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99
1월10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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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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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0LfcvVoRmo
[광주대교구 권다혁 다미아노(삼각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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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오랜 세월 익숙하게 사용되어온 병의 명칭들이 환자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나 차별적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기에, 최근 대대적인 변경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에 몽고증이라고 했었는데, 특정 인종을 비하한다는 지적에 WHO는 병의 발견자 이름을 따 다운증후군으로 바꾸었습니다. 간질이라는 질환은 어감부터가 좋지 않고, 사회적 낙인을 찍는 표현이기에 뇌전증으로 변경했습니다. 정신분열증은 마음의 조화가 깨어져 온다는 의미로 조현병으로 바꾸었습니다. 치매 역시 다분히 부정적 이미지가 크므로 인지저하증으로 바꾸기 위해 논의 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역시 발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찾아낸 사람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 공식 용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경 말씀 안에 차별적 언어, 낙인을 찍는 언어가 남아있지는 않은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의 증세는 꽤 심각했습니다. 균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마땅한 치료제도 없던 시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깊어져 가는 상처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 조금씩 사라져가고 떨어져 나가는 자신의 신체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즉시 하는 일은, 혹시나 밤사이에 기적이 일어나서 내 몸이 나은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자신의 피부를 만져 보았습니다. 즉시 역시나 하며 좌절하며 들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은혜롭게도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계신 고을로 찾아갔습니다.
율법 규정상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뵙자마자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을 어기십니다. 그와 접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환자의 절박한 처지, 경탄할만한 적극성, 예수님을 향한 굳센 믿음, 그 결과는 즉각적인 치유와 구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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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zoe-_0pO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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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얻기 위해 조건을 거는 일은 괜찮을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듭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치유는 회복입니다. 그런데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은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원숭이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든 인간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는 인간은 앞으로 그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어진 법칙대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피부병약을 짓고 의사가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계속 마시겠다고 하면 약을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해로워질 수 있습니다. 치유와 순종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로 엮여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치유와 같은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뜻에 더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치유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 그러한 조건을 다는 게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를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심으로 순종을 배울 자세가 되었다면 더 빠른 치유를 주실 것은 같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의 귀족이자 군인이었으며, 1521년 전투 중 대포알에 의해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으면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붙자, 이냐시오는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하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의사에게 순종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긴 회복 기간에, 이냐시오는 오락거리를 찾았으나 집안에는 종교 서적만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성인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는 점차 깊은 영적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제된 고요함과 신체적 회복의 시간은 그에게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가 의료 권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듯이, 그의 영혼도 신적인 영감에 순종함으로써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필요성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적·영적 치유의 이중 과정은 이냐시오에게 겸손과 권위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혁은 그를 예수회 창설과 영신 수련 집필로 이끄는 깊은 영적 여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의 경험은 고통 속에서도 순종이 어떻게 깊은 치유와 새로워진 삶의 목적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는 1202년,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아시시로 돌아왔지만 심각한 쇠약과 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회복 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 갈등도 겪었고, 자신의 과거 세속적 삶의 공허함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을 치유해 주시고 삶의 목적을 명확히 해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의 자유, 야망,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이나 조롱을 받아야 한다 해도 이를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치유와 율법의 준수는 하나입니다. 요한 9,1-7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치유해주시는데, 그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야만 치유가 완성되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보다 더 큰 목적은 순종을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2열왕 5,1-14에서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는 순종을 강요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게 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엔 거부하지만, 그 말에 순종하게 될 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히즈키야의 치유(2열왕기 20:1-11)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어야 할 운명인 히즈키야가 눈물로 청원하자 그의 생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치유의 과정은 곧 순종의 과정입니다. 만약 치유의 은총이 있고 난 뒤에도 순종보다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면 치유가 은총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를 원하기 전에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먼저 드립시다. 그러면 분명 더 빠르게 치유해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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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부터 스마트폰의 액정이 화면이 꺼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액정의 화면이 아예 안 나오면 스마트폰 사용이 어렵습니다. 대리점엘 갔더니 삼성전자에서 지정해 준 수리 업체로 가라고 했습니다. 지정 업체로 갔더니 3주일은 걸린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3주일 지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대리점에서 중고 휴대전화를 빌려주어서 심 카드를 바꿔서 임시로 사용했습니다. 이번에도 깜짝 놀라서 삼성전자에 다니는 형제에게 연락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스마트폰을 가져가서 1시간 만에 수리해 주었습니다. 접히는 스마트폰은 접히는 부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도 문제가 생기면 연락 달라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지난 대림 특강에서 신부님은 새로운 병을 이야기했습니다. ‘핸떨병’이라고 합니다.