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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묵상글 (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초월 싸움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7:27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아직 / 07:3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3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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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김신부님 아직 강론글을 올리시지 아니하였기
23년도, 24년도 부활 2주 목요일 강론글을 올립니다. (07:25)
2024.04.11. 부활 2주 목요일-초월 싸움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기들이 명령한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지도자들에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렇게도 묵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인데
다만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대통령이 옛날에 자기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이 멋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아마 대통령이 된 것도 이것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그를 보면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고,
모두가 자기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사람은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진정 훌륭한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순종에 관해 얘기하면 자기는 갓 들어온 수련자에게도
순종할 채비가 되어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사람에게 불순종할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입니다.
하느님 뜻과 다를 경우입니다.
우리가 받들어야 할 분은 가장 높으신 분,
하늘에서 오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우리 신앙인이란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 섬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에서 난 사람들과 달리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나 정치 무관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나 정치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함입니다.
일찍 자는 저는 어제 개표 결과를 보지 않고 잤고,
지금 저는 선거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지만 확인치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문제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일종의 초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복음화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내려가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관한 관심과 무관심 가운데서 초월 싸움을 하면서,
주님과 사도들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처럼
진정 복음을 들고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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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0. 부활 2주 목요일-복되고 고귀한 순종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주님께 대한 순종에 대해 얘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께 대한 순종에 대해 묵상하다가
주님께 대한 순종을 아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왜냐면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 개념조차 없는 사람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 그게 뭐야? 왜 하는 건데? 이러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런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 이전에
순종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뭘 안다면 복종이나 굴종을 알지
순종과 같이 고급스러운 것은 모를 것이고,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같이 거룩한 것은 더더욱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이 뭔지 알고
더 나아가 오늘 사도들처럼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까지 아는 우리는 참으로 복되고 고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는 것만으로도 복되고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순종을 실제로 산다면 얼마나 더 복되고 더 고귀하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위에서 내려오신 주님처럼
위로 하늘로 오르는 사람이기에 하느님께 순종하는 겁니다.
땅에서 기어 다니는 사람은 기껏해야 인간에게 순종하지요.
땅의 것밖에 못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보고 하느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 뜻에 따라 위에서 오신 주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신 것처럼
주님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께 순종하면 주님처럼 모든 것 위에 있고,
모든 것 위에 있기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가 땅의 산과 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자유롭게 강을 건너고 높은 산도 아래로 보고 넘어가듯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높은 사람도 아래로 보고 불순종하고,
낮은 사람에게도 하느님 뜻에 따라 순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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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자연의 설교를 들읍시다!
하느님의 숨
2025.04.30. 16:29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4월 30일 수요일 - 열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자연의 신학은 우리를 성장시켜 주고, 우리를 확장시켜 주며,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자연이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과 지혜를 반영해 주고 계시해 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앨버커키의 우리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 뒷마당에는 150년 된 거대한 리오 그란데산 코튼우드나무(미류나무의 일종)가 뒤틀린 가지들을 잔디밭 위까지 뻗고 있습니다. 어떤 식물학자가 언젠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그 거대한 몸통을 이렇게 둥글게 뒤틀리게 하는 일종의 변형 과정을 거친답니다. 이 나무가 어떻게 이리 굳건하게 서 있는지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 코튼우드나무는 우리 센터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 작품이며, 그 비대칭적 아름다움은 우리 센터의 핵심 메시지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완벽한 표본입니다: 하느님의 신성한 완전함은 정확하게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을 끌어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일을 하거나 어떤 신학을 가르치려고 센터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이미 이 나무의 거대한 현존이 우리에게 침묵의 설교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연 안에서 이와 같은 만남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에게는 그런 일이 호숫가나 바닷가에 있을 때, 혹은 등산을 하거나 정원에서나 도시의 번화한 거리에서 아침 비둘기들의 노래소리를 들을 때 있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만남을 하게 되면 우리 몸에 깊이 들어있는 선천적 신학이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우리를 성장시켜 주고, 우리를 확장시켜 주며,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줍니다. 이외에 다른 모든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는 이와 비교할 때 인위적인 것이고 머리로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것처럼 토착민 종교들은 대개 이 신학을 이해합니다(시편 98. 108. 148편 혹은 다니엘 3,57-82를 보시오. [1]). 욥기 12,7-10과 욥기 38장에서 39장 대부분을 보면, 야훼께서는 선천적으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이상한 동물들과 자연의 요소들을 찬미하십니다. - "바다의 문을 닫아 거는 일", "들나귀", "타조의 날개"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도 사방팔방으로 교훈을 주며 존재하는 훨씬 더 큰 생태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주제넘은 생각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한 피조물은 실제로 예수님더러(혹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더러) 자기들에게 신성함을 추가적으로 더 부여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빅뱅의 첫 순간부터 자연은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이 지니는 영광과 선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사시면서 다양한 자연 환경 안에서 삶을 누리시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본보기요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물을 존중해 주신 선물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섭리로 이루어지는 보살핌을 인간에게만, 그리고 그것도 인간들 중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한정지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참새와 백합, 당나귀, 들풀에게까지 확장시키시는 예수님(루카 12,24. 27-28)과 우리가 얼마나 다릅니까?! 여기에는 쩨쩨한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쪽에서 하느님의 관심사-심지어 영원한 관심사까지-를 우리 자신에게만 한정지으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쩨쩨한 일입니까?! 만일 하느님이 당신의 보살핌을 선택적으로 베푸신다면, 우리는 늘 안전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행운의 수혜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 절대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천성에 의해 모든 존재 안에 있는 관대하고 창조적인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내재하시는 성령을 모든 존엄성과 합당함의 내적인 원천으로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엄성은 어떤 것이 그것에 합당한지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엄성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토대 자체 안에 천부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오래 전에 영적인 여정을 시작했지만, 자연과의 교감(연결됨) 전혀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밀림 지대에서 비행사로 일하는 제 아들과 함께 단발-엔진 비행기를 타고 세렝게티 상공을 비행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제가 갑자기 저 밑에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순간 비행기 엔진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엄청난 감사의 정을 느꼈고 조용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이곳의 참관자가 아니야. 너는 어떤 존재 안에 있는 분차와 같이 이곳의 한 부분이야." 저는 우리가 모두 서로 간에는 물론이고 이 땅과도 이런 깊은 연결됨(교감) 안에 존재한다는 안도감을 참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llie M.
