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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사를 명품 절로 살려낸 원행 스님
글 : 황호택 논설고문
아주경제 기사 입력일 : 2022-01-31
절간의 곡차를 훔쳐먹는 살쾡이
《세종실록 지리지》 담양도호부 편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담양 연동사가 등장한다. 고려 문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이영간(李靈幹)이 어려서 금성(金城) 산성으로 오르는 중턱에 있는 연동사(煙洞寺)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절의 중이 술을 담가서 거의 익을 때쯤 되면 누가 감쪽같이 훔쳐 마셨다. 중이 이영간을 의심하여 두세 번 종아리를 때렸다. 이영간이 몰래 엿보니 늙은 살쾡이가 와서 훔쳐 마셨다. 이영간이 잡아서 죽이려 하자 살쾡이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네가 만일 나를 놓아주면 평생 유용하게 쓰일 신기한 술법(術法) 책을 주겠다" 하였다. 때마침 청의 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한 권의 책을 던져주므로 이영간이 그 살쾡이를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그 책을 간직하여 두었는데 나중에 장성하여 벼슬을 하매 이영간이 하는 모든 일이 보통과 달랐다.
청의동자가 던져준 책은 비결서(祕訣書)였던 모양이다.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이 개성 박연폭포에 거동했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이영간이 칙서를 못에 던져 용을 혼내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기록으로 봐서 연동사는 고려시대 11세기 이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절이다. 연동사에서 동굴법당을 지나 경사가 가파른 길을 계속 올라가면 금성산성 보국문(輔國門)이 나온다.
금성산성에서 의병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정유재란(1597) 이후 400년 동안 연동사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산죽(山竹)과 잡초가 무성하던 절터에 1990년대 초에 20대 후반의 젊은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터 위쪽의 동굴(지금의 동굴법당)에서 생식을 하면서 수도를 시작했다. ‘금성산성 화산암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연동사 절터에는 동굴이 여러 개 있다. 밑이 움푹 파인 거대한 암벽 앞 평평한 곳에 지장보살이 반쯤 묻혀 있었다. 노천법당 주변에도 무너진 석탑의 부재(部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는 동굴 수도를 하면서 연동사 복원을 평생 과업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지장보살을 땅에서 파내 바로 세웠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3층 석탑의 부재를 모았다. 담양군의 지원을 받아 없어진 부재는 새로 깎아 끼웠다. 1996년 완전히 복구한 연동사 3층 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0호)은 담양읍 5층석탑(보물 제506호), 곡성 가곡리 5층석탑(보물 제1322호)의 백제계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후기의 작품.
지장보살은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 모두가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다. 고려시대 후기에 지옥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 신앙이 유행했다. 이 석불도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젊은 스님은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화암마을이 고향이었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출가(出家) 전에 수원에서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다. 담양 용화사의 수진 스님은 가정을 떠나 출가하겠다며 찾아온 이 젊은이의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을 원행(圓行‧1964~2014)이라고 지어주었다. 용화사 수진 스님한테 수계(受戒)한 승려들은 ‘행(行)’ 자를 돌림으로 쓴다.
수진 스님은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지장보살상이 남아 있고 경관이 좋은 연동사를 살려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쑥대밭 같은 폐사터에 젊은 스님 몇 명을 들여보냈지만 중도에 모두 포기하고 나왔다. 그는 원행에게 “금성산성 밑에 폐사터가 있는데 오래된 석불상도 있다. 백일기도를 하고 절을 개척해 보려는가” 라고 물었다. 원행이 선선히 수진 스님의 말을 따랐다.
원행은 조선시대의 도사로 알려진 전우치(田禹治)가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굴을 조금 더 파내고 그 속에서 수도를 했다. 잡초가 많은 절터의 여름은 모기가 많고, 산 속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젊은 스님은 주변의 지형을 최대한 살려 절을 가꾸었다. 폐허만 남은 절터에 극락보전 노천법당 동굴법당을 만들고 아름다운 정원처럼 가꾸었다. 암반 위에 고려시대의 돌 부처와 석탑을 모셔 놓고 법회를 하는 명물 노천법당이 한 스님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이 초기에 설법을 했던 곳도 법당이 아니라 노천이었다.
