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륜은 그녀 자신이 니르는 것보
다 더 정확한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륜은 알았다.
[케이건 드라카의 헛니름을 믿으시는 것이군요. 이건 쇼자인-테-쉬크톨
이 아닙니다. 누님이 죽는다 해서 제가 살아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헛니름이라기보다는 헛소리라고 해야겠지. 그리고 나는 북부의 왕이
다. 내가 어디에 있어야겠어?]
[북부지요. 누님. 제발 돌아가세요! 대호왕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됩니
다. 하텐그라쥬를 공격한 자들 가운데 대호왕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 누님은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륜. 우리는 이미 돌아와 있어.]
륜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닐렀다.
[우리가 추방되듯 떠나와야 했던 낙원에 이렇게 돌아왔구나. 뼈를 얼리
고 살갗을 딱딱하게 만드는 추위 대신 찬란한 햇빛이 종일토록 쏟아지
고, 비탄을 불러일으키는 불모의 황야 대신 아름다운 나무들이 가득한
땅. 그림자 속에서도 춤추는 열기를 발견할 수 있고 밤은 침전하는 목향
에 물드는 곳. 이곳이야말로 나가의 낙원이겠지.]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키보렌은 낙원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낙원에 돌
아와 있어.]
[갈라졌던 두 개의 칼날이 하나로 합쳐져… 도대체 그게 무슨 니름입니
까? 바라기요?]
[나를 읽은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게 무슨 니름인지 모른다는
것도 알겠지. 하지만 대충은 알 것 같구나. 나는 너와 만난 것이 즐거
워. 무엇보다도 즐거워. 네가 키보렌을 떠났을 때 나는 너를 쫓아 키보
렌을 떠났어. 그리고 네가 북부를 떠났을 때 나는 다시 그곳을 떠나왔
어. 세상의 어느 곳이 낙원이지? 낙원은 어디에 있지? 륜. 내가 낙원에
있다면 그건 네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야.]
[누님.]
[일어나, 륜. 일어나! 그렇게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지마. 내가 안
을 수 있게 일어나.]
륜은 일어났다.
사모는 천천히 그를 포옹했다.
그 포옹은 힘겨운 포옹이었으며 환희의 포옹이었다. 륜의 맥박은, 그
고동치는 심장의 느낌은 사모에게 낯선 것이다. 하지만 꼭 끌어안고 있
을 때 서로의 맥박은 구분되지 않는다. 사모는 그것을 자신에게 없는 심
장의 맥박으로 느꼈다. 온몸으로, 모든 정신으로. 사모는 느닷없이 오래
된 추억으로 되돌아갔다. 적출을 받기 전의 그녀에겐 맥박이 있었다. 잠
자리에 홀로 누웠을 때 귓가에서, 목에서, 아니, 어디인지도 알 수 없
는, 안인지 밖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다가오던-멀어지던 심장의 고
동. 맥박은 소리가 아니다. 사모는 다시 어려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두려운 추락감이었다. 그래서 사모는 더욱 세게 륜을 끌어안았다. 그럴
수록 륜의 맥박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옆이나 뒤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의 포옹은 슬프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 순간부터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이별이다.
사모는 륜을 놓아주었다. 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멀어져야 했다.
그 밀어냄이 사모의 근육에 일어나기 전부터 그것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륜은 자신도 모르게 그 밀어냄에 잠깐 저항했다. 용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짧은 저항이었다. 그리고 륜은 사모를 마주보았다.
[누님.]
[자, 륜! 일단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해보자. 어쩌면 모든 사람들
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내일을 찾아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륜은 어떤 반응도 떠올릴 수 없어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사모
를 만족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안심하게 했다. 사모는 다시 한 번 충
동적으로 륜을 끌어안은 다음 재빨리 그를 놓아주었다. 륜은 그제야 수
탐자들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을 본 순간 륜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티나한은 가장 순박한
레콘의 욕망, 즉 무시무시하고 상대하기 어렵고 항상 경계해야 하는 존
재로 보여지길 바라는 유치하지만 탓하기는 어려운 욕망을 그 어느 때보
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느끼는 것은 그 등에 업
고 있는 아기 때문이었다. 륜은 물어보지 않고서도 그 아기가 모든 이보
다 낮은 여신의 화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신생아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수탐이 길어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신체가 아기일 거
라 짐작하지 못한 것은 륜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륜은 수탐자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륜은 티나한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흥미로운 경향을 발견했다. 거친 사내로 보여지고 싶다는 욕망과 등 뒤
에 있는 화신의 존재가 결합되어 티나한의 마음 속에서는 독창적인 욕망
이 자라나고 있었다. 티나한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
이 살아 움직이는 제단으로 취급되길 바라고 있었다. 어쨌든 제단은 존
경받는 것이니까. 륜은 언젠가 티나한의 기분이 우울할 때 사용하기 위
해 그것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리고 유모나 보모에 관련한 농담은 절
대로 꺼내서는 안된다는 것도 즐거움 속에서 기억해두었다.