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지면 깨질 것 같아 걱정이고, 핸드폰을 잃어버릴까, 생각하면 또 걱정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핸드폰이 손에 떨어지는 건 걱정하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건 별로 걱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고 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떠오르는 상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주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희망의 별, 믿음의 별, 사랑의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겸손의 별, 나눔의 별, 희생의 별입니다. 그런 별을 충실히 따르면 주님의 성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권력의 별, 재물의 별, 명예의 별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별은 어떤 별일까요? 그것은 욕망의 별, 분노의 별, 질투의 별입니다. 그런 별을 따르면 바로 옆에서 주님의 성탄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구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구유에 누워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구유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누추한 곳입니다. 그곳은 가난한 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곳은 굶주린 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곳은 병든 이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병든 이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구유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성공한 이, 권력을 잡은 이, 재물이 많이 이와 함께 하려 합니다. 그런 이와 함께 하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 탄생의 구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공현을 대하는 복음서의 시각은 조금씩 다릅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 아들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전합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러 가면 아담이 나오고,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신학적인 의미를 담아서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예수님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을 예수님의 족보에 넣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임금 다윗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바빌론의 유배를 견디고 예수님께서 태어났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5명의 여인을 넣었습니다.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타마르는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아버지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도와 베들레헴에 정착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는 지혜로운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죄인 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가족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 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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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2-16: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지엄한 권능과 나병 환자의 굳은 믿음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 환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겸손의 표시이다. 그는 자기 상처를 내보이며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이 간청 속에 이미 믿음이 충만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2절) 주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결함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나병 환자 치유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일부로서, 그분은 신성으로는 능히 병을 다스리고 당신의 인성으로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뻗으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환자의 간청을 받아 주시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감추지 않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3절) 또한 당신의 전능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신다.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지고 환자의 괴로움도 끝났다.
나병 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데 대한 예물을 바치라는 분부를 듣는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의 법규에 따라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또한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보여주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그분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도, 예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 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 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자녀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주님께 의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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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온몸이 나병에 걸린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부정한 자로 여겨져 마을 바깥에 살아야 하는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5,13) 그러자 곧 나병이 나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상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지만 모든 병자를 고쳐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성사적’입니다. 치유 기적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치유되기를 바라시고 또한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평안하듯이 그대가 모든 면에서 평안하고 또 건강하기를 빕니다.”(3요한 1,2)라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영적 구원, 현세의 부귀, 건강이라는 세 가지 축복이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며, 이러한 삼중 축복(삼박자 축복)만이 참된 복음이며 복음의 진수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여정은 성사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하는 요한 묵시록의 다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4) 완전한 치유와 위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뵙는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지상의 순례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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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카 5,12-16)
1) ‘깨끗하게 하다.’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메시아 예수님은 인간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깨끗하지 않은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깨끗했는데,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면서(로마 5,12), 더럽혀진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인간들을 원래의 상태로 원상복구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예수님 덕분에 깨끗해진 사람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묵시 22,12-14)
그러나 깨끗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묵시 21,8)
3)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원래의 상태로 원상복구하는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깨끗하게 해 달라는(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그 병자가 아직 예수님의 자비를 모르고 있고,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은 믿지만 자비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두려워하기만 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과 권한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권능과 권한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해지기를 원하고 청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그것을 원하시고, 그 은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구원받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나보다 먼저, 또 나보다 더 간절하게 ‘나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이 말씀에서 두 번이나 사용된 ‘바랍니다.’ 라는 말은,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깨끗했던 원래 상태로 원상복구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의 구원을 원하고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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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나병이라는 병을 육체적 결핍으로만 보는 시선은 잠시 접어 둡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놀라워하며 초인적 능력이라 칭송하는 마음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나병을 겪는 이의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