References
[1] This apocryphal passage is included in Catholic but not in Protestant Bibl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2021), 55–57; “God Is Not Only ‘Over There,’" Daily Meditations, April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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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나'의 바람만으로도 하느님은 정말로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숨
2025.05.01. 05:30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요한 복음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5,20).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아시고..."(13,3).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7,7).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드립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17,10).
"모든 것" 이나 "모두" 혹은 "다(all)" 라는 말은 아마도 일종의 하느님의 말씀 같기도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명을 한 번 봅시다.
"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하느님은 그 양이 얼마나 되느냐에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모두", "전부", "다"이면 그만입니다.
과부의 립톤 두 닢(아주 적은 양)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마르 12,44).
우리는 많이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모든 것, 전부, 다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창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면서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지금도 여전히 당신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인 바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성제를 통해서 실제로 당신 자신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내어 주시는 하느님(예수님)을 받아 모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다 드릴 때, 즉 우리가 우리 믿음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고 맡겨 드릴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블랙홀에 그 주변의 모든 것이 다 빨려 들어가 그곳에 시간이나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인 것 같지만,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 안에 빨려 들어가 그 모두가 하느님 사랑이 되는 상태, 즉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즉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섭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전적으로 그 섭리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온전함"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힌트를 토마스 머튼의 묵상 글, 즉 그의 믿음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번 나누어 드렸던 그의 묵상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바람(소망)은 당신을 실제로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은 그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분과 친밀한 관계성 속에 머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바람만이라도 갖고 있으면 된다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루카 17,6).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적어도 하느님 사랑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과 "우리가 믿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저 우리인 바, 즉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또 지금도 주시는 바를 깊이 인식하고 이를 투자하여 불리는 일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처럼 말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가 받은 그 엄청난 양의 선물에도 불구하고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비교하였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마태 25,24) 하며 불평하고는 그 한 탈렌트를 주인에 돌려 줍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인식하고 그 선물에 대해 감사하며 그 선물을 누리기에도 우리 인생의 시간은 부족합니다. 그러니 그 선물을 다른 이들의 선물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은 선물을 다른 누군가의 선물과 비교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은총이나 선물이 아니라 불만족의 씨앗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 전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 그릇에 맞는 양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전부가 우리에게는 우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선물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당신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능력을 갖고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어떤 학력을 갖고 있든, 그것은 하느님 전부에 비하면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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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타인은 지옥일까요?
한 가지 사회적 실험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20개의 지갑을 떨어뜨립니다. 이 지갑 안에는 돈과 명함이 있었지요. 이는 지갑 주운 사람이 주인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갑은 과연 얼마나 회수되었을까요?
사람들은 한 25% 정도만 회수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80%가 회수되었습니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지옥이 아닌 천국이 아닐까요? 어려움이 생겼을 때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도 말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어려움이 있을 때, 희생과 봉사, 나눔은 평소보다 더 늘어났습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당시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앞다투어 나눔을 실천했고, 봉사활동을 자처했습니다. 지난 의성-안동 산불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민들이 하루빨리 산불이 진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북 산불 피해 긴급 모금에 참여했고,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부정적인 말에만 귀담고 있기에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천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 증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5.36)
영원한 생명은 믿는 이에게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삶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삶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거부하고 멋대로 살아가는 삶입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반대편으로 가는 줄로 착각하고 혼자서 주님을 거부하고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믿는 삶,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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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희망은 우리가 소파에 앉아 손에 움켜쥔 채 행운을 비는 복권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문을 부수는 도끼 같은 것이다(레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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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믿음의 재발견”).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는 ‘순전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credo)라는 단어 역시,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네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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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있는 것을 찾으며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비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찾으면서 불평한다고 합니다. 본당의 전례에서 신부님의 따듯한 배려와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도 할 때도 신부님은 직접 선창하면서 교우들이 연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모 신심 미사에도, 성 시간에도 신부님은 교우들이 묵상할 수 있도록 성가를 선곡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정성을 다하니, 하느님께서 많은 봉사자를 보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마라" 그러자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심지어는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러 다시 나섭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들의 마음속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생명의 주님이라는 확신입니다. 그 진리를 경험하고 나니까, 세상의 권위나 명령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 법정에 서서, 사람들이 왜 자꾸 철학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악한 삶보다 죽는 것을 택하겠다.” 결국 그는 국가가 정한 법과 체제에 맞서 양심과 진리를 따르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 마르틴 루터도 있습니다. 그는 중세 교회의 권위 앞에서, 잘못된 신학과 부패한 관행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를 도우소서.” 그의 이 말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양심에 충실히 하고자 했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히틀러의 독재 앞에서 교회가 침묵하거나 순응할 때, 그는 신학자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은 동조다. 교회는 불의 앞에 말해야 한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고, 교수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지금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의 목소리로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을 통해서 인류의 가슴에 묻혀있던 양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단이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한 판결이 있습니다. 당시 재판관은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파면하지 않으면서 얻는 이익보다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권자의 권위보다 헌법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결정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지만, 국민을 위한, 정의를 위한,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시대도, 배경도 다르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진리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침묵을 강요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눈치 보지 않고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도들처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어두움 앞에서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의 양심이 깨어 있을 때, 세상은 희망을 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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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찬미 예수님
‘땅에서 난 사람은 땅의 것을 이야기하고 하늘에서 난 사람은 하늘의 것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들은 땅의 것을 말합니다. 즉 그들은 사리사욕과 자신의 이윤에 대해서만 늘 생각합니다. 그들 마음에서 희생이나 봉사, 나눔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땅에 관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난 사람은 다릅니다. 하늘에서 난 사람은 하늘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희생과 봉사와 나눔의 삶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말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들은 아드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믿었습니다. 하늘에서 난 사람들은 아드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생명은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우리는 땅에서 난 사람인가요? 아니면 하늘에서 난 사람인가요? 물론 하늘에서 난 사람입니다. 우리 이마에 하늘 시민의 인호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아드님을 알고, 그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시민인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선포하며, 하늘나라를 선포하면서.
