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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 수고’…실패한 혁명가, 사상가로 승리하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 수고’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맞서 싸운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였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1891~1937)의 <옥중 수고>는 이 기획에서 가장 이채로운 저작이다. 그 까닭은 이 책의 기원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초고가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널리 읽히기 시작한 것은 <옥중 수고 선집>(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1971)이란 제목으로 영어로 출간된 1970년대 이후였다. 이 책과 함께 서구사회에선 ‘그람시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사상가다. 사상가의 삶에서 그만큼 극적인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는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힌 그는 수감 생활의 여파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옥중 수고들은 전후 정치·사회사상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헤게모니, 시민사회, 진지전, 포드주의, 유기적 지식인, 수동적 혁명, 역사적 블록 등 그가 주조한 개념과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가 정치·문화적으로 어떻게 재생산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선 어떤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지에 대해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새로운 통찰을 안겨줬다.
<옥중 수고 선집>이 출간된 이후 그람시 사상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지구적으로 진행됐다. 서구사회는 물론 비서구사회에서 그람시주의자를 자처한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람시의 발견으로 인해 전후 사상은 더욱 풍성해졌을 뿐만 아니라 세련된 정치적 대안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람시는 비록 혁명가로선 실패했지만, 정치·문화적 사유의 영토를 확장시킨 사상가였다.
■헤게모니에서 포드주의까지
우리말로 된 <옥중 수고> I·II의 원제목은 <옥중 수고 선집>이다. 그람시는 감옥에 갇혀 있던 1926년에서 1935년까지 대학노트 32권에 2800쪽이 넘는 방대한 초고를 남겨 놓았다. 이 초고들 가운데 마르크스주의에 새로운 영감과 통찰을 안겨준 수고들을 선별해 편집한 저작이 <옥중 수고 선집>이다. 이 책은 ‘역사와 문화의 문제’, ‘정치에 대한 노트’, ‘실천 철학’으로 나누어져 있다. ‘역사와 문화의 문제’는 ‘지식인’, ‘교육에 관하여’,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로 이뤄져 있고, ‘정치에 대한 노트’는 ‘현대의 군주’, ‘국가와 시민사회’, ‘미국주의와 포드주의’로, ‘실천 철학’은 ‘철학 연구’,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문제’로 구성돼 있다. 제목들에서 볼 수 있듯 그람시는 종합 인문학자이자 사회과학자였다. <옥중 수고 선집>에서 다뤄지는 그람시 사상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는 그가 주조한 개념들인 헤게모니, 시민사회, 진지전, 그리고 포드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시민사회’와 ‘헤게모니’는 그람시 사상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개념들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의 상부구조는 강제의 영역인 좁은 의미의 ‘국가(정치사회)’와 ‘사적’이라 불리는 유기체들의 총체인 ‘시민사회’로 구성된다. 그가 이렇게 상부구조를 국가와 시민사회로 구분한 것은, 부르주아 지배가 억압적 국가기구만을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다양한 제도 및 실천(교회, 학교, 언론 등)을 통해 유지되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란 바로 이 시민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지적·도덕적 지도력의 행사를 통해 창출하는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말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대표저작 <옥중 수고>.
그람시가 헤게모니를 주목한 까닭은 이탈리아에서의 사회주의 이행 전략의 모색에 있었다. 시민사회가 허약한 러시아에선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인 ‘기동전’이 중요한 반면, 시민사회가 강력한 서구에선 시민사회 안에서의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한 ‘진지전’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포드주의’는 그람시의 또 다른 독창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191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자본주의 생산방식인 포드주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노동계급이 계급적 자의식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그람시는 분석했다. 이렇게 그람시가 주조한 개념들이 오늘날 널리 쓰이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이론과 사상은 1970~80년대 서구 지식사회와 정치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람시 르네상스와 그 이후
<옥중 수고 선집>의 출간은 그람시 르네상스를 가져 왔다. 그람시의 이론과 전략을 둘러싸고 이탈리아 안과 밖에서 이론적·경험적 논쟁들이 이뤄졌다. 대표적인 논쟁들을 소개하면, 이탈리아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와 프랑스 철학자 자크 텍시에르는 시민사회 개념을 중심으로 상부구조에 대한 그람시 독해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영국의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과 밥 제솝은 헤게모니 이론의 영향 아래 대처리즘의 성격 규정을 놓고 논쟁을 진행시켰다.