륜은 티나한의 등 뒤에 있는 아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아기는 시우쇠와 마찬가지로 륜이 읽을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조그마한 모습에 담겨있는 것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었다. 그래
서 륜은 비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비형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륜은 비형의 즐거움에 약간의 어색
함을 느꼈다. 비형은 사모와 륜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무조건적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기쁨은 남매의 재회 뒷면에 감춰진 무수한 이유들
과 무수한 뒷이야기, 그리고 무수한 상황들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순수하
고 거대한 기쁨이었다. 그의 기쁨 앞에서 륜이나 사모가 경험하고 느끼
고 고려해야 하는 많은 상황들은 티끌처럼 가벼운 것이 되어 둥실 사라
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은 륜에게 완전히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고민들, 재회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게 만드는 고민들도 모두 륜
자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형의 즐거움은 륜의 일부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륜은 고마워하기로 했다. 그리고 륜은 케이건
을 돌아보았다.
륜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떻게…!'
륜은 케이건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인의 능력을 얻은 이후에 다
시 만난 케이건은 그가 전혀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알기 힘든 사람이
었다. 케이건의 팔이 그리는 단순한 선은 수백 개의 사건의 총합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한 사람의 생에 한두 번 밖에 있기 어려
운 사건들이었다. 케이건의 어깨가 뻗어가는 선은 감정의 단층선이었다.
그곳에는 지독한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원래 살아움직였던 것들의 모호
한 부호밖에 될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 있었다. 산 자의 어깨에 있을 수
없는 화석들이 그곳에 있었다. 케이건의 눈에 대해서 륜은 할 니름도 말
도 없었다. 그는 그 눈을 오랫동안 보기도 어려웠다.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케이건 드라카는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아스화리탈의 용근을 먹은 이후로 륜이 누군가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시우쇠였고 두 번째는 아기였다. 그들은
화신이었고 사람의 눈으로 읽어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륜은 케이
건에게서 세 번째로 난독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우쇠나 아기와
는 다른 경우였다. 시우쇠와 아기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쓰여진 책이라
면, 케이건은 도서관이었다. 서가에서 책을 뽑아 읽듯 륜은 케이건의 무
엇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체를 알려면 한없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케이건은 일부가 아닌 전체의 존재였다. 따라서,
무엇이든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륜은 여전히 케이건을 알 수 없었
다. 사람들 사이에 두드러짐 없이 서있지만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난독
성 존재. 륜이 케이건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정의는 그것뿐이었다.
그 모든 관찰과 이해는 수탐자들을 죽 둘러보는 찰나의 시간에 이루어
졌다. 륜이 관찰을 끝냈을 때 수탐자들은 뒤늦게 다가와 반가움을 표현
했다. 그리고 그 때 쯤 아스화리탈의 뒤를 따라온 괄하이드 규리하와 라
수 규리하, 북부군의 다른 장수들도 도착했다. 그들은 사모 페이가 왔다
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다. 라수는 원망마저 내비치는 표정으로 말했
다.
"폐하. 어찌하여 이곳에 오신 겁니까."
사모는 가면 아래에서 웃었다. 그 웃음은 물론 라수에게는 보이지 않았
다.
"짐이 아직 너희들의 왕이더냐? 너희들은 왕을 내팽개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자들이더냐?"
"어떤 말로도 용서를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
겠습니다. 폐하는 저희들의 뜻을 모르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 너희들이 제멋대로 떠나서 제멋대로 죽어버리면 두 번째 너희들
을 만들어내라는 것이지. 그건 어쩐지 너희들이 여자들에게 항상 요구하
는 일 같구나."
라수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나가인 사모가 불
신자의 태도를 비꼴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현명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향한 그녀의 애정 또한 나타낸다. 관심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라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륜 페이에 대해 경계심을 품었
던 그도 사모 페이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기묘한 일이
었다.
"무엇이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목적지 대신 출발점에 희망을 남겨둔 제
소심함을 그렇게 표현하시면 저로선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짐이 네 희망이라면 너는 희망과 함께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네
다른 희망도 너에게 도달했다. 두 번째 화신께서 너희들에게 오셨다."
라수는 반가움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도 수탐
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관찰을 끝낸 라수는 아무런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은 채 티나한의 등 뒤에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저 분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겠군요."