⭐길 위에 있던 것들
예전에는 길 위에 참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판매하는 카세트테이프들의 판매 순위를
‘길보드 순위’라고 불렀습니다.
길 위에 공중전화도 있었고, 꼼장어와 우동과 잔술을 팔던
‘포장마차’도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달달한 커피 한잔을 건네주던 자판기
‘길다방’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걷던 그 ‘길’ 위에 있던 것들은 고단하고 퍽퍽한 하루하루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길 위의 작은 ‘위로’였습니다.
‘길보드’ 앞에서 흥얼거리던 친구들이 있었고, ‘포장마차’에서 하루를 녹이던 사람들이 있었고, ‘길다방’ 앞에서 동전 서로 넣겠다고 싸우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 우리와 함께 ‘위로’를 나누던 사람들이었음을, 그들이 하늘의 선물이었음을 추억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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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
“존엄한 품위, 부활의 희망, 영원한 생명의 기초”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 계절, 오늘 부터는 성모성월이 시작되는 5월 첫날입니다. 오늘 미사중에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서는 김종훈 루카 수사의 유기서원식이 있습니다. 예식중 수시페는 늘 불러도 가슴 떨리는 감동을 줍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계절의 여왕이라 칭하는 5월 성모성월에는 모든 어머니들이 성모님처럼 보이니 ‘어머니의 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돌아가신 '신마리아'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달이요, 더불어 지금은 '구암리카페'가 자리한 옛 고향집이 많이 그리워집니다. 얼마전 선종하신 성모님을 사랑한 프란치스코 교황님 유언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사제이자 주교로서 언제나 주님의 어머니, 복된 성모 마리아께 나를 맡겨왔다. 그렇기에 나는 육신의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안식하길 바란다.”
성모님의 달 성모성월 다음 성가 244장과 잘 어울리는 참 아름답고 싱그러운 계절 5월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노래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1절만 인용했지만 4절까지 전 내용이 깊고 아름답고 은혜로워 5월 한달 자주 부르려합니다. 어제 4월30일 본기도 역시 5월의 기도문으로 바쳐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인간의 존엄을 되찾고 부활의 희망을 안고 영원한 삶을 살면서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 행복한 달, 5월입니다. 요즘 수도원은 물론 대한민국 산야에 하늘의 별무리처럼 샛노랗게 피어나는 애기똥풀꽃들이 한창입니다. 어둔 음지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피어나 주위를 환히 밝힙니다. 아주 오래전, 무려 27년전 애송했던 '검정고무신'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예전에는 검정고무신을 상용했습니다.
“볼품없는 검정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1998.5.7.>
주님의 은혜로 하늘에서 오시는 분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삶을 누리게 된 우리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제가 애용하는 월력, 5월의 주제어는 천륜지락天倫之樂으로 부모형제등 혈족간에 잘 지내며 즐거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저의 일생과 함께 할 인연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주님 안에서 한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 대상이 되겠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근본이자 길이다.”<다산>
이래서 평생학인에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새삼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곧 사람이다. 사람과 사랑이 합해지면 그것이 바로 도道다.”<맹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중국 한자 성경에는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로 번역합니다. 그러니 도道는 말씀이신,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뜻하며 그대로 예수님과 일치된 우리의 복된 신원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우며 닮으려는 분,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드님을 믿어 순종하는 이는 영원한 생명에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이 베드로와 사도들이요 이분들의 담대하고 확신에 넘치는 명품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이 미사에 참석해 하늘에서 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주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하늘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이 지상에서 존엄한 품위의 영원한 천상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내 삶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존엄한 품위의 영원한 삶을,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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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25. 05. 01. 노동자 성 요셉
<하느님 닮은 사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일하시는 하느님
닮은
일하는 사람
이루시는 하느님
닮은
이루는 사람
돌보시는 하느님
닮은
돌보는 사람
베푸시는 하느님
닮은
베푸는 사람
섬기시는 하느님
닮은
섬기는 사람
살리시는 하느님
닮은
살리는 사람
일하시는 하느님
닮은
일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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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요한이 거듭 제자들의 교만을 억제시키다
벌레가 자기가 태어난 나무를 갉아먹고, 녹이 자기가 나온 철을 파괴하며 좀이 양털을 못쓰게 만들듯이, 교만은 그것을 키우는 영혼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교만에서 벗어나도록 애써야 합니다. 요한도 온갖 설득력 있는 논리로 제자들의 교만을 억제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증언을 대단하게 여긴 나머지 내가 증언하는 예수님보다 증인이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아 두어라. 하늘에서 오시는 분께서 지상의 증인 덕분에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스스로 완전하신 분으로서 비할 데 없으신 분이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현자들이 유대인의 어린 왕을 찾아 나서는 대목을 본문으로 삼아 이렇게 묻는다: 하느님과 사람의 합일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본문은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는 헤로데 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 그때 마침 동방에서 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였다(마태 2,1-2).
엑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탄생이 어디에서 얼어났는가를 눈여겨 보아라. 이 영원한 탄생은 영혼 안에서 일어난다. 더도 덜도 아닌 영원 속에서 얼어난다. 그는 설교 17에서 합일이 두 순간이 아니라 일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본 설교에서 합일이 일어나는 자리는 두 곳이 아니라 하나의 성소 혹은 하나의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잘라 말한다.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탄생과 영원 속에서 얼어나는 탄생은 같은 탄생으로서 영혼의 본질과 영혼의 터에서 일어난다. 이제 그는 어떤 장소보다 낫고,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이곳에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이 바로 영혼의 본질과 터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기도 하고. 영혼의 본질과 터이기도 하다. 설교 9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출산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베들레헴, 새로운 피조물의 분만실이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참 육회를 살피려면 외부의 시설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영혼의 본질과 터로 시선을 돌리라고 말한다. 우리야말로 새로운 베들레헴이다. 현자들은 바로 여기 우리의 한복판에서 신성을 찾는다.(380)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드디어 한 분의 주교가
파티마의 성모님 덕택으로 병이 나았다는 기적적 치유의 소식은 방방곡곡에 퍼졌고 가톨릭 신자는 거의 전부가 일치되어 교회 당국의 공식 성명을 바랐으며 이의를 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지경이었다.
