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7-12)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말씀의 초대
에스테르는 누명을
벗을 길 없는 억울함 앞에서 주님께 간절히 의탁한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제1독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며, 하느님께서 지니신 부모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나라 아기의 7.3%가 선천성 기형아로 태어나는데, 이는 6년 전에 비해 2.4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일곱 살까지 본다면 아토피와 자폐,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 다운 증후군, 틱, 저능 등은 전체 30%에 육박한다. 아동들의 생리가 점점 빨라지고 키도 커진다.
신혼부부 열 쌍 중 한 쌍꼴로 불임을 호소하고 있다. 몸의 재앙이다. 고기와 빵, 과자와
콜라 같은 탄산음료까지 모든 식품을 추적하면 놀랍게도 옥수수, 콩, 밀 3대 작물이 원료임을 알게 된다. 농부 한 명이 수십만 평의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제초제를 견뎌 내는 ‘유전자 변형 작물’(GMO) 콩과 옥수수 개량종을 만들었다. 그것이 식용유 따위의 식자재로 방부제가 첨가되어
유통되며, 축산 사료가 되어 성장 촉진제와 항생제와 함께 소·돼지·닭 고기, 우유로 전 세계에 공급된다. 학교 급식에는 늘 튀김이 오르고,
과자와 음료를 입에 달고 살며, 치킨과 맥주를 이른바 ‘치맥’이라 부르며 신이 내린 음식이라 한다.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주기보다는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는 것이 덜 해로울 것이다.’ 전자레인지 또한
분자 구조를 충돌케 하는 원리로서 아주 나쁜 도구다. 여러 번의 변조 과정으로 식탁에 오른 음식은 체내에 ‘환경 호르몬’(내분비 교란 물질)으로
작용하는 것이니, 암과 기형성 질환이 없을 수 없다. 지난 6월의 국제 연합(유엔) 총회의 기조연설에서는 ‘정크 푸드’(즉석식품)도 담배처럼
규제하자고 했다. 결혼을 앞둔 이들은 몸의 섭생 정화 기간을 가질 일이다. 아기가 무슨 죄가 있는가? 부모가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독이 든 음식을 주고 전갈과 뱀을 먹으라고 할 수 있는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전에 깨끗한 음식부터 구하라!
혹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군대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벌써 군대 제대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니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더군요. 군 입대 후 훈련소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겠지만
당시만 해도 구타도 어느 정도 있었고 심한 기합도 있었을 때였지요. 따라서 어떤 실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날의 유격
훈련을 모두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가는데 바지춤이 헐렁한 느낌이었습니다. 바지를 바라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혁대를 죄어 고정하는
버클(buckle)이 없어진 것입니다. 가뜩이나 긴장되어있는데 이제 끔찍한 마음에 울고 싶었습니다.
그 뒤에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교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버클이 없는 상태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땅 바닥만 쳐다보았습니다. 혹시라도
떨어진 버클이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이틀을 땅 바닥만 쳐다보면서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흙속에 파묻혀 있었던 버클을
찾았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지요.
이틀 동안 저의
머릿속에서는 잃어버린 버클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훈련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주변 상황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집중이 결국 버클을 찾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관심 밖의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여 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단순히 청하는
기도를 하고, 단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한 내가 필요한 것을 얻게 해달라고 문을 살그머니 두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하고 열정적인 마음, 정말로 한 가지 오로지 집중하는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마음보다는 알아서 해 주기를 원하는 듯이 살아갑니다. 또한 몇 번의 기도만으로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문을 당장 열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앞에 기다려서 문이 열리도록 힘차게 두드려야 안에 계신 분이 열어주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언젠가는 열리겠지
라는 마음으로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문이 열렸어도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열정을 가지고 청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우리의
열정 가득한 마음을 통해서 환하게 열릴 것입니다.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켄 키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하루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목구멍에 가시가 돋는다고 생각하는 술꾼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존경하는 은사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밤을 새워 그 책을 모두 읽었다. 그 책에는 술이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 극약인가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단단히 결심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겠노라고....”
은사님께서 책을
선물로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술을 좋아하는 제자가 술을 끊고 새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제자는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술의 해악을 말해주는 책을 보면서, 아예 모르는 것이 낫다면서 책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지요.
술을 끊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말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구원의 길을 전해 주시지요.
그런데 혹시 자기를 구속한다면서 주님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이기정신부-
매스컴은 좋다고
사건들을 먹이고 부모들은 좋다고 재물을 먹이네요. 친구들은 좋다고 술 고기 먹이고 학교에선 좋다고 지식만 먹이고요. 태어나 클 때까지 좋다고
먹고 나선 인생건강 해치고 운명건강 잃더군요.
