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이 9월 14일로 고정되었다.
성경에서 뱀은 죄와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죄와 죽음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보며 생명을 얻었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을 얻는다.
죄와 죽음을 올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다
( 요한 3,13-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광야 생활에 싫증을 느낀 백성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고생이 싫었던 것이지요.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보잘것없는 양식은 ‘만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눈처럼 ‘하얀 만나’가 내려앉으면,
백성은 집으로 가져가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눈과 입으로’ 체험하는 매일의 기적이었습니다.
‘만나’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살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지겹다고 합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고자 시련을 내리십니다.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친 겁니다.
백성은 그제야 기적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구리로 만든 뱀을 기둥 위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뱀에게 물렸는데 ‘구리 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낫겠는가?
고통 속에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시련에는 주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 생각만 내세우면 그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구리 뱀’ 이야기의 교훈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례 받기 이전의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으로
세례를 받아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내며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아 죄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죄의 근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세례 이전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할 때 죄에서 나온 독성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마치 불 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 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우리의 삶에서 구리 뱀의 역할을 합니다.
죄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죄를 거듭 짓게 되는 우리가
그 죄의 독성으로 쓰러질 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영혼의 생기를 얻어 약속의 땅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민수21,6)
주님께
투덜거리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불 뱀에 물리는 아픔도
각오해야 한다네.
행여,
나약함의 죄로
영혼과 육신이
불 뱀에 물려 상처를 입거든
재빠르게
해독제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쪽으로
몸을 돌려야 한다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