성직자 편에서는 아직도 의견들이 달랐다. 다수의 성직자는 발현의 초자연성을 믿었고 그 중에는 개인적으로 순례단에 끼어 함께 기도한 이도 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직자는 발현 당시 리스본 주교좌에서 발표된 지시대로 아직 신중한 대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극소수이기는 하나 그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이 사건에 말려들어 위험에 처한 종교의 위신을 옹호한다는 구설하에 진실한 발현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도 해보지 않고 이 새로운 ‘미신’에 반감을 품는 자도 있었다.
주교 자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쪽이 진실인지 뚜렷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을 느꼈다. 왜냐하면 의혹과 논쟁을 정지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교는 자문하기 시작했다.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또한 사회적으로도 일대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성모님은 인류를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데 있어서 왜 이 작은 교구의 한 구석을 선택하셨을까 ? 그리고 성모님께서 실제로 이런 벽촌을 선택하셨다 해도 왜 옛날에 그러하셨듯이 당신의 사자로 이런 죄없고 신심 깊은 목동을 선택하셔야 했을까/? ’
이렇게 생각을 집중해 나가자 호세 다 실바 주교는 교구에 부임되자 즉시 진지하게 새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이 신심의 기초가 되어 있는 발현과 세간에 나돌고 있는 기적에 관한 문제를 조사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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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하늘에 계신 할 때 그 하늘은 어디를 말하며 그 곳은 어떤 곳인지.......
강만연 [fisherpeter] 2025-04-30 ㅣNo.181871
파랑새가 희망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은 그토록 찾던 희망은 그리 멀리 있지 않고 자기 주변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부르며 찾지만 그 예수님은 2000년 전에 계셨던 예수님도 아니고 그때 승천하신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 주위에 또 다른 모습으로 임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그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지만 그 하늘은 영어로 말할 때 스카이 하늘이 아니고 헤븐의 하늘입니다. 그냥 제가 한글음 표기로 했습니다. 그 하늘은 물리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하늘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이 계신 곳 그곳이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주객이 전도된 개념입니다. 저도 맨 처음엔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무척 어려웠습니다. 모든 게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라서 하느님이 계신 게 아니고 하느님이 계셔서 그곳이 하늘나라인 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이해하면 쉽지만 그 과정까지가 힘듭니다. 이 묵상을 한 건 오늘 서하 자매님 묵상글 잠시 보다가 묵상한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도 묵상을 했던 내용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느님을 기억하며 하느님 마음을 품으려고 하며 애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살아도 그 세월이 많이 남은 세월이 아닌데 그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도 그럴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버젓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건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거나 다를 바 없어 누굴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작은 하느님, 작은 천국을 보지 못하면 실제 천국을 간다고 해도 천국의 맛을 만끽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론적으로는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 교육에 종사를 해봐서도 압니다. 또 실제 학문적으로도 이런 걸 밝힌 내용도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영어를 지도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배운 학생이 제가 가르치는 내용을 새로 전달할 때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영어 교재를 보면 아직도 엉터리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교재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게 있을 때마다 그게 왜 잘못됐고 또 외국 언어학자들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이라고 수정해 지도를 해줘도 그게 입력된 사실이 오래되지 않으면 제가 새로이 수정된 내용을 빨리 올바로 수정돼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땐 이해를 하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존의 알고 있는 사실을 적용하는 걸 볼 때마다 느낀 것이 있습니다. 수학은 만약 이렇다면 그건 수치 때문에 수정을 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치는 수치로 결과가 증명되기 때문에 논리대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이미 '나'라는 '몸' 육신과 정신을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는 형질로 유전자를 바꾸지 않으면 그 유전자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유전자의 형질과 특징이 그대로 발현됩니다. 결국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스스로가 그렇게 되면 자신이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곳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곳에 가더라도 잘 살 수 있는 몸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영혼도 포함하겠지요. 사실 이해를 돕고자 몸이라 했지만 실제는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비 내리는 하늘 스카이에 계시지 않고 자신과 자신 주위에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여기서도 그런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실제 우리가 가게 되는 우리의 본향에서도 하느님을 잘 알아보지 못할 우려도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예수회 신부님 강론에서도 이런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신부님은 요한복음을 바탕으로 해서 영적인 설명을 가미한 것이었습니다. 한번 잘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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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한국 가톨릭 효과적인 선교가 되기 위한 방안. 마르코 형제님 기고문 번역
강만연 [fisherpeter] 2025-04-30 ㅣNo.181876
지금은 한국 천주교가 확고한 믿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데 최적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정에 가장 중요한 첫 단계가 우선 신자 각 개인의 마음이라는 토양을 경작하고 믿음이라는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각자 자신 속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없이는, 심지어는 뜨겁게 자신의 믿음을 공언하는 것은 허공 속에 빈 메아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증인 신자들에게서 어떤 심오한 영감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들은 확고부동하게 그들의 믿음을 전합니다. 외부적인 판단이 전적으로 배제된 상태에서도 말입니다. 그들이 신교인(개신교인)들이라든지 아니면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의 영향 아래 있었던 집단과 상관없이 우리는 똑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형제자매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더 풍요로운 영적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초대하려고 하는 우리의 열망과 가톨릭 공동체의 따뜻한 포용 속으로 각자 그들을 맞아들이려고자 한다면 현명하고 효과적인 복음선교 전략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노력과 귀중한 시간이 헛되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심도 깊은 고려사항들
효과적인 복음선교는 단순한 수치상의 성장을 능가합니다. 복음선교는 세상에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는 신성한 여정입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1. 신앙 교육의 강화와 구현, 구체화
피상적인 지식 전달을 넘어서서 우리는 철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이 심오한 가톨릭 교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삶 안에서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형태로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 교리문답 수업, 영성피정의 형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자신을 발견하려는 탐구도 하며 성찰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2. 사랑의 공동체와 예배 구현
단순히 말로 복음이 선포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진실된 사랑과 헌신으로 서로를 섬김으로써, 다양한 전례 활동에 참여하는 봉사를 함으로써,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공동체 그 자체가 살아있는 증거로 되기 위해 신자가 이를 담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함께 나누는 실천은 세상에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게 가장 강력한 복음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증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3. 현 당면한 문제 가운데 의사소통 수단에 대한 탐구
급변하게 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효과적인 복음선교는 다양한 미디어와 의사소통의 매체의 활용성을 필요로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 사회 미디어와 문화 예술들,다양한 여러 채널들을 통해, 우리는 폭넓은 대중에게 가톨릭의 아름다운 메시지를 호소력있게 전해야 합니다. 또한 상호이해와 공감도 상호 양자 사이를 더 발전하게 해 줄 것입니다.
