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349년 무렵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현재 튀르키예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수덕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며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386년 사제품을 받고, 주로 안티오키아에서 사목하며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개혁하는 데 힘써 좋은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황궁에서 증오를 품고 시기하는 자들에게 밀려나 한두 차례 유배 생활을 하였다.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튀르키예)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교리를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로 말미암아,
‘크리소스토모’(금구, 金口: 황금의 입)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책망하며 그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있을까?
인도할 수 있지만 그들은 구렁에 빠진다.
그래서 인도자는 눈이 멀지 말아야 한다.
자기 뿐 아니라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도자에게는 그의 눈을 밝혀줄 등불이 필요하다.
우리를 그런 사람을 멘토라고 하고, 티모테오의 멘토는 사도 바오로였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의 멘토는 누구였을까?
예수님이었다.
바오로도 처음엔 눈먼 자였다.
그래서 그분을 모독했고 박해했고 학대했다.
그 결과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눈이 멀었고, 회개하여 다시 보게 되었으며,
성실하게 복음 선포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기에 인도자는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한다.
바오로가 믿음이 없어서 눈이 멀었음을 깨달았듯이
우리도 우리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내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겠는가?
먼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도 빼낼 수 있는 법이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내 속에 있는 커다란 허물은 뭘까?
그것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 수 있겠는가?
인도에서 전해진 교훈적인 내용 하나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를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한다.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친절하면 나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그렇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유쾌하고 좋은 내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한다.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6,41)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발견할 적마다
우리의 눈 속에 있는 티려니
생각하며 삽시다.
자매의 행동이 거슬릴 적마다
우리의 행동이
남들 눈에 그렇게 거슬리려니
생각하며 삽시다.
세월은
말없이 흘러가고
우리도
하느님께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보아야야 할 것은
남의 눈의 티보다
우리 눈의 들보입니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