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월) 이사야 8:16-22 찬송 428장
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개역 개정)
- 예언의 봉함 명령과 거짓 예언의 경계 -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7:3), 마헬살랄하스바스(8:3),
그리고 임마누엘(7:14)의 징조를 근거로 결국 멸망하게 될
북이스라엘·아람 연합군을 두려워하여 앗수르 제국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하스가 거절함으로써 급기야 모든 예언을 봉함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16-18)
이처럼 하나님의 예언을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그 내용의 공개 시기가 이르지 아니했을 때
예언을 인봉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경우를
우리는 성경에서 종종 발견하게 된다.(렘51:69; 단1:4; 8:26; 계10:4 등)
물론 이런 경우에 있어서 예언을 봉함하라고 한 것은
예언의 취소가 아니라 예언이 성취되는 날, 그 증거로 삼기 위한 보존이다.
즉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악인이 진멸되고 남은 자들이
그 뜻을 깨달아 여호와를 더욱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날이
이르기까지 예언의 말씀은 보존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예언의 봉함 명령이 주어진 것이다.
한편 19-22절에서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거짓 선지자나 우상 숭배자에게 예언을 구하는 일을 엄히 경계하고
그러한 자들에 대한 엄중하고 비참한 멸망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이는 세태가 험악하고 어두울수록 오직 진리와 빛이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참구원과 생명의 길임을 교훈하는 것이다.(요14:6)
또한 이러한 본문은 주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항상 지켜 행하는 자에 대한 축복 약속(신31:26; 수1:8)과
그 말씀을 경히 여겨 더하거나 감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의 경고(계22:18,19)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교훈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기억시켜 준다.
17절)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여기서 ‘야곱의 집’이란 구약 선민 이스라엘, 그중에서도 유다를 가리킨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신다’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는 것을 얼굴을 비치는 것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을 얼굴을 가리우는 것으로 묘사한다.(욥13:24; 시10: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유다에 대하여 그 얼굴을 가리우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
유다는 전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유다가 그동안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유다를 향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까닭이다.(민6: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면
유다는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는 유다, 보호하시지 않는 유다는
맹수 앞에 놓인 어린양과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강대한 이방 민족에게 찢기고 삼킴을 당할 수밖에 없다.
실제 유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우셨을 때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먼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후에 당할 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즉 유다는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러 온 나라가 앗수르 군대에 의해 초토화되고
예루살렘마저도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그런데 17절에서 이사야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유다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회복의 소망을 잃지 않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그의 소망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소망을 가지겠다고 한다면
그 또한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는 어리석은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징조이다.
유다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스알야숩, 마할살렐하스바스,
임마누엘 징조를 통하여 유다를 완전히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셨다.
이사야는 바로 이 징조들에 주목한 것이다.
즉 그는 이러한 징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비록 불순종하는
유다를 징계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금 그 은혜의 얼굴을 비치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회복의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바로 이사야와 같은 태도이다.
우리는 다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아주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놓일 수 있다.
구원의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여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놓이게 하실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소망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시3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