4. 개방과 상호 존중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복음화하는 데에도 문을 닫는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며 상호 존중으로 가톨릭 신앙의 가치를 진심으로 공유하여야만 합니다. 겸손과 진정한 품위는 깊은 대화와 이해를 위한 비옥한 토대를 제공하게 되고 마음도 열게 해 줍니다.
5. 문화적 배경 속에서 복음화
복음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실이지만, 복음이 전달되는 방식은 일반적인 시대와 문화도 고려해야 합니다.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고 존경하면서, 복음이 이런 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스며들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현명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문화와의 조화로운 합일점을 찾는 것도 포함하고 한국인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 관심 사항들이 복음에 기반을 둔 또 하나의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고 뒷받침될 때 한국 천주교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 넓게 선포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면서 좀 더 성숙하고 영적인 공동체로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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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can Koeran Roman Catholic missions be effective?
Now is the opportune moment for the Korean Roman Catholic Church to sow the seeds of the Gospel with unwavering confidence. The most crucial initial step in this journey is to first cultivate the soil of each believer's heart and establish deep roots of faith. Without an unshakeable conviction in one's own belief, even the most fervent proclamations risk becoming mere echoes in the void. We can draw profound inspiration from the Jehovah's Witnesses, who steadfastly propagate their convictions, undeterred by external judgment. Whether they are Protestants or long-standing members of the Catholic fold, we are all brothers and sisters serving the same God. However, if our aspiration is to invite them to experience a richer spiritual life within the Catholic faith or to welcome new individuals into the warm embrace of the Catholic community, a wise and effective evangelization strategy is paramount. This implies a need for thoughtful deliberation to ensure that our precious time and effort are not spent in vain. Further Considerations for Deeper Reflection: Effective evangelization transcends mere numerical growth; it is a sacred journey to reveal the true value of the Gospel to the world. To this end, we must dedicate ourselves to the following multifaceted endeavors: 1. Deepening and Internalizing Faith Education: Moving beyond superficial knowledge transfer, we must provide in-depth educational programs that enable believers to grasp the profound meaning of Catholic doctrine and embody it in their lives. This can take various forms, including Bible studies, catechism classes, and spiritual retreats, empowering believers to actively nurture their faith through self-inquiry and reflection. 2. Embodying a Community of Love and Service: The Gospel proclaimed merely through words lacks potency. By genuinely serving one another with love and dedication, and by actively participating in service activities that illuminate the darker corners of society, believers must ensure that the Catholic community itself becomes a living testament to the Gospel. Warm concern for neighbors and the practice of sharing will deeply resonate with the world, providing the most compelling evidence of the Gospel's authenticity. 3. Exploring Communication Methods Relevant to the Times: In a rapidly evolving modern society, effective evangelization necessitates the proactive utilization of diverse media and communication methods. Through online platforms, social media, cultural arts, and various other channels, we must appealingly convey the beautiful message of Catholicism to a broad audience and foster mutual understanding and empathy through two-way communication. 4. Adopting an Open and Respectful Stance: Exhibiting a dismissive attitude towards those of other faiths is akin to closing the door to evangelization ourselves. We must listen to their stories with open hearts and sincerely share the values of the Catholic faith with mutual respect. A humble and genuine demeanor will open hearts and provide fertile ground for profound dialogue and understanding. 5. Presenting the Gospel Within a Cultural Context: While the Gospel is a timeless truth, the manner in which it is conveyed must consider the prevailing times and culture. Understanding and respecting the unique values and sentiments of Korean culture, we need a wise approach that allows the Gospel to permeate and take root naturally within this context. This may involve finding harmonious intersections with traditional culture or offering Gospel-based solutions to the concerns of Korean life. When these diverse efforts are organically connected and sustained, the Korean Roman Catholic Church will stand as a more mature and compelling spiritual community, effectively propagating the message of hope to the world and widely proclaiming the love of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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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목수 일로 성가정을 굳게 지킨 요셉 / 노동자 성 요셉[0501](마태 13,54-58)
박윤식 [big-llight] 2025-04-30 ㅣNo.181875
요셉 성인은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다. 목수 일을 한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 받는다. 요셉은 의로운 이었다. 그는 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서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기 예수를 보호하려고 멀리 이집트까지 피해 갔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했다.
노동자의 몫으로 추앙받는 이들은 많다. 요셉이 목수였다면 베드로는 어부, 바오로는 천막 짜는 일을 했다. 그런데 왜 특별히 요셉을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정했을까? 이는 그가 예수님의 양아버지였다는 점이다. 예수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그를 목수의 아들이라 하찮게 여겨, 그분에게서 지혜와 기적의 힘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의아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가 예언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처럼 요셉 성인은 가난한 목수이자 노동자였기에.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 말하였다. “저 이가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그는 목수의 아들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고? 그리고 야고보, 유다 등 다 그의 형제들 아닌가? 더구나 그의 누이들 모두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가 어디서 저런 것들을 얻었지?”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의 삶의 터전 고향 분들은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께서 고향에서 지혜의 말씀을 주시지만, 오로지 의심만 한다. 그들의 놀람은 출신이 낮은 이가 출세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리라. 그러니 은총이 함께할 수 없었다. 편견에 묶인 선입관을 깨지 못하면 기적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교회는 해마다 오늘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정해 신성한 노동의 의무를 수행하는 근로자들의 노고를 기린다. 그들의 땀 흘린 노동으로 우리는 이제 원조 받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도와주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 받고 있는 성인의 의로움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게다. 고난의 길만을 걸으셨기에. 요셉 성인은 그 고비 고비 어려운 선택의 길에도 정말 그 작은 한 마디 대꾸 없이, 그분은 성모님처럼 순종만을 하셨다.
