을 때 그 말을 일본어로 통역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고보대사가 열반에 들었던 자리와 가까울수록 명당의 기운이 세다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한다. 지금도 너나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고보대사의 사당에 가까운 곳에 자신의 묘비가 세워지길 바라고, 그것은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이어진다.
고야산 순례길 여행을 마치고 보니 수백의 사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묘비가 모두 고보대사의 가피를 바라며 한 곳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고야산의 실제였다. 인간 집단의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무서울 만큼 강고한가를 느끼게 하는 현장이다. 이런 것들을 믿고 실천에 옮기는 일본인들이 어찌 보면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무엇엔가 마음을 붙이지 않으면 즐겁게 살아지지 않는 그들이 가엽기도 하다.
다음 편에는 고야산 순례길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마노고도 순례길 이야기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