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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태복음 11:20-30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인 풍요와 짧은 근무시간, 다양한 레져와 스포츠, 각종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쉼이 없고 오히려 스트레스, 노이로제,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타이티한 조직사회 속에서 무의미한 일만 반복하다 보니 마음에 피곤이 쌓여만 갑니다. 또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항상 긴장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은 불안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한마디로 쉼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하면 이 불안하고 피곤한 세상에서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치고 피곤한 영혼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시간 우리 모두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이 주시는 참 쉼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20-24)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여기서 ‘권능’은 ‘‘신적인 능력,’ 즉 ‘기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 지방에서 가장 많은 기적의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사람들로 회개하게끔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믿음은 회개를 해야 생깁니다. 회개와 믿음은 바늘과 실과 같습니다. 회개없는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역사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1:15). 회개라는 말은 ‘재고하여 길을 바꾸다’란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의 역사를 보고 나를 향한 길에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회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이요, 회개치 않으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에서부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은혜만 받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의 역사를 보면서도,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마음에 조금도 회개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회개치 않는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마음의 교만 때문입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두로와 시돈보다도 완고하고 교만하였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은 도시국가들로서 그들은 장사를 잘해서 부가 쌓이자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두로에 대하여 이사야는 심판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대로 B.C 722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주요 성읍들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라신과 벳세다는 두로와 시돈보다 더 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1,22)
가버나움은 어떠합니까?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로서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고 악하였습니다. 소돔은 롯이 살던 동네로서 소돔사람은 악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습니다(창13:13). 인간이 행할수 있는 모든 악은 소돔에서 다 저질러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 19:24,25절은 그 심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였더라.” 그런데 가버나움은 이런 소돔 고모라보다 더 교만하였습니다. 23a절에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하신 말씀을 볼 때 가버나움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버나움을 향하여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3,24) 예수님의 말씀대로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철저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하는 과학기술문명은 인간을 교만하게 합니다. 사람이 가난할 때는 겸손하지만 부요하게 되면 마음이 금방 교만해집니다. 사회적 지위가 더하여 지면 더욱 더 교만해 집니다. 미모를 가진 자는 미모 때문에 교만해지고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때 받은 IQ 점수 때문에 교만합니다. 키가 큰 사람은 일반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을 무시하는 속교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좀 커지면 우리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택함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강한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여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헛된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그들은 교만하여 갈수록 보리처럼 고개를 뻣뻣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을 치셨습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하셨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지금의 통곡의 벽입니다. 이처럼 교만은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을 열심히 하기에 앞서서 내면의 교만을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교만을 회개할 때 복음을 깊이 영접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회개할 때만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이는 회개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들을 인정하고 드러내면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정죄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듭니다. 3) 무엇보다 회개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4) 사람들이 회개하기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나름대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회개하면 내맘대로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매일 것만 같고 맘대로 놀러도 못가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해서 죽어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회개할 때 1) 날아 갈듯한 자유함이 밀려옵니다. 2) 진실되게 회개할 때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기쁨이 몰려옵니다. 3) 진실되게 회개할 때 나를 얽메이던 모든 죄의식이 사라지고 참 평안함이 나의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4) 회개하면 속이 후련해지고 밥맛도 좋아집니다. 5) 영육간에 건강하게 되어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랑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무거운 죄의 짐이 사라짐으로 진정한 쉼을 얻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25-27)
예수님은 교만하여 완고한 자들로 인하여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큰 힘과 위로를 얻으시고 감사기도를 하였습니다. 25,26절을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것’이란 복음의 비밀을 말합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말을 잘 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겨서 배우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반면 어린아이는 단순한 마음의 소유자들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진실되고 겸손합니다. 부모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들이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배우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비밀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셨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절을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위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알 수 있습니다(엡 1:18).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온전히 안다는 뜻입니다. 지식적으로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짜로 아는 분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기 때문입니다(요17:3).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결코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할 때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으며 허무하게 됩니다. 인생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때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기고,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생깁니다. 그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참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모든 분들은 어린아이처럼 나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우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마음의 쉼을 깊이 알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28-30)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며 지친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고 종신토록 수고해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1)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어린이들도 유치원 때부터 피아노, 미술, 수영, 태권도, 무용, 거기에다 영어까지 배우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중고등학생이 되면 대학입시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대학에 와서는 취직을 위해서, 장학금과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해야 합니다. 취직해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직장에 출근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져야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2)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죄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 결과는 같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고, 무거운 죄의식에 짓눌리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불화상태에서 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끊임없는 사단의 고소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무거운 짐들로 인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조건 자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방같은 곳에 가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어떤 사람들은 쉼을 얻기 위하여 고상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부가 있으면 주로 골프를 칩니다. 탁트인 field에서 멋지게 드라이브 샷을 하고 담소하며 걷고 샤워하고 식사까지 마치면 마치 모든 피로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내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쉼을 얻고자 하다가 더 큰 죄를 짓고 헤어나올 수 없는 무거운 죄짐에 눌려 고통하는 쉼없는 방랑자가 됩니다. 이런 인생들에게는 참된 쉼을 주는 영혼의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돈이 아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참 쉼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쉼입니다. 돈을 벌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는 것도 그 궁극적인 원인은 쉼을 얻고자 함입니다. 이 참 쉼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무거운 죄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되 어떤 자세로 나가야 쉼을 얻습니까? 29,30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 우리는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멍에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소나 말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소나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며 순종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소가 쟁기나 달구지를 끌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멍에가 좋으면 소가 힘을 잘 쓰고 편안히 밭을 갈 수 있고, 멍에가 좋지 않으면 불편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떤 멍에를 메는 가에 따라 힘을 얻을 수도 있고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메거나 세상 멍에를 메면 그 멍에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주고 무겁게 짓누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무거운 죄의 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1) 예수님께 매이고 묶이는 것을 말합니다. 소가 매여 있고 묶여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데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속회나오세요, 새가족공부하세요, 교사하세요 하면 이런 것에 매여서 살며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피곤한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2) 또한 멍에는 사명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명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열매맺는 생활을 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인의 인생을 사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이 멍에를 메어야만 이상하게 영혼의 쉼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져야 할 모든 짐과 고통을 대신 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멍에를 메어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깨달아집니다. 그러므로 이 멍에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시는 은혜의 멍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는 나홀로 지는 멍에가 아니고 예수님께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에 가볍습니다. 멍에는 소나 말 한마리에게만 씌우는 멍에가 있고 두마리에게 씌우는 쌍멍에가 있습니다. 본문의 멍에는 쌍멍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시고 앞서 가십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얹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때로 사명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주일만 와서 예배만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명 때문에 속상하고 우는 것이 좋습니다. 사명 때문에 우는 사람은 세상 때문에 울 일이 없어집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다른 십자가가 오히려 많아지게 되고 결국 비참하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의 십자가는 무거운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울 때 참 쉼이 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 그 깊으신 희생과 사랑, 그의 고결한 인격과 삶, 그의 아름다운 순종과 부활의 능력을 알고되고 참 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멍에도 메지 않고 우리 맘대로 살면 자유롭고 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지 않으면 사단이 주는 죄의 멍에를 메야 하고 율법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냄새나는 인간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가 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배울 때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가인처럼 하나님께 반발하고 거역하는 내면을 가지고 있으면 쉼없는 방랑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시간 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먼저 쉼을 얻은 우리가 주님의 초청을 받들어 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도록 도와서 참 쉼을 얻도록 힘차게 초청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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