어쩜 인간적으로 보면 요셉 성인처럼 힘드신 이도 없었을 게다. 그에게는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동정 생활을 하는 데는 참으로 큰 희생이 따랐으리라. 그러하기에 성인은 매우 위대하면서도 철저히 뒤에 숨어서 성가정을 이끈 분이시다. 그러니 뒤에서 침묵하신 성인의 겸손을 더욱 닮아야 하겠다. 세상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과시하려고 학력, 경력 막 부풀린다. 그럴수록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성인마냥 늘 한결같아야만 하겠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마냥 놀랍기만 하다. 그분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성인을 그저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 양아버지였기에 만은 아니다. 단순히 목수였기에 그런 건 더더욱 아니다. 성인은 평생을 성가족 지키면서 묵묵히 일하며 사셨다. 성경 어디에도 단 한 마디 그 어떤 말씀도 남기지 않으시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그 길만 가면서 성가정을 지키셨다. 그리고 끝까지 성모님 배필로 성가정 지키시며, 예수님의 그 가시밭길을 따라 그 길 만을 사시다 가신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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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드님 믿는 이에게는 영생의 기쁨을 / 부활 제2주간 목요일(요한 3,31-36)
박윤식 [big-llight] 2025-04-30 ㅣNo.181874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를 냉정히 분석,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려면 그 쪽 전문가에게는 최소한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고 땅의 것만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신 분은 그분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하늘 일’을 알아보려면 의당 그곳에서 오신 분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로 들어보고 묵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신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그분만이 온전히 아신다. 문제는 그분 증언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리 없다는 거다. 막상 그것을 확인하려 해도 난감할 수도. 신앙의 증거는 오직 스스로의 체험으로만 가능하기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널리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게다. 진리는 결코 만들어지거나 몇몇의 생각으로만 정의되는 게 아니다. 진리는 모든 이에게 의당 받아들여지고 가치와 논리에 타당해야 하니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만을 하신다. 그분께서는 늘 한량없는 성령을 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얻지 못하고 하느님의 진노만이 머무르게 된다. 믿음은 그분께 경외심을 가지면서 정의와 사랑의 이 두 속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게다.
20세기 지성인으로 무신론적 철학자요 뛰어난 문필가인 프랑스의 사르트르는 신앙 없어도 인간은 족히 선할 수 있다며 종교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던 그가 임종 시에는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온갖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단다. 결국 그는 마음의 평화를 잃은 채 고통스럽게 죽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리라.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외친 그의 말로가 왜 그토록 비참했던가?
그는 왜 괴로워하며 죽어야만 했던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다소의 실망과 아쉬움을 담은 어느 독자가 기고한 내용이다. ‘사르트르는 분명 신앙인이 아니다. 그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것은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에.’ 무신론자의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안에만 있기에 밖에서는 열 수 없단다. 천사가 도우려고 문을 수도 없이 두드려대도 결코 열 수는 없으니까.
우리 주위에서 우리가 그토록 모시고자 다가가도 피하기만 하는 분도 이처럼 마음의 문이 늘 굳게 잠겨 있기에 그럴게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게 대단히 어려울 게다. 사르트르는 뛰어난 지성인이었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비참했던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도, 그 값진 희망도 없었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세상에 너무 얽매여 ‘하늘나라’에 대해 소홀하지는 않을까?
예수님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 후에 복음이 보편적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확신했기에, 주어진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기쁘게 복음을 전한 것이리라.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도처에서 왜곡되고 은폐하며 만들어 내는 거짓 내용에 당당히 맞서야만 할 게다.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무고한 죽음을 이겨 낸 십자가에서 드러난 부활의 기쁨을, 진리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널리 선포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늘 기억해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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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나누신 대화(요한 3,1-21 참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아드님이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태양’과 같은 분이신데, 오늘 복음은 그 큰 빛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은 마치, 해가 떠올라 세상이 환한데도 창문에 커튼을 치고 방에 들어앉아 어둠을 쫓는다고 촛불을 켜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오랜 장마 뒤에 뜨거운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산뜻하게 덥힐 때 창문을 활짝 열어 햇볕을 쬐는 대신, 문을 닫아걸고 굳이 보일러를 돌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제힘으로만, 제 잘난 것으로만 살 수 없는데도 자신의 부족함과 가난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는 꼴이지요.
빛 앞에서 방어하고 저항하며, 자기 혼자서도 잘해 왔노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 미약한 힘자랑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넘실거리는 은총의 바다를 앞에 두고 겨우 쫄쫄 흐르는 실개천인 자신을 뽐내며 하느님 앞에서 위세를 부리는 격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를 두고 ‘어리석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악하다’고 말합니다(3,19-20 참조). 그들은 생명을 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3,36 참조).
이는 윤리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영적인 평가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자신은 충분하다며 더 받아들이고 배우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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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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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이제 숨죽이며 살지 말자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서하 [nansimba] 250501 10:26 ㅣNo.181891
부활 제2주간 목요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 3: 34)
때론 말씀이 겉돌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고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3:36)
이런 표현은 무섭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
우리를 향한 사랑의 숨결입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여
우리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주신 성령 때문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지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숨 쉬게 분과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나와 '나를 살게 하는 분'을 연결해 주시는 성령은
보이지 않는 숨처럼
'나와 너' 사이를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머물고 계십니다.
끊어진 듯한 마음을 다시 잇고,
메마른 심장을 다시 뛰게 하며,
우리를 사랑과 생명으로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느님의 숨을
한량없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숨죽이고 살지 맙시다.
다시 편안히 숨 쉬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먼저 숨을 멈추셨고, 다시 숨을 내쉬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숨을 의식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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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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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제 널리 알려져 역사에 길이 남게 된 명대사가 있습니다.
한때 너무 멋있어서 어떤 분들은 홀딱 반해 잘도 속아넘어갔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말의 원조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정말이지 사도들이야말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꽃이 잠시 피었다가 시들듯이, 사람이란 존재 역시 영원하지 않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신 분, 충성을 다하고 철저히 순종해도 실망하지 않을 대상이신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봉독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성령의 은총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도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권력자들이나 적대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전전긍긍하거나 하고싶은 말도 못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낮에 광장에서 자신들이 온몸으로 체험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강렬한 성령 체험,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생생한 인격적 만남은 사도들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스승님께서 항상 함께 해주실 것을 굳게 믿은 사도들이기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깝지 않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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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서 무작정 먹어서
‘돼지’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히로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습니다.