라수는 논리로 경악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세미쿼 장군과 무핀토 장군은 기가 막힌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키타
타 자보로 장군은 입을 벌린 채 뺨을 쓰다듬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
인 다음 티나한에게 눈짓을 보냈다.
티나한은 아기를 등에서 내렸다. 아기를 품에 안으려던 티나한은 곧 생
각을 바꿔 비형에게 건네었다. 비형은 히죽 웃고는 아기를 안아들었다.
케이건이 말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였으며, 이름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이십니다."
라수는 여전히 놀라움 없는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괄하이드와
다른 장수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비형의 품에 안긴 채 그들을 죽
둘러보던 아기가 부리를 열었다.
"빛나는 아이들이 여기 모여있구나. 로페산 삵쾡이 무핀토여. 사람들이
너를 얕은 자라 말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거라. 물론 너는 깊이
가 있는 사내는 아니다. 하지만 깊이가 있는 사내는 깊이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 외엔 이렇다 할 장점이 없다. 그
런 자들을 천시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부러워할 필요도 없
다. 키타타 자보로, 사라진 씨족의 말예여. 네 복수에 씨족들이 찬성해
줄 것인가를 걱정하지는 말거라. 어떤 자들은 군자연하며 너에게 씨족들
은 네가 살아남아서 다시 씨족을 번성시키기를 원할 거라고 말하겠지.
헛소리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런 말에는 늙은 자와 죽은 자를 우상
으로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삶을 무서워하는 나약한 것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배어있다. 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거라. 초저녁
방랑자 세미쿼여. 임신했다는 이유로 네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된 네
부인은 여섯 달 전 순산했다. 네 아내는 그 아기에게 네가 남겨준 이름
을 붙여주지는 않았다."
세미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오직 무핀토만이 그 이상한 반응을
이해했다. 세미쿼는 고의적으로 괴상한 이름을 남겨주었다. 그런 괴상한
이름을 붙이는 것을 피하려면 다른 사람이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그의
부족에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내의 오빠뿐이었다. 그는 훌륭한
남자고 부족의 전통에 따라 자신이 이름을 붙여준 아이를 친자식과 똑같
이 키울 것이다. 세미쿼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세미쿼는 아기가
부족들만이 아는 별칭으로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그가
가장 놀란 것은 아기의 커다란 목소리였지만. 아기의 말이 계속되었다.
"규리하의 변경백 괄하이드여. 왕의 적과 싸울 수 있게 된 그대를 축하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전쟁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네가 싸우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대도 한 자루면 족하다. 그 대도가 누
구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라수 규리하여. 전우를 의심하지 않는다
는 괄하이드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라. 그것은 전사인 네 형의 방
식이다. 네 방식은 네 것이어야 한다."
라수는 고개를 들어 복잡한 시선으로 여신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그 때
저편에서 불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뭣들 하냐?"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우쇠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시우쇠는 비형과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
를 갸웃했다.
"저 도깨비를 왕으로 추대하는 거냐?"
사람들은 시우쇠의 엉뚱한 말에 당황했다. 라수가 똑바로 서서 설명했
다.
"저희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을 뵙고 경배를 드리는 중입니
다."
"응?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왔나? 어디에 있는데?"
"비형이, 여기 있는 도깨비가 안고 계신 분입니다."
시우쇠는 비형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군. 뭘 안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군. 그런데 안겨있다니, 아
기인가 보지."
사람들은 시우쇠의 말이 의미하는 바에 당황했다. 그 때 비형에게 안겨
있던 아기가 그들을 다시 놀라게 했다.
"라수. 누구를 향해 설명하는 거지? 시우쇠가 오기라도 했나?"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시우쇠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우쇠님. 오래간만입니다. 저는 케이건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보실 수 없으신 겁니까?"
"못 봐."
케이건은 고개를 홱 돌려 아기를 쳐다보았다. 아기는 씩 웃었다.
"시우쇠가 대답했니?"
케이건은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그러면 듣지도 못하시는 겁니까?"
"그래. 못 들어."
그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은 시우쇠와 아기 모두를 정
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우쇠와 아기는 서로를 보지도, 듣지
도 못하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듯이 말하고 있었
다. 그 때 케이건이 문득 시모그라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아기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시우쇠님은 고소리 의장을 통해 말을 전달하신 겁니까?"
"맞아. 나는 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그리고 시우쇠도 너와
똑같이 할 수 있고. 하지만 나와 시우쇠는 서로 그럴 수 없어. 저기 쯤
있는 모양이군. 풀이 타고 있어."
타인을 통해서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두 신 사이에서, 사람
들은 심한 당혹감을 느꼈다.