金城山煙洞寺(금성산 연동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과 극락보전, 노천법당은 일직선상에 있다. 극락보전 불상 뒤로는 대형 통유리를 설치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한 창이다. 이 유리를 통해 300m 뒤 노천법당에서 부처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극락보전에서도 삼층석탑이 보인다. 연동사에는 지금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태양열 발전을 해 전기가 늘 모자란다.
원행 스님은 찰진 논흙을 가져다가 516명의 나한상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아라한은 범어 아라하트(arahat)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 ‘나한’이라고 한다. 16 나한은 부처의 경지에 오른 제자들이고, 500 나한은 역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를 지칭한다. 원행은 나한상을 250 점 가량 만들어놓았는데 똑같이 생긴 나한이 한 점도 없다. 그러나 나한상만 만들고 미처 굽지 않은 상태에서 원행이 2014년 젊은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떴다.
원행은 달마도를 기막히게 쳤다. 추성고을(주류회사) 양대수 대표는 원행이 달마도 치는 모습을 몇 번 구경한 적이 있는데 앉은 자리에서 붓을 몇 번 휘두르면 그림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연동사 극락보전에 그의 달마도 작품이 두 점 걸려 있다. 원행은 달마도를 선물로 주기를 좋아했다. 그의 달마도는 연동사 신자라면 죄다 한 점씩 갖고 있을 정도.
극락보전 외벽에는 그가 그린 6점의 탱화가 남아 있다. 그중 한 점은 생전의 그의 모습을 닮아 자화상(自畵像) 같다. 극락보전 뒷벽의 탱화는 시작만 해놓고 중단했다. .
양 대표는 “원행이 천수경을 독경(讀經)하는 소리는 먼 곳까지 낭랑하게 들렸다. 목소리가 장중하고 개성이 강해 신도들은 멀리서 듣고도 '원행이 독경을 하고 있구만'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한문 독경을 하고 나중에는 우리말 독경을 했다. 연동사 신도회장을 했던 고부정 씨(57)는 원행의 천수경 독경 CD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고 씨는 원행의 그림과 글씨도 수작(秀作)을 여러 점 갖고 있었다.
“나와 원행스님은 갑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8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중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경상도에서도 연동사를 많이 찾아왔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는 절터에 난 잡초를 깎는 것이 원행의 일과였다. 풀을 깎다가 툭 쏘는 기분이 들어 말벌에 쏘인 것으로 알았는데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 가니 쓰쓰가무시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진드기의 유충이 피부에 붙어 피를 빨아먹어 궤양이 생기는 질병이다. 원행은 그렇게 쉰의 나이에 부처님 곁으로 갔다.
“잡초가 며칠만 놔두어도 무성해졌어요. 원행 스님은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쉬지 않고 풀을 깎으셨죠.” 스님을 따르던 보살의 이야기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는 맞은편 산비탈에는 키가 크고 몸피가 가장 굵은 맹종죽 숲이 길게 뻗어 있다. 담양군이 조성한 대숲이다.
해우소도 원행이 직접 지었다. 자연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승려의 미적 감각이 반영돼 있다. 통나무 자갈 기와로 벽을 만들어 벽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장실 내부가 깨끗했고 맹종죽 숲의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들려왔다.
쉼터찻집에서는 절 부근에서 나는 야생차와 차밭에서 가꾼 차를 섞어 내방객과 신도들에게 대접한다. 찻집에는 원행스님이 제작한 나한상들이 전시돼 있다.
요사채의 지붕은 대나무와 산죽을 엮어 얹었다. 방바닥과 벽은 황토를 발랐다. 자연친화적 인테리어다.
원행이 급작스레 열반하고 나서 출가 전 사가(私家)의 동생인 선행(宣行) 스님이 와서 절을 맡고 있다. 절집에서 사가의 형제가 주지를 물려받고 ‘행’자 돌림 법명을 쓰는 것도 드문 일이다. 선행은 “큰스님이 형제간이니 법명에 항렬(돌림자)로 행(行)자를 쓰라”고 했다고 말했다. 원행이 주지일 때는 연동사의 소속 종단이 용화사와 같은 태고종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종단으로 바뀌었다. 절 사정은 캐묻지 않았다.
노천법당으로 오르는 비탈에는 사람 키와 비슷한 오죽(烏竹) 숲이 있다. 오죽은 줄기가 검어서 조경용으로 식재한다. 원행 스님이 오죽 근경(根莖)을 구해다 심으면서 검은 대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었다. 동굴법당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조릿대가 자란다.