그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그냥 돈으로 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치히로는 부모가 돼지가 되어버리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름을 잊어버립니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투명해집니다.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돼지가 된 부모를 되돌리기 위해서. 이것이 일의 중요성입니다.
오늘은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목수’라는 직업으로 소개됩니다.
그가 목수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양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요셉에게 일이란 것이 예수님과 성모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일에는 항상 ‘양식’이 따릅니다.
양식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일하셨습니다.
부활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왜 일하려고 하셨을까요?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 먹는 과일은 선악과가 됩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라고 말하며 일과 먹는 것을 연관시킵니다.
바오로에겐 먹는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 일인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 됩니다.
왜 먹는 것과 일이 직결될까요? 양식 안에는 사명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튜브에 엄마들이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평소에 먹던 음식을 준비해서
몰래카메라로 식당에서 음식을 대접했을 때 자녀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의 음식은 피가 서려 있습니다.
그 피가 양식이 되게 합니다.
양식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합당한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은 정체성을 주고 정체성은 사명을 줍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서도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이유는 성체를 양식이 아니라 음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봉헌금을 냈으니 당연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봉헌은 내가 받은 것에 대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이지, 그것이 성체의 값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느끼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성체에서 말씀하실 때, “그럼 제가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성체는 당연히 일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하느냐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제대로 영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식의 목적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에 뉴스에 경찰관이 불이 난 집에 홀로 계신 할머니를 구한 일이 나왔습니다.
마치 가족과 사회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져 합당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양식은 물론이요, 시간과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그 사회에 속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먹으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갈 힘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존재들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것에 감사하다면 그 열매를 맺어야 당연합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재능, 기회, 은총 = 일종의 '양식')를 가지고 수동적으로 있거나 숨겨둔 종과 달리, 이를 활용하여 '일하고' 이윤을 남긴 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그분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책임(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일'을 강조합니다.
양식은 ‘어머니의 도시락’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왜 싸 주는 것입니까?
공부하라고 싸 주시는 것입니다.
도시락을 통해 자신이 어머니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 정체성이 없다면 부모의 자녀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자녀입니다.
각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에 합당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둘을 거부하면, 먹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고,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일하지 않아도 돼지처럼 그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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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31-38: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은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간다.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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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노동자 성 요셉 기념미사 강론>
<노동은 ‘사랑’이고,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사랑’이고, ‘선한 일’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선한 일도 아니고, 사랑도 없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벨탑을 쌓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창세 11,1-9).”
벽돌을 구워 내고, 그 벽돌로 성읍을 세우고 탑을 쌓는 일은, 겉으로만 보면 분명히 ‘노동’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그래서 ‘악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셨고, 그 일을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들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공동선도 없고, 이기심과 탐욕만으로 하는 일들은 ‘선한 노동’이 아니라 ‘죄’입니다>
2)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나자렛 사람들의 말과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는 반응을 보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했고,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라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천한 사람은 특정 직업을 천시하고
업신여기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농부’로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하느님을 ‘농부’로(노동자로) 표현하신 것은,
노동의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이 농부시라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은 농사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심판’을 ‘추수’로 표현하고, ‘구원받는 것’을 ‘열매 맺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다
하느님의 농사에 연결됩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농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추수의 기쁨은, 농부이며 노동자이신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4)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 5,7-8.10-11ㄱ).”
신앙생활은, 추수 때의 기쁨만을 생각하면서 여름 동안 논과 밭에서 묵묵히 고생하는 농부의 생활과 많이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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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3,31-36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위’ 즉 하느님 나라와 ‘땅’ 즉 이 세상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질적이고 유한한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세상과 그리고 거기에 속한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영혼을 지니고 있지요.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내 안에 심어주신 뜻을 찾고 따르면 그분께서 나를 처음 만드셨을 때의 선하고 완전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몸이 세상에 속해있다고 해서 마음과 영혼까지 세상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언젠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인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며 그 나라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위에’라고 번역된 부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abobe all”이 되는데, 이는 가장 중요하고 귀한 ‘한 가지’를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지요. 그러므로 하늘에서 오신 분, 즉 주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말씀은 그분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않고 초월하여 계신다거나, 그분께서 계시는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그분의 뜻과 가르침을 지키는 것을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에서 주님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살면서 마주하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주님께 우선권을 내어 드리는지, 지금 내 삶에서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성찰해봐야 합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우리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루 종일 세상만 바라보고 있으니, 내 모든 주의와 관심을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지에만 기울이고 있으니 그 밖의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지요. 그래서인지 저도 가끔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말수가 적어집니다. 주택, 주식, 재테크, 사교육 등등 그들이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끼어들 수가 없고 홀로 ‘외딴 섬’처럼 멀뚱멀뚱 앉아있다 오곤 하지요. 물론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관심과 생각이 세상을 향해 있으면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욕망과 집착이 이끄는대로 걸어가다보면 자신이 멸망 한 가운데에까지 깊숙이 들어간 뒤에야 뒤늦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때 후회해봐야 이미 때는 늦습니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무거운 책임은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위’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마음에서 덜어내고, 주님께 머무르실 자리를 내드려야 합니다. 그 동안 하고 싶은 것, 좋아보여 욕심 나는 것을 먼저 하느라 내 마음 속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로 밀려나신 하느님께 다시 ‘앞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일’을 먼저 하고 시간이 남으면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들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고 그분 뜻 안에 따라 ‘세상의 일’을 하려고 노력하면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이끄심에 따라 가장 좋은 결실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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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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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낯선 나를 새롭게 만나기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많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면서도 익숙한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의 작용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부활의 삶은 어쩌면 니코데모와는 달리 낯선 자신을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닐까?
오늘 복음의 대목은 니코데모 일화에 나오는 육과 성령의 대조에 바탕을 두면서(3,1-21),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대조하고 있다. 곧 ‘땅’과 ‘위’가 서로 분리되고 구별되듯이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사람’도 대립되어 있다(3,31).