비아스는 몽롱한 기분 속에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
어오는 두 발은 몇 킬로미터 밖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발에 의지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느낌에 난
처함을 느꼈다. 물론 분노 또한.
[움직여, 이 도깨비 같은 발아! 움직이라고!]
그녀의 니름에도 불구하고 두 발은 계단을 디딘 채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묘하게도 그 발은 지루한 것처럼 보였다. 비아스의 정신 속 한 부분
에서 누군가가 무턱대고 니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정신 속에서 뛰쳐나온
그 참견꾼은 주의 깊은 세리스마가 또다시 심장탑 아래 쪽을 무더운 공
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 그 뜨거운 공기에 노출된 비아스 마케로우
가 제대로 사고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착각에
불과할 뿐 실제로 그녀의 신경과 근육은 정상적으로 반응하고 있으며,
그녀는 언제라도 자신의 두 발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등을 요란하게
닐렀다. 비아스는 경외감마저 느끼며 그 니름들을 경청했다. 그 니름들
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특히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 마지막 주
장이었다. 비아스는 그 주장을 따르고자 마음 먹었다. 하지만 다시 내려
다본 그녀의 두 발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멀게만 느껴졌다. 눈으로 보
이는 사실을 직면한 비아스는 그 주장을 의심했다. '내가 어떻게 저 발
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지? 저렇게 멀리 있는 것을!' 비아스는 그것이
니름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허리가 아파왔다. 비아스는 어렴풋하게 자신에게 허리라는 것이 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부분이 왜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비아스는 자
신의 통증을 먼 지방의 모호한 풍문처럼 인식했다. 수다스러운 참견꾼이
다시 닐렀다. 그 참견꾼은 오랫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어서 허리
가 아픈 것이며 따라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닥에 앉아 몸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비아스는 이제 그 참견꾼을 도저히 믿을 수 없
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는 걸으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앉으라고 하는
군.' 비아스는 현 상황이 세리스마가 일으킨 일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
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틀림없이 화리트가 꾸민 일일 거야. 아니, 카린돌인가?
그렇잖으면 냉동장치에 들어가 있는 소메로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군.
화리트는 유벡스가 산산조각냈으니까. 그리고 카린돌일 리도 없어. 카린
돌은 가주가 되었잖아. 그렇다면 냉동장치에 들어가 있는 소메로야.'
비아스는 자신의 추리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정말 탁월한 추리가였다.
열이 계속해서 그녀의 몸 속으로 침투했다. 비아스는 뜨거워진 내장이
피부 아래로 비쳐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끔찍하게 더운 날씨였다. 칭
찬을 받고 싶었던 비아스는 그 뜨거운 날씨에 대해 추리했다.
'여러분. 날씨가 이렇게 더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수호자들이
여신의 이름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바람은 아래로
떨어지는 물로 대지와 대화하고 땅은 위로 치솟는 불로 바람과 대화합니
다. 물은 아래로, 불은 위로.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사실입니
다. 그런데 수호자들이 여신의 이름을 훔쳤기 때문에 바람은 대화하는
법을 잊었습니다. 우주적 대화가 중단된 겁니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하
고 땅은 계속해서 불을 토합니다. 날씨가 이렇게 더워진 이유는 바로 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수호자의 잘못이었다. 비아스는 골치 아픈 상황을 간단하게
해명한 자신에게 스스로 찬사를 보냈다. 모조리, 몽땅, 전부 다 수호자
의 잘못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찢어죽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다. 비아스는 자신의 두 발을 내려다보며 다
시 한 번 움직이라고 닐러보았다. 그러나 두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위는 지독했다. 계단과 복도를 가득 메운 무겁고 뜨겁고 끈끈한 공기
는 오래된 저주 같았다. 비아스는 자신의 발에 대해 명령하는 것을 그만
뒀다.
오른발이 움직였다.
비아스는 놀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그 발을 바라보았다. 그녀
의 오른발은 한 계단을 올라가 윗계단을 딛고 있었다. 비아스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움직이라고 명령하는 것을 그만두
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떠올린 비아스는 한 번 더 같은 일을 시
도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오른발이 또다시 움직였다.
왼발이 움직여야 할 차례에 오른발이 움직이는 바람에 비아스는 균형을
잃었다. 오른발이 다음 계단을 디딘 순간 그녀의 몸이 서서히 오른쪽으
로 기울다가 벽에 부딪쳤다.
비아스는 벽에 몸의 오른쪽 부분을 댄 채 왼발을 내려다보았다. 왼발을
움직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벽에 몸을 기
댄 채 왼발을 움직이려 하면 아래로 굴러떨어질 위험까지 있었다. 비아
스는 먼저 벽에 기대고 있는 상반신을 똑바로 세우려 했다.