세상의 손가락질보다 더 힘든 것은, 자신의 모습과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나병 환자는 낫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 자기 자신의 회복에 예수님의 마음을 초대합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는 도대체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는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마음에 의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
예수님께서는 끌고 가시는 지도자가 아니라, 함께하시는 동반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시기보다 우리의 마음속 이야기를 먼저 듣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제 이야기를 터놓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터놓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려 눈치만 느는 것이 세상살이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유다 사회도 사제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윤리와 법률을 다듬고 보존하고 되새겼습니다. 다만 공동체의 윤리와 법률에 어울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거부와 차단만이 주어졌지요. 말하자면, 윤리와 법의 이름 아래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있어 서로 단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제에게 보여야 하는 것은, 깨끗해진 몸이 아니라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몰골로도, 이런 나약함에도, 이런 비참함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소중히 여겨 주는 또 다른 마음을 얻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는 따뜻한 복음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함께하는 마음이라 늘 따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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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육체적 정신적인 질병마저 죄로 보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여기며 멀리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단죄 하기보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멀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헤아리기보다 주님께서는 치유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청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구원의 손을 우리에게 내밀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아픔이 없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제각기 다른 아픈 사연 하나씩은 품고 삽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는 말씀대로 치유된 나병은 복된 아픔이 됩니다. 치유되지 않은 죄와 질병은 고통과 불행만 주지만, 깨끗해진 죄와 질병은 복된 아픔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죄와 상처에 둔감합니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상처를 모르기에 치유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마치 몸 안에 자라는 암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이나 상처를 모르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숨겨진 암과 같은 자신의 잘못과 상처를 발견하고, 주님의 손을 잡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암처럼 퍼진 내적인 어두움을 알아야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지만, 우리는 거부하며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병에 걸린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거울을 매일 보아도 더럽다는 것을 모르고 삽니다. 때로 거울이 더럽다는 것을 알지만 무시하여 닦을 시간을 내지 않습니다. 얼굴을 볼 수 없을 때까지 때가 묻은 거울을 보며 삽니다. 어둠에서 살고있는 자신을 모르거나 부정하며 우리는 삽니다.
자신의 때가 묻어 아픈 곳을 알아야 우리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나병환저의 갈망을 하게 됩니다. 치유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고백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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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우울함에 왜 그런지 모르겠다면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절대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사람의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 부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 번째는 날라리입니다. 날라리는 즐겁게 사는 것에만 집중하기에 우울증을 모릅니다. 그래서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합니다.
두 번째는 뺀질이입니다. 뺀질이는 자기 사랑이 지독해서 남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만 즐겁고, 자기 몸만 편하게 됩니다. 당연히 일도 안 하고, 모든 의무와 책임을 거부합니다. 우울증을 앓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은 띨띨이입니다. 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는 게 늘 즐겁습니다. 우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이 괜찮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행복하지만, 주변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걸린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이 정신과 의사는 말씀합니다. 저 역시 때로는 우울합니다. 아마 저도 조금 괜찮은 사람인가 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병이 과연 100% 자기 탓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탓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때로는 열심히 사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스스로 자책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안의 좋은 점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은 무조건 자기 탓이었습니다. 자기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고칠 수 없는 병의 경우는 아주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죄책감도 있었을 테고, 죄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책하고,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길 원하신다는 것, 따라서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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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루카 5,12-16 (나병환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믿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희망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진실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착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아름답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올바르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부드럽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굳건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함께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섬기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살리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시니
제가 당신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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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으로 물러가>
많은 사람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6) 기도를 통해 나의 속을 보게 되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협상이나 강요, 흥정이 아니라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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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치유의 구원>
-주님과 만남의 여정-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로우시다.”(시편 112,4)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신선합니다.