연동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많아 연동사라고 했다는 것이 첫째 설이다. 금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연동사가 완전히 전소되고 주변 계곡을 시신이 뒤덮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족들이 찾아와 원혼을 달래기 위해 향을 피웠는데 그 향이 골짜기에 가득 차 연동사라고 했다는 것이 두 번째 설이다. 고려시대부터 연동사로 불렸기 때문에 두 번째 설은 시제(時制)가 어긋난다. 연동사 옆 골자끼의 이름은 ‘이천골’. 정유재란 때 시신 2천구가 뒹굴어 이천골(骨)이라 불렸다고 한다.
연동사에서 세워놓은 동굴법당 안내판에는 전우치가 연동사에 업둥이로 들어와서 동굴법당에서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를 훔쳐먹던 여우를 잡아 용서해주고 살려 보내니 여우가 전우치에게 도술을 가르쳐주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안내판에는 ‘전우치는 실존 인물이며 담양 전씨라고 한다’는 문구가 씌어 있다. 제세팔선주는 마시면 신선이 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연동사에서 스님들의 건강을 위해 빚어 마시던 곡차가 추성주로 비법이 내려온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절 아래로는 저수지가 있고 그 밑으로 산림청의 정원문화원이 올해 공사를 시작해 2024년 7만㎡ 부지에 산림박물관, 숲속의 동화미굴관, 전시정원이 들어선다. 위쪽으로 ‘7성급 전망’이라는 금성산성이 있고 아래로 연동사와 저수지가 이어진다. 등산을 다니다가 절을 찾는 ‘등산불교’ 신도들이 많으니 절의 위치도 명당인 셈이다. 담양군의회 이규현 의원은 "원행이 고향 마을 후배라서 가깝게 지냈다. 만트라 공부를 많이 했고 국제명상센터를 세우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좀더 살았더라면 담양군과 연동사를 위해 의미 있는 불사를 많이 했을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황량한 폐사터로 남아 있던 연동사가 담양의 명찰로 다시 태어났다. 눈 밝은 사람들은 한 승려의 예술적 감각과 아름다움을 가꾸는 공력 그리고 법력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우리 술 답사기] 천년의 술 명주 탄생, 담양 ‘추성주’
농민신문 기사 입력일 : 2022-01-26
[우리 술 답사기] (27) 전남 담양 ‘추성고을’
대한민국 식품명인 양대수 대표 4대째 운영 국가지정 민속주 ‘추성주’ 명품화에 공들여
멥쌀 덧술에 약재 10여가지 넣은 후 발효 첨가재·증류방식 따라 다양한 제품 선봬
젊은이 입맛에 맞춘 클럽·홈술용 전통주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추운 계절에도 혼자 푸른 대나무를 뜻하는 사자성어다. 대나무는 사군자 중 하나로 변함없는 절개를 상징한다. 전남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한데 이곳 용면 추성리에 가면 한결같이 곧은 마음으로 4대째 술을 빚는 양조장 ‘추성고을’이 있다. 2000년 대한민국 식품명인(제22호)에 선정된 양대수 대표(64)는 천년의 술, 1990년 국가지정 민속주로 인증받은 <추성주(秋成酒·25도)>의 명품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양 대표가 처음부터 양조를 한 건 아니다. 그는 26년간 농협에서 일했다. 1대인 증조부 때부터 술을 빚었지만,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가업이 여러 번 중단됐기 때문이다. 그가 술을 빚기로 마음먹은 건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나서다. 농산물 판로 고충으로 농민들이 시름하자 어떻게 하면 쌀 소비를 늘릴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선조로부터 남원 양씨 가문에 전래된 양조 비법을 꺼낸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이 ‘가업을 이어라’였어요. 유지도 잇고 새롭게 다잡은 전통주 계승이란 소명 완수를 위해 술을 빚기 시작했죠. 퇴근하고 나서 혹은 잠까지 줄여가며 술을 공부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전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사실 <추성주>는 고려 문종 때(1060년)부터 마셨던 곡차(穀茶)가 그 원형이다. 당시엔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라 불렸는데 양 대표가 추성군으로 불린 전남 담양의 옛 지명을 고려해 손수 붙인 이름이다. 금성면 금성산성의 천년고찰 연동사에서 스님들이 쌀과 함께 추월산 자생약초를 원료로 빚었던 셈이다. 1대인 양 대표의 증조부는 신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주지스님이 술 빚는 비법을 알려주면서 지금의 술로 전해 내려오게 됐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얽힌 이야기도 많다. 늙은 살쾡이가 이를 훔쳐 먹고 사람이 됐다는 전설도 있고, 살쾡이가 훔쳐 먹는 모습을 모른 척해준 유생이 입신양명했다는 설도 있다. 또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과 백호 임제, 면앙정 송순 선생 등이 3일 내내 숙취 없이 이 술을 즐겨 그 소문이 한양까지 퍼졌단 일화도 있다.