왼발이 움직였다.
가까스로 미끄러지는 대신 - 비늘의 마찰력이 도움이 되었다. - 비아스
는 몸을 벽에 기댄 채 왼발을 다음 계단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이제
오른발은 두 계단, 왼발은 한 계단을 올라간 채 비아스는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비아스는 뭔가 진전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벽
을 기대고 있는 몸을 똑바로 세울 방법만 찾아내면 될 것이다.
뜨거운 공기에 돌벽이 서서히 달궈지고 있었다. 비늘이 설 만큼 뜨거운
날씨에 비아스는 졸음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상반신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던 비아스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북부군 병사들은 바쁜 일이 있는 척하며 걸어가면서, 혹은 아예 뻔뻔하
게 나무들 사이에 서서 공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단한 풍경을 보지
는 못했다. 공터 주위에는 스물 두 명의 금군이 서있었고 병사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그 두억시니들의 안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시선의 각도를 바꿨다. 그들 중에는 베미온
굴도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미온은 계속 공터로 나가고 싶어했지만 키
타타 자보로가 그를 계속 달래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
다.
베미온이 다가가고 싶어하는 곳, 두억시니들의 안쪽에는 모두 아홉의
존재들이 앉아있었다. 시우쇠, 아기, 페이 남매. 수탐자들, 그리고 규리
하 사촌형제들이었다. 아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자들의 시선은 모두 케
이건의 배낭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형에게 안겨있는 아기는 어디에도 시
선을 맞추지 않았지만 케이건은 그녀가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
각하며 배낭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접시를 꺼냈다.
접시를 본 티나한은 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풀렸다. 케이건은
풀밭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신께서 이곳으로 오자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아기의 몸이다 보니
누군가가 저 분을 이곳까지 데려오기는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저희들은 이 접시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제 두 분의 화
신을 찾아내었습니다만, 세 번째 화신을 찾기 위해서는 이 접시가 깨져
야 합니다. 그런데 깨지지가 않습니다."
케이건의 말을 듣던 시우쇠는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안 깨진다고?"
"예. 온갖 방법으로 깨어보려 애썼습니다만 깨지지가 않았습니다. 어떻
게 된 일입니까?"
"몰라."
케이건은 눈을 크게 뜬 채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다른 자들도 경악한
얼굴로 시우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우쇠는 한가로운 태도로 반복했
다.
"모른다고.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상관없다니오. 요스비는 셋만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데…"
"너희들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라수가 지금 가진 것만으로 발
자국 없는 여신을 구출하기로 결정한지 오래니까."
케이건은 라수를 돌아보았다. 라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예. 저는 더 견디기 어려웠고 그래서 수탐자들
을 기다리는 대신 이곳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행운이 겹쳤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직 불운이 찾아오지 않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저희들은 이곳 하텐그라쥬 근방까지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
만 저곳에는 일흔 한 명의 수호장군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
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세 번째 화신이 얼마나 가까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혹 북부군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왕이면 세 번
째 화신을 찾아내면 좋겠군요."
시우쇠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라수를 바라보았다.
"목표가 그 자들은 아니잖아."
"예?"
"북부군의 목표는 수호장군들을 다 때려잡는 것이 아니잖아. 발자국 없
는 여신을 구출하는 것 아냐?"
"어,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러려면 하텐그라쥬를 점령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아기에게 물어봐."
시우쇠도 아기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라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비형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수가 질문을 꺼내기 전에 케이건이 약한
탄성을 질렀다.
"그렇군요. 여신께서는… 그런 것입니까?"
케이건의 질문에 시우쇠는 어깨를 으쓱였다. 케이건은 비형의 무릎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우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아기는 잠자코 케이건을 마
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두 신의 서로에 대한 기이한 불가지성에 대
해 또다시 놀라움을 느끼며 케이건은 말했다.
"여신님. 시우쇠님은 왜 접시가 깨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습
니다. 하지만 그 분은 저희들의 목표가 나가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발
자국 없는 여신을 구출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
게 그 방법에 대해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최후의 대
장간에서 이곳 하텐그라쥬까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해
온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같은 일이 이곳에서 심장탑까지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맞아. 그렇게 할 수 있어."
이번에는 비형과 티나한이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을 읽은 륜 또한
상황을 이해했다. 괄하이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
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 상상도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케이건은 대답했다.