그러나 여기서는 대립적인 존재 상황보다는 천상과 지상 사이에 놓인 엄청난 거리를 시사하고 천상과의 관계 속에서 지상이 상대화되었을 뿐이다. 곧 지상이 천상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3,31)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일치하시므로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에 놓인 모든 인간들보다 뛰어난 절대적 우월성을 지닌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쏟아 부음으로서, 그분을 따라 그분을 통하여 교회가 베푸는 세례이다. 반면에 요한의 세례는 ‘물의 세례’일 뿐이며 빛의 그림자일 뿐이다. 요한은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 거기서 출발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뿐이다.
우리도 위로부터 성령에 의하여 새로 나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아갈 수도 하느님과 일치될 수도 없다. 새로 나지 않으면 결국 육의 영을 따르게 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게 되어 자기분열, 자기상실, 공허, 자기소외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알 수 없어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결정적인 길이요, 나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길이다. 또한 나를 아는 것이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다. 나를 알고 진정으로 만나려면 기도해야만 한다. 그분의 빛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35-36)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결속관계로 언급되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곧, ‘한량없이’(3,34) 선물로 주어진 사랑이며,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내주는’ 사랑이다. ‘그의 손에 내주셨다’란 말은 온갖 진리를 계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심이며, 그분의 몸짓은 하느님의 몸짓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3,11) 예수님의 삶을 실제로 따르는 것까지도 뜻한다(8,12).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면 죽음과 어둠만이 남는다.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사는 자들은 그 본성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하는가? 어디에서 시작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 ‘거듭 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선택, 배척이 아닌 포용, 완고함이 아닌 너그러움, 자신을 위해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내놓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낯설고 인정하기에 어색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새롭게 보기를 주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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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복음 내용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좀 헷갈립니다. 어제로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담화는 끝을 맺고, 뒤이어 잠시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요한 3,22-30)이 나오더니 곧 오늘의 대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계속되는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복음사가의 직접적인 해설이 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문맥상으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와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위"와 "아래", "영"과 "육",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가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모든 것"은 하늘의 일과 세상의 일 모두를 포괄합니다. "하늘에서 온 이, 곧 사람의 아들"(요한 3,13)만이 이 모두를 아우르실 수 있지요. 그분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모두 갖추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은 당신 스스로 만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요한 3,35)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보내어진다는 것, 파견을 받는 것은 보내신 분, 파견하신 분의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현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당신 뜻대로 하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요한 5,1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런데 그렇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고 현존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사랑"입니다. 아드님에 대한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니면, 권위나 명령만으로는 절대 불가할 일입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과 최고의회 구성원과의 대립이 급박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도들이 풀려난 지 몇 시간만에 또 잡혀온 겁니다.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 당신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사도 5,28) 그들은 자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있습니다.
보내신 분의 목소리가 사도들의 심장에서 요동을 치는데 누가 이 성령의 거룩한 충동을 억누르고 사랑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만, 보내어진 이, 파견된 이의 심장이 되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 이해 못할 일탈일 뿐인가 봅니다.
"피에 대한 책임"
사실 이 아픈 표현은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빌라도 앞에서 유다인들 자신이 온 백성과 함께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하고 외친 적이 있지요. 사도들은 헤로데와 빌라도,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것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건만(사도 4,27-28), "무식하고 평범한" 사도들의 담대한 선포와 행보에 당황한 유다인 지도층은 자기 내면에 자리한 죄책감이 이 말을 소환하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보내어진 이, 파견받은 이는 보내신 분, 파견하신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엔 달리 할 말도, 할 일도 없습니다. 그 존재가 이미 파견하신 분의 것이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만일 거기에 자기 것, 제 이름과 명예와 업적을 섞게 되면 보내어진 이로서 그의 소명은 빛을 잃고 한갓 "사람의 일, 세상 일"로 전락해 버릴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고 사도로 파견된 이들 중에 초심을 잃고 자기 영예를 추구함으로써 그 은사를 잃어버리고 추락하게 된 이들을 우리 주위에서 가끔 보게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받은 은사와 그 은사를 통한 영적 · 사도적 결실 앞에서 끊임없이 더욱 겸손해지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는데 소홀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깨어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영성체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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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1. 노동자 성요셉.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우리의 인생을 진정 복 되게 하는 삶
<2025.5.1>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9:1~16절)
❝우리의 인생을 진정 복 되게 하는 삶❞
❚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복 있는 삶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복 있는 삶입니다(1~3절).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이 순서대로 각 구절의 첫 자음으로 사용된 알파벳 시편입니다. 119편은 한마디로 하면 말씀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편과 더불어 대표적인 ‘토라의 시’로 규정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하게 찬양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이 고백 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인생의 참된 복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면 가장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인생이 복된 인생(2절)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인생의 참된 복이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복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기에 불의를 도모하지 않습니다(3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온갖 불의에서 멀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복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전부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기자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말씀에 순종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님의 도를 행하는 사람이 참으로 복 있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의롭고 완전하며, 오류가 없으며, 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아들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진정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냄이 복 있는 삶입니다(4~8절).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해 법도와 계명과 율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이 명령하셔서 법도를 지키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주님이 자신의 길을 굳게 정하셔서 주님의 율례를 지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4~5절). 왜냐하면 주님의 계명에 주의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때문(6절)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의로운 판단을 배우며 정직한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주님의 율례를 지키겠다는 결단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7~8절).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주관자가 되실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의 주어가 하나님이 되실 때, 그 기도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을 때, 견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순종하기 위해 애쓸 때, 우리 인생에서 실패와 실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부끄러운 일,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 앞에서 감사와 결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더 많은 것들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기초로 하여 우리의 삶의 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로잡고, 그 말씀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세속적 욕심과 불순종의 죄악에 회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내는 삶을 통해 진정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함이 복 있는 삶입니다(9~16절).
시인은 청년이 자신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고백(9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을 말씀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10절). 또한 시인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다...”(11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입술이 변해야 합니다. 찬송과 말씀이 입술로 선포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실 것(12~13절)입니다. 그럴 때에 기쁨의 기준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재물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주님의 도를 더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14절)입니다. 영적 부유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15절)하며,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잊지 않는 삶(16절)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순종할 때,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경건한 삶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함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하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9: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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