<추성주>는 시간이 흐르면서 맑은 약주 형태의 발효주, 이를 증류한 증류주로 진화했다. 멥쌀로 덧술을 만들고 10여가지 약재를 첨가해 20여일 발효한다. 발효가 끝난 후 대나무 추출물(죽력)을 첨가하면 <대잎술(12도)>이 된다. 이 술을 감압식 증류기로 2번 증류하면 <타미앙스(40도)>, 도수를 낮추면 <추성주>가 나온다. 제품 모두 1000년 전 술을 고스란히 재현한 걸작이란 평가를 듣는다.
“<추성주>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신을 거듭했어요. 증조부께선 한약재 20여가지를 넣고 만들었는데, 지금은 갈근·구기자·상심자·오미자·두충·육계 등 10여가지로 바뀌었죠.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만큼이나 소비자 입맛이나 트렌드에 맞춘 상품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추성주>는 한약재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한모금 넘기면 산뜻한 알코올 향과 함께 한약 맛이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 쌍화탕이 떠오르기도 한다. 술 한잔에 언 몸이 절로 따뜻해진다. <타미앙스>는 <추성주>보다 도수도 높고 향도 더 진하다. 향긋한 약초향과 깔끔한 뒷맛은 ‘한국식 위스키’ 같다. 혀에 닿으면 달지 만도 않고, 쓰지만도 않은 다채로운 맛이 퍼진다. <대잎술>은 은은하고 순하다. 2020년 청와대가 선정한 추석 선물로도 유명하다. 더 특별한 술을 맛보고 싶다면 <대통대잎술>을 추천한다. 실제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대잎술을 넣은 술인데, 마실 때는 상단에 구멍 두개를 뚫어서 마신다. 대신 보존이 어려워 하루라도 실온에 두면 술 맛이 변하므로 반드시 ‘냉장 보관’ 해 마셔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다.
양 대표는 젊은 입맛에 맞는 다양한 전통주를 선보일 계획이다. 이미 딸기 리큐어(혼성주)인 <티나(16도)>가 클럽과 홈술용으로 출시됐다. 앞으로 전통주의 혼은 기능전수자로 나선 5대 아들 재창씨(39)가 이어갈 예정이다.
“올 상반기엔 담양에서 자란 백향과(패션프루트)를 넣어 만든 리큐어나 일본 청주(사케)에 버금가는 맑은 청주를 만들 계획이에요. 전통주라고 고루하기만 하면 안되잖아요. 세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우리 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명주 계승은 물론 자부심을 갖고 전통과 품위를 지켜가겠습니다.”
가격은 <타미앙스> 500㎖ 4만원, <추성주> 350㎖ 2만5000원, <대잎술 도자기 선물세트> 500㎖ 3만3000원, <대통대잎술> 700㎖ 1만9000원이다. 인터넷 ‘추성고을(chusungju.co.kr)’과 전화 주문으로 구입할 수 있다.
담양=박준하 기자
가마솥에서 덖고 비비고 말린 '야생본색'
[탐방] 야생의 찻잎 따서 수제차 만드는 담양 연동사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12.05.16.
깜짝 놀랐다. 차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차나무는 파릇파릇 새순을 틔우며 하얗고 소담스런 차꽃까지 붙들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사방에 차나무가 자라고 차밭이 펼쳐졌다. 요사채 앞도, 산비탈도, 계곡 주변도 온통 차밭이었다. 가지런히 정렬도 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잡풀을 뽑아준 것 외에 부러 가꾸거나 꾸민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약수터 옆 비탈을 붙들고 있는 차나무의 뿌리는 감탄사를 연발케 만들었다. 뿌리가 무지 굵었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모양새였다.