"우리 목표는 결국 심장탑 안의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체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누군가가 심장탑으로
들어가야 하지요. 그런데 여신께서 함께 계시면 우리는 무지무지한 속도
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속도는 너무 빨라서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냥 심장탑으로 다가
가서 여신을 구출하면 됩니다. 나가들은 우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라수가 비명 같은 환호를 내질렀다. 괄하이드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
정으로 아기와 시우쇠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아기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기 있는 자들과는 안 싸워도 되는 겁니까?"
"그럴 필요 없어. 필요한 인원은 얼마 안 돼. 일단 나와 시우쇠가 가야
해. 그리고 나를 업을 자가 필요하겠군. 나와 시우쇠의 의사 소통을 도
와줄 사람도 있어야겠고. 역시 수탐자 일행이 좋겠어. 그들이 동의해준
다면, 나와 시우쇠, 그리고 세 명의 수탐자들이 심장탑으로 돌진해서 여
신을 구출하겠어. 그러면 끝이야."
괄하이드는 이런 행운에 대해 예감한 적조차 없었다. 그는 웃음을 터뜨
렸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군요. 그렇다면…"
괄하이드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불안감을 느끼며 라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괄하이드는 자신의 불안이 적중했음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에
그가 들었던 것은 환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끔찍한 절규였다.
라수는 부들부들 떨며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기는 조금 전 키보렌
침입이 불필요한 행동이었다고 가르쳐준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을 보다
빨리 알았더라면 라수는 그저 두 번째 화신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수탐자
들과 함께 키보렌으로 파견했을 것이다. 무수한 자들을 사지로 이끌고
들어올 필요도, 그리고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를 파괴할 필요도 없었
다. 그저 기다리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
륜은 라수가 느끼는 모든 좌절감과 자기혐오를 완벽하게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자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들 라수의 비참한 심정을 느꼈다. 라수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저는 제왕병자들과 같은 짓을 저질렀군요."
"라수."
괄하이드의 조심스러운 말은 라수의 고개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라수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왕의 귀환을 기다릴 수 없어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 그 얼간이들의
짓을, 바로 제가 저지른 것이군요. 여신을 구출할 자들의 도착을 기다리
면 되었을 것을. 스스로 여신의 구출자가 되어버리려 결심하다니. 이 엄
청난 오만은 결국 끔찍한 피를 부른 헛소동을 일으켰군요."
여신이 말했다.
"라수. 그만둬라."
라수는 고개를 들어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그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말했다.
"영웅왕은 결국 망해버릴 나라를 세운 거냐? 극연왕은 결국 사토 속에
묻혀버릴 길을 건설한 거냐? 너는 세상을 비웃으며 입매가 매서운 학자
로 살았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나가기 두려웠던 네가 선택한 타협안이
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네 방식이니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결국 끝
까지 그 타협안을 지킬 수 없어 세상에 나왔지만 얻는 건 실패와 좌절
뿐이니 실망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몸에 기름칠하고 죽어버리려고까지
했지. 그만둬라. 실패도 네 실패고 좌절도 네 좌절이라는 것을 인정해
라."
"그 때문에 너무 많은 자들이 죽었습니다."
"그건 그 자들의 것이다."
"하지만 그 자들은 저를 믿었습니다!"
"그 희망은 그들의 것이지. 그 희망을 배신했다면 모르겠지만 너는 네
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다. 그것이 결국 헛소동이라
하더라도 부족한 정보에서 비롯된 헛소동인데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죽
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우쇠가 라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흥! 죽을 필요가 있어서 죽는 사람도 있느냐?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만 취사선택하여 인정한다는 것이 아
니다. 급작스러운 사고와 황당한 죽음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윷가
락 네 개는 한꺼번에 던져져야 한다. 그 중에서 배를 보이는 것, 혹은
등을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은 윷놀이를 할 줄 모르는 자의 말
이다. 페로그라쥬 사람들과 악타그라쥬 사람들이 분노한다면, 그 놈들은
놀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얼간이들에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라수는 시우쇠를 돌아보았다. 그의 두 눈이 갑작스러운 적개심으로 불
탔다.
"당신은 알고 있었지요?"
"뭘 말이냐?"
"제가 여신의 도착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공연히 북부군을
이끌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 모든 사실
을 알면서도 당신은 잔인하게도 나를…"
시우쇠는 노호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러면 내가 모든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이 길로 가라, 혹은 저 길로 가라고 가르쳐줘야 된다는 거냐?
나는 그러지 않아! 너 정말 끝까지 살 줄 모르는 놈처럼 굴 테냐!"
라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의혹과 분노로 가득
했다. 비형과 티나한도 라수의 심정에 어느 정도 동의했기에 침중한 표
정을 지어보였다. 비형의 무릎에 있던 아기가 나직하게 말했다.