“회복이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확실하게 결별하는 것이다.”<다산>
이것은 회복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새롭게 주님을 만나는 이들에게는 늘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군자는 바른 성정을 회복함으로써 뜻을 조화롭게 하고, 좋은 무리를 따라서 그 행실을 이룬다.”<예기>
주님을 따르는 좋은 도반들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나병환자를 고치시다”라는 주제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의 구원을 받은 나병환자가 상징하는바 우리 약하고 병든 우리들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란 말마디가 그 병의 심각성을 알립니다. 중요한 사실은 나병환자가 절망하여 자포자기함이 없이 절박한 믿음으로 주님을 찾았고 만났다는 것입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니, 그대로 예수님께 대한 전적 신뢰의 표현입니다. 일방적인 주님의 기적은 없습니다. 치유의 구원에 선행하는 병든 자의 간절한 믿음입니다. 그대로 주님과의 만남인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이런 절박한 자세로 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주님께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만나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시니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십니다. 왜 오늘날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순전히 우리의 믿음 부족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스킨쉽, 능력의 말씀이란 세요소가 나병환자의 믿음과 하나되어 일어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늘 강조하시는 치유의 구원에 결정적인 하느님의 세 특징, 친근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이 잘 드러납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을 만나는 목적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는 것, 둘임을 깨닫습니다. 둘인 듯 하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치유의 구원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지만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주님이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유혹됨이 없이 즉시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신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우리에게는 참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나병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온갖 영육의 질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야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마음과 몸은,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빛을 잃고, 기쁨을 잃고, 평화를 잃고 죄의 어둠 중에 방황함으로 마음이, 정신이, 영혼이 병들 때 뒤따르는 육신의 갖가지 병들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니 영육의 병에 대한 근본적 처방은 단 하나, 주님을 찾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 우리의 희망, 우리의 빛,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했던, 늘 바쳐도 늘 새로운 행복기도문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사도 요한도 제1독서에서 영적승리의 삶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역할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설파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은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실 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실 때, 그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모시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한 두 번 만남으로 치유의 구원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생명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배우고 회개하고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배움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시며, 치유의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네. 하느님이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1요한 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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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증거자가 될 것인가? 떠버리가 될 것인가?>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가 믿음으로 한 청원을 흔쾌히 들어주시어 나병을 즉시 낫게 해 주십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이나 청원에 나무랄 것이 없고, 주님의 치유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이 이제 중요합니다. 그다음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가서 치유된 몸을 보이고 예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지 말라!
이것에는 당신의 신성을 감추려는 뜻도 있지만 뒤에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 치유의 증거가 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치유되었을 때 하느님 치유의 증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의사에게 가서 치유를 받았을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내 병이 치유되었다고,
어느 의사가 나를 치유해줘서 병이 치유되었다고, 떠들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 달려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의사를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자의 증거 방식입니다. 물론 의사에게도 감사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치유의 도구로서 역할을 잘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사이신 예수님도 당신이 고쳐준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고쳐주신 거라고,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에게 말로 증거 하지 말고 몸으로 증거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역시 말로 하느님을 증거 하지 말고 존재로 증거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병 환자는 그동안 나병으로 받은 설움 때문에 내가 이제는 병이 다 나았다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치유해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 하기보다 자기가 치유 받은 것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 받은 다음 나병 환자가 어떻게 했는지, 주님 말씀대로 함구했는지 떠들고 다녔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문이 점점 퍼졌다는 것을 보면
나병 환자가 주님의 올바른 증거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 나병 환자의 치유 얘기는 나는 과연 하느님 증거자가 될 것인가? 나를 인정받으려는 떠버리가 될 것인가? 자문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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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하여라."(루카5,13ㄴ)
<마음의 나병!>
오늘 복음(루카 5,12-16)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ㄷ)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것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사건'이며,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치고 살리는 분이심을 알려준 사건'입니다.
'나병'은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병'이었습니다. '몸의 지체가 문드러지는 문둥병'이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전염성이 강한 병이었고, 불결한 병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소외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육신의 나병이 있듯이, '마음의 나병'도 있습니다.
마음의 나병은 '마음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소외된 병'입니다.
'내 마음 안에 성령의 열매들(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이 아닌 육의 열매들(교만, 탐욕, 인색, 음욕, 분노, 질투, 게으름)로 채워진 병'입니다.
'죄중에 있는 상태',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의 병'이 곧 '마음의 나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 5,5)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이기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마음의 나병을 몰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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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 13)
차고도 맑은
겨울 바람이
다시
아침을 엽니다.
하늘 나라의
깨끗한 소식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병고는
깨끗하게 됩니다.
고치지 못할 것이
없으신 하느님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치유로
아픈 우리는
깨끗한 기쁨을
다시 맛봅니다.
미처 알아내지
못한 아픔까지
맡겨드립니다.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깨끗해지는
기쁨입니다.
깨끗한
복음의 길이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새로워진
삶입니다.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삶의 참맛은
지금부터입니다.
두려움을 빼고
절망을 빼면
다시
깨끗해지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없다면
우리의 생활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다시 깨끗이
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이 춥고도
맑은 오늘을
다시 기쁘게
기도하며
다시 기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자신을
치유하십니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깨끗이
치유하는
깨끗한
치유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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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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