대자연은 우리에게
신선한 환경을 주지만 고마움을 모르고 한눈만 팝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지만 입 다물라 대항하며 귀 막아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귀 막고 돌아서서 엉뚱한 길 따르지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오
7,11)”
간절(懇切)하고
항구(恒久)한 기도
-이수철신부-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믿음의 표현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며,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웬만한 병은 '하느님'이름으로 다 고쳤다 합니다.
저
또한 불편한 몸 부위가 있으면 '예수님'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손을 대곤 합니다.
얼마전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 감실 옆에서 찍은 사진 역시 일종의 기도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몸과 맘의 기도를 통해 늘 주님 가까이 머물게 됩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몸의
건강에 선행하는 마음의 건강입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이 참 큰 병입니다.
동방수도승을
찾는 구도자가 그 스승과의 나눈 대화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
수도승이든,
은수자든, 세상 누구에나 해당된다.
우선
깨어 일어나면 그날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일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움으로 출발하는 훈련에 충실할 때,
그의
날은 기도 안에 있게 될 것이고 어떤 내적평화가 자리잡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화강석(granite) 같은 마음을 깨기 시작하는 길입니까?“
-그렇다.
첫 단계다.
바위같이
완고한 마음을 깨기 위해서는 큰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기도를
통해 마음을 부숴 달라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다윗
임금의
'하느님은
부숴지고 낮춰진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라는 시편 한 구절 처럼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성인들이 기도한 방법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그들의 마음을 부숴달라(crush)고 간청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내적자세를 가르쳐 주시며 1독서의 에스텔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참으로
백절불굴의 겸손한 기도의 자세,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래야
영적탄력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는지요.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조언을 청한다면 역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간다하면
말리진 않겠다.
그러나
가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체력이나
정신력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간절한 원의다."
도저히
나이나 체력으로보나 어렵게 생각되는 분들의 완주를 보고 깨달은 결론입니다.
위기에
처한 에스텔의 간절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순시기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수련에 참으로 적절한 은총의 시기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전례기도를 통해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부숴뜨려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마음의
치유에 저절로 따라오는 몸의 치유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시편138,3ㄱ참조).
아멘.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아채는 것이 기도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알거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오7,11) -김대열신부-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했을 때, 결과적으로 안 들어주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라며 반문하는 분도 계시리라 봅니다. 물론, 나 역시
결과를 보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그분의 마음에 속이 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내
예상과는 빗나간 결과였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청합니다. 그리고 반응 없으신
그분께 실망하고 곧 포기를 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청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신데,
내가 청하는 내용이
나를 망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실 리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들 때,
우선 나의 지향이,
나의 바람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옳지 않은 것이 옳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욕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하느님께 따지듯이,
강요하듯이 기도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내가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내가 그 길로
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130221)
< 죽음을
두려워하면 삶도 두려워한다 >
-전삼용신부-
프랑스의 어느
백만장자 구두쇠가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큰
부자였던지 자기 재물에 연연하여 날마다 그 재물에 기뻐하였습니다.
자기재물을 완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자기 집의 포도주 저장실을 깊이 파고 그 저장실에 다시 깊은 굴을 파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거기에다가 황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부자가
행방불명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살던
집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매각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매입한 사람이 지하실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그 속에서 먼저 살던 주인이 황금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들어갈
때는 그 문이 자동으로 닫힌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자들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돈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돈에
집착하는 것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삶이 행복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 세상에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녔던 이들은 대부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하고,
진나라의 시 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죽지 않으려고 경호원을 동원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먹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삶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세상에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삶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삶과 반대말로 여깁니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이지 삶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죽음이 삶의 맨
끝자락에 있기는 하지만 삶의 일부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테르
왕비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함하여 모두 죽이려는 함만의 계략에 정면대응하기로 합니다.
임금 앞에 당당히
나서 억울함을 토로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임금 앞에 나서면 왕비라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왕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이 죽음의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하는 왕비에게서는 전혀 두려움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어쩌면 왕은 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에스테르에게 반했는지도 모릅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민족을 구하려는 왕비의 청을 들어주고 함만을 처형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거둡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내어놓으니 많은 이들의 생명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삶 안에서도
많은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내가 죽음을
재난처럼 여긴다면 지금 삶도 재난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에스테르 왕비처럼 삶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행복이
아닐까요?
에스테르 왕비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자신은 평생 두려움에서 살고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죽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믿음을
방해하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끊어내고 오로지 주님 섭리에 맡기십시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참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입니다.
-조재형신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복음화 학교는 지난
25년 동안 같은
건물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건물
주인이 올해 10월까지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작년부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복음화 학교로
사용될 장소를 청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남산
쪽에 건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명동에서는 조금
멀어지지만 그 건물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매하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건물을 매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가톨릭 회관에
강의실과 사무실을 임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화빌딩의 시대를 넘어서 복음화 학교 설립 25년을 맞이해서
새로이 명동 가톨릭회관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열심히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봉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물의 결정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변한다고 합니다.