"라수. 시우쇠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성격이 있으니 좋
은 말을 하지 않았을 수 있겠지. 그러니 네가 이미 들었던 말일 수도 있
는 말을 해주겠다. 시우쇠는 내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너희들
도 이제 알게 되었듯이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없으니까. 시우쇠는 너에
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좋은 방법이 있으니 영원히 기다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 그건 죽으면 평안을 얻을 테니 빨리 죽으라고 하는 말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시우쇠는 네가 네 방식으로
살도록 내버려뒀다. 신에게 살도록 내버려뒀다고 화내지 말거라."
아기의 말은 라수를 진정시켰다. 분노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
에서 라수는 거칠게 말했다.
"그러면 빨리 이 희극을 끝내기를 부탁하는 것은 상관없겠습니까? 최소
한, 이제 이 짓이 희극이 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으니까요."
"그래. 알겠다. 수탐자들의 대답을 듣고 싶구나. 케이건. 나와 함께 가
겠느냐?"
케이건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 또한 찬성을 보냈고 티나한은
자신의 철창을 들어보였다. 시우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수탐자들과 페이 남매, 그리고 규리하 형제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렇
게 빨리 시작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필요한 인원들이 모두 갖춰진 마당
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티나한은 아기를 다
시 등에 업었다. 아기는 티나한의 등에서 말했다.
"라수. 네가 저지른 일들이 모두 할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짓들이었다
고 느끼지 말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앞으로 할 일도."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시우쇠와 내가 출발하면 너는 이곳을 떠나거라. 북부로 돌아가거라."
"이곳까지 와서… 하텐그라쥬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가는 것이군요."
"산 정상에 선 자들이 항상 하는 일이다. 그들은 도로 내려가지."
라수는 힘없이 웃었다. 아기는 부드럽게 말했다.
"돌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수호장군들이 힘
을 잃을 테니 나가들 또한 전력을 상실할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는 시우
쇠가 없다. 륜 또한 용인의 예민함은 여전히 가지겠지만 여신의 힘은 잃
게 된다. 그러니 돌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북
부군은 너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떠나자마자 조속히 회군하거라. 우리
는 너희들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돕기 위해 곧장 심장탑으로 가는 대신
저곳에 있는 자들에게 몇 가지 조치를 취하겠다. 지금부터 얼마 동안 하
텐그라쥬에 주둔하고 있는 나가 군단들과 수호장군들은 꽤 정신 없는 시
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출발하거라."
사모가 질문했다.
"저희들은 여러분을 다시 볼 수 없는 겁니까?"
"아마도 다시 볼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다른 자들일 것이다. 일이 끝나
면 우리는 전령할 것이고, 그러면 다시 만나게 될 때 너희들은 시우쇠라
는 이름의 도깨비와 아직 이름이 없는 레콘의 아기를 볼 것이다."
"수탐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수탐자도 더 이상 수탐자가 아니게 되겠지. 벌써 그렇지 않느냐?
그들은 이제 구출대다."
그 오래된 이름에 티나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형 또한 즐거워하며 나
늬를 불러들였다. 준비가 갖춰지자 이제 구출대가 된 수탐자들은 왕에게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아기는 출발을 명령했다.
구출대와 두 명의 화신은 눈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사모 페이와 괄하이드 규리하, 그리고 라수 규리하는 놀란 표정으로 주
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륜에
게 돌아갔을 때 륜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놀랍군요. 수탐자들의 물은…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들은 벌써 나가 진지 근처에 도달했습니다. 지금 잠시 멈
췄는데… 아마도 뭔가 상의 중인 듯합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둘러야겠군. 대장군! 상장군! 회군 준비를 서두르
시오."
괄하이드와 라수는 황급히 떠났다. 잠시 두억시니들 가운데 서서 사모
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땅을 바라보다가 륜에게 닐렀다.
[나는 케이건 드라카에게 너를 북부까지 안전하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
했어. 내가 너와 함께 가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이렇게 되었구나.
정말 기쁘군. 그런데 니름이야,]
[이곳에 남는 것 니름이십니까?]
사모는 미소지었다.
[북부군은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지. 하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여기잖아.
나는 전쟁이 모두 끝난 후에 네가 이곳으로 돌아오길 바랐어.]
[저는 누님이 돌아오길 원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진 셈이군?]
[예…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북부군과 함께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습
니다. 나가들에게는 자신이 일으킨 일을 돌이켜보고 자신을 정리할 시간
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 해도 저는 떠나야 합니다. 저는 페로그라쥬와 악타그라쥬의 파
괴자입니다. 누님은 그 가면을 벗으면 더 이상 대호왕이 아니지만, 제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누님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니른
대로 그들이 좀 더 침착해질 수 있게 되면, 그 때 돌아오겠습니다.]