그 사이 주지스님이 차 한 잔을 권했다. 절집 주변에서 맘대로 자란 찻잎을 채취해 덖은 차라고 했다. 비료 한 줌, 농약 한 방울은 차치하고 제대로 된 관리 한 번 받지 않은 야생이 키운 것이라 했다. 그 말에 믿음이 묻어났다. 전기도, 전화도 부러 들이지 않은 절집이었으니까.
차 한 모금 입에 물고 혀를 굴리니 담백한 맛이 입안에 맴돈다. 으레 첫맛은 떫고 쌉사레할 줄 알았는데, 그 느낌도 없었다. 차의 은은한 향과 맛이 깊었다.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맛 그 자체였다.
스님은 "연동사가 깊은 산중인데다 계곡을 끼고 있고, 그래서 일교차가 큰 지역의 특성이 차나무가 자라는데 최적"이라고 했다. 찻잎을 따고 차를 덖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였다.
며칠 전,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통의 방식 그대로 찻잎을 덖어 수제차를 만들 것이라고. 모든 일 미루고 12일 절집으로 달려갔다.
절집 산비탈에서 찻잎 채취가 시작됐다. 그 일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산비탈에 짝발을 딛고 서야 하고, 한 잎 한 잎 따는 게 '뉘 나는(싫증나는)' 일처럼 보였다. 한참을 땄지만 큰 바구니의 밑바닥을 겨우 가릴 뿐이었다.
찻잎 채취는 찻잎을 씻어 비벼 먹은 점심공양 이후에도 한참동안 계속됐다. 오후 3시쯤 됐을까. 그때까지 딴 찻잎을 모아 차 만들기에 들어갔다. 찻잎 따는 일에 세 사람이 매달렸지만 겨우 큰 바구니 두 개밖에 안 됐다. 한나절 하고도 이렇게 힘든데, 날마다 찻잎을 따는 건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찻잎 덖기는 연동사 한켠에 자리한 가마솥에서 시작됐다. 먼저 가마솥의 온도를 430℃까지 끌어올렸다. 달궈진 가마솥에 찻잎을 넣고 몇 차례 저어 건져내 비볐다. 이번엔 가마솥 온도를 400℃로 낮춰 덖고 또 비볐다.
덖고 비비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가마솥의 온도도 조금씩 낮춰졌다. 380℃, 350℃…. 찻잎을 넣어 덖고 비빌수록 찻잎의 수분이 줄어들면서 색깔도 점점 변색됐다. 차의 형태로 짙어갔다.
찻잎이 타지 않도록 제때 넣었다 빼는 작업이 중요했다. 가열과 건조도 골고루 이뤄졌다. 모든 과정에서 차의 색과 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쳇말로 화장실 갈 새도 없었다.
자칫 찻잎의 일부라도 탄다면 그 냄새가 모든 찻잎으로 퍼져 몽땅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과정이었다.
덖는 일뿐 아니라 비비는 과정도 심혈을 기울였다. 찻물이 잘 우러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가 이 과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밀 때는 직선으로 쭈욱 밀어주고, 당길 때는 살짝 돌리듯이 동그랗게 말아주었다.
파릇파릇하던 찻잎의 수분이 어느 정도 제거되면서 색상이 짙어지자 찻잎을 털어주는 일이 더해졌다. 찻잎을 따던 일이 고달프다 여겼는데, 덖고 비비고 털어내는 과정을 보니 차라리 찻잎 따는 일이 한결 수월해 보였다. 찻잎 하나하나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덖고 비비는 과정을 거쳤다. 그 사이 처음의 찻잎 모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전통의 수제차가 완성된 것이다.
이젠 직접 따서 덖은 수제차의 맛을 볼 차례. 찻물을 끓여 뜨거운 물에 바로 찻잎을 넣고 우려낸다. 쓴 맛이 없다. 고유의 차맛 그대로다.
"연동사 수제차는 높은 온도로 덖어서 만든 거잖아요. 그래서 끓는 물을 식혀서 마실 필요가 없어요. 높은 온도에도 잘 견뎌 맛이 중화됐으니까요. 떫은 맛도 없고, 뒷맛은 달고, 맑은 여운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건 이 때문이죠."
수제차를 만든 김태경씨의 얘기다. 연동사 수제차가 귀한 대접을 받는 게 이 때문인 듯 했다. 야생에서 자란 찻잎을 하나하나 따서 사람의 손으로 정성껏 덖고 비볐다는 것. 자연 그대로의 야생에다 사람의 정성이 더해진 야생차의 맛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동사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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