사랑해,
고마워,
감사해,
잘 될
거야,
너를
믿는다,
너를 지켜
줄께‘라는 말을 하면
물의 결정이 아름답게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워,
죽일
거야,
나쁜
놈,
싫어,
넌 왜
그러니‘와 같은 말을 하면
물의 결정이 심하게 찌그러진다고 합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물의 결정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못 하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동의 어느
공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소회장님은 그
마을에 신부님이 오시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우연히 주교님께서 그 마을에 오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 신부님이 오시기를 청하는 공소회장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교구청으로 돌아가셔서 다음 인사이동 때 그 공소에 신부님을 파견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이제는
공소회장이 다른 기도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소회장이 이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 공소에
신부님께서 오셨으니 예쁜 성당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또 몇 년을
기도하는데 서울의 독지가들이 기금을 마련해 주셔서 예쁘고 아담한 성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공소회장님의
기도 방법도 인디언들의 기도와 같았습니다.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연인
-인영균신부-
때때로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저 있는 것처럼 삽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결정하려고 전전긍긍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십자가
앞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두려움에 얼어붙기도 합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자상히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계심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요 나의 아버지이신 분이 계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시는, 우리 육신의 부모에 비할 수 없이 더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느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무한히 우리를 초월하시면서도 무한히 내 안에 내재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나의 아버지이시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누구도 이 사랑의 관계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의 연인입니다. 아가에서 보듯이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6,3)이니, 지금 당장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연인이신 하느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의 모든 갈망과 원의는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7)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청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청하십시오. 분명히 주실
겁니다. 그런데
잠깐! 내가 무엇을, 왜
청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나서 청하십시오. 아버지는 자식에게
좋고 유익한 것만 주시지 나쁘고 해가
되는 것은 주시지
않을테니까요.
찾을 것이
있으면 찾으십시오. 분명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 때문에 찾고자
하시는지요?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자다가 남의
봉창문을 두드리진 말고 어려운 이웃의 문을
두드리고 구원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무엇보다 나에게
청하고 나에게서
구하고 나의 문을 두드리는
이웃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는만큼 나도 받게 될
테니까요.
오늘 여러분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일이 풍성한
축복으로 그대로 이루어지길
빕니다. 아멘.
주님과 흥정하지 말라
-기경호신부-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지녀 아쉬울 것이 없어지는 걸 행복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청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거나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청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먼지에 불과한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 친히
연약한 우리에게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제1독서에서 왕비인 에스테르는 자기에게 닥친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기도를 드린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6,9-13)에서처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한다. 참된 청원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청해야 할 핵심적인 것은 오직 하나 성령뿐이고, 삶의 유일한 의미는 예수의 영의 얼굴을 찾는 일임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한다. “무엇보다 먼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수도규칙10,8-9) 그러나 이기심이나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물질, 건강, 영적인 것들 할 것 없이 청할 수 있고
청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자세로 청하는 것이 좋을까? 참된 청원기도는 내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여주시길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의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이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하느님 앞에서’ 청원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청원기도의 주요 목적은
요청하는 것을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원하는 이가 선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고 청함으로써 그분의 영과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있으며 그보다 더 우선 챙겨야
할 것이 있을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셔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도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믿는 마음으로
청하되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기는 것”이 바로 참된 청원기도의 자세다.
자기
것을 얻으려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심을 들먹거리며 흥정하듯 청하거나, 선행을 내세워 그 대가를 바라는 조건부적인 기도는 잘못이다. 청원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깊이 깨닫고,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청원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희생과 고통을 피하고 애덕은
베풀지 않으면서, 거저 주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착각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신다(7,11). 청원기도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 생각하고 내가 청하는 것만을 얻기 위한 기도는 결코 순수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의 혼인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헤아리시고 청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관대함’을 고유하고 나누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청원기도의 사회적 차원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청할 때도 청이 받아들여질 때도 주변을 둘러보고 모두가 행복해지고 하느님의 정의 안에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7,12)
-한상우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사순시기는
예수님
사랑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허약한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정스레
찾아드시는 가장
좋으신 예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우리는 감춰진
우리 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예외 없이 예수님
사랑을 체험하게
이끕니다.
기도는
자기방어의 수단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다시
일깨워주는 율법과
예언서의 본질적
정신인 사랑또한 기도의
실천을 통해 더욱
구체화됩니다.
참된
실천이란 서로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남이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건 기도와
실천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또한
없을 것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기도와
실천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기도의
때를 놓치지
않는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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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