그람시 이론의 핵심이 경제의 중심성을 강조하는가, 아니면 문화의 자율성을 중시하는가도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가 전자의 입장을 내세웠다면, 벨기에 출신의 정치학자 샹탈 무프는 후자의 견해를 부각시켰다. 그람시 사상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재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이론가이자 정치가인 피에트로 잉그라오는 헤게모니와 대항헤게모니의 대결장으로서의 시민사회에 주목해 대의민주주의와 기층민주주의의 유기적 결합을 현대 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논리는 그리스 출신의 정치학자 니코스 풀란차스는 물론 환경·여성·평화의 신사회운동들과 브라질 노동자당 이념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낡은 내용이 적지 않지만, 그람시 사상의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의 숙명적인 특징이 강제와 동의에 있는 한, 헤게모니와 대항헤게모니에 대한 그람시의 통찰은 21세기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과 대안 모색에 여전히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한국어판 저작은
영어 <옥중 수고 선집>은 이상훈 대진대 교수에 의해 <옥중 수고> I·II라는 제목으로 옮겨졌다. 감옥에 갇히기 전 쓴 글들을 모은 <옥중 수고 이전>은 김현우와 장석준에 의해 번역됐다.
■그람시와 한국사회 -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본격 소개…최장집, 선구적 연구
1980년대 민주화 시대가 시작된 후 한국사회에서도 그람시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한국 현대 정치의 구조와 변화>(1989))과 임영일 전 경남대 교수의 ‘그람씨의 헤게모니론과 이행의 문제틀’(<국가, 계급, 헤게모니: 그람씨 사상 연구>(1985))은 선구적인 연구들이었다. 최장집 교수가 <옥중 수고>를 중심으로 헤게모니의 정치이론을 분석했다면, 임영일 교수는 헤게모니와 진지전·기동전을 중심으로 그람시의 변혁이론을 조명했다.
(왼쪽부터)최장집, 유팔무, 김성국.
(왼쪽부터)최장집, 유팔무, 김성국.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유팔무 한림대 교수의 ‘그람시 시민사회론의 이해와 한국적 수용의 문제’(<시민사회와 시민운동>(1995)) 역시 작지 않은 관심을 모은 연구들이었다. 김성국 교수가 그람시 이론에 내재된 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유팔무 교수는 그람시가 경제적 조건 및 계급의 중심성에 입각해 시민사회론을 전개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한편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 초반 진행된 시민사회 논쟁에서 ‘그람시를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시민사회와 시민운동>(1995))는 반론을 통해 그람시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그람시 시민사회론이 피지배계급의 사회운동을 부르주아 국가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부르주아 국가가 정한 규칙에 따르는 사회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는다고 비판했다.
그람시의 삶과 사상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책으로는 김현우의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 수고와 혁명의 순교자>(2005)를 꼽을 수 있다. 이 책은 그람시가 자본주의 국가의 복잡성과 견고성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이러한 분석에 기반을 둬 새로운 변혁 전략을 모색해 간 과정을 추적했다. 그람시 사상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다.
<옥중 수고>, <옥중 수고 이전>과 함께 우리말로 옮겨진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이 서한집은 ‘지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을 소유한 그람시라는 고결한 영혼을 만나게 한다. 전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 서한집이 “무덤 속에서 삶의 빛을 잃지 않으려는 그람시의 노력이 가장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몸짓”을 담고 있다고 격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