사모는 거절했다.
[아니. 그렇다면 나도 가겠어.]
[누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가면만 벗으면…]
[싫어. 너를 북부에 남겨둔 채 이곳에 남아있고 싶지는 않아. 함께 가
자. 그리고, 돌아올 때도 함께. 네 적출식, 쇼자인-테-쉬크톨, 그리고
전쟁. 그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항상 이별을 준비해야 했어. 이제 정말
이지 이별을 준비하는 일은 싫어.]
[누님. 누님은 제가…]
[응? 아, 그래. 나를 읽었군. 그래. 홀로 북부에 남아있는 너는 나가들
과 혈투를 벌였던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게 될 테지. 그러면 안돼. 네 곁
에는 나가가 한 명 있어야 해.]
륜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륜은 두
억시니들 저편에서 다가오고 싶어하는 베미온 굴도하를 느꼈다. 지금까
지 그를 보살피던 키타타 자보로도 회군 준비를 하느라 떠난 후였고 그
래서 그는 홀로 있었다. 륜은 미소지으며 베미온에게 손짓했다. 달려오
는 베미온을 보며 륜은 침착하게 닐렀다.
[혼자는 외롭지요.]
[그래.]
[감사합니다. 누님.]
[고맙다는 말은 필요없어.]
륜은 사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베미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베미온은 달려오지 않았다. 베미온은
공터 중간 쯤에 선 채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륜은 의
아해하며 하늘을 탐색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홱 돌려 두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륜의 행동에 놀란 사모 또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
다.
거대한 하늘치가 그들의 머리 위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매는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하늘치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 가장 냉철한 관찰자조차 경악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머리 위로 다가오는 하늘치의 모습은 경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믿
을 수 없을 정도로 낮게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높은 하늘에서 서서히
경사를 그리며 낮게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치가 지금의 움직임을 계속
유지할 경우 그것은 정확히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서게 될 것이다. 사모
는 언젠가 파름 평원에서 보았던 참상을 떠올리며 비늘을 세웠다. 그리
고 륜은 사모의 기억을 느끼며 그 광경을 공유했다. 파름 평원의 생존자
들인 스물 두 명의 두억시니들은 혼란에 빠져 괴성을 내질렀다. 숲 저편
에서는 북부군이 내지르는 것이 분명한 비명들도 들려왔다. 륜은 니름과
말로 동시에 외쳤다.
"[아스화리탈!]"
아스화리탈이 공터 저편의 숲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륜은 지체 없이 그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사모가 그를 제지했다.
[잠깐. 륜. 내려올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륜은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치가 그리던 강하의 궤도가 완만해
지고 있었다. 그 비늘 서는 크기 때문에 여전히 두려울 정도로 위압적이
었지만 륜은 용인의 모든 감각을 통해 하늘치가 곧 그들의 상공 200 미
터 지점에서 지상과 수평을 그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륜은 그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륜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베미온 굴도하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륜은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베미온을 위한 미소였지만 륜은
자신의 공포도 가시는 것을 느꼈다. 륜은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그리
고는 다른 손을 뻗었다. 사모는 륜이 자신의 손을 쥐는 것을 느끼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륜의 미소를 본 사모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륜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치는 이제 수평 궤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것의 움직임
이 완만해졌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들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서로 손을
맞잡은 세 사람은 아직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두려움 속에서 하늘치를
응시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갑자기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모가 먼저 닐렀다.
[너도 본 것이군?]
[누님도 보셨습니까?]
질문을 통해 서로의 관찰을 확인한 그들은, 그러나 여전히 믿을 수 없
다는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광경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치의 등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내려온다는 것은, 그
것도 마치 그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는 것처럼 터벅터벅 걸어
내려온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이지가 못했다. 아니, 터벅터벅이라는 표
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계단을 내려오는 가장 빠른 동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높이가 거의 200 미터였기에 그 동작은 꽤 오
랫동안 계속되어야 했다. 갑자기 륜은 그들을 향해 걸어내려오는 자가
눈에 익은 자임을 깨달았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모 또한 그 자의 정
체를 깨달았다. 그래서 남매는 동시에 같은 이름을 닐렀다.
[오레놀 대덕?]
오레놀 대덕의 움직임을 관찰한 두 사람은 그가 달리다시피 걸어내려오
는 그 가상의 계단이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숲에서 땅에 닿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곧 베미온과 함께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금군들과 마루나래, 아스화리탈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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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참 길게 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