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느님 구원의 선포자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선포자입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구원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오늘 전교 주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인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특별히 갖추어야 중요한 신앙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첫째로, 우리는 전교를 하기 전에 항상 나의 신앙을 먼저 되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는가?’ ‘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케 하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주인이시며,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 고백하는
근본적 신앙의 자세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도 믿는 전적인 신앙의 순종 말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나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20ㄱ) 여기에서 제자들의 사명 가운데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자기 민족을, 동네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고을도,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자기 민족을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넘지 못하던 옛 세대의 장벽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어져야 하는 행동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는
말씀입니다. 곧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물만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세례를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념하는 전교 주일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세상 밖으로 나가 모든 이를 만나며,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면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을 실천하는 주일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고백을 완성해 나갑시다.
글 : 吉成桓 Peter 神父 – 전주교구
키오스크와 나
요새 대형마트는 물론이고 식당, 카페, 극장, 기차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키오스크(kiosk)’라고 불리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 단말기입니다. 이게 뭔가 편하면서도 불편합니다.
잘 몰라서 쩔쩔매는 젊은 학생들도 여럿 봤습니다. 어르신들은 오죽할까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대형마트의 키오스크에서 계산하는데 옆의
어르신께서 꽤나 난처하신 듯 보였습니다. 물건 바코드 찍을 줄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도와드려야 하나 망설이던 그 순간, 마치 슈퍼맨처럼 재빠르게
한 직원 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어머님, 이건 이렇게 하시면 되고요.
또 이건 저렇게 하시면 되고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 직원 분은 능수능란하게 어르신을 도와드렸습니다. 아주 쉽고
친절하게 키오스크를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잘 가르쳐 주시더군요.
그 어르신 또한 직원을 향한 감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름답고도 모범적인 ‘직원’과 ‘고객’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모든 마트에서 이런 훈훈한 광경만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하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표어는 사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서 갖는 어떤
다짐일 텐데, 일부 손님들은 진짜 자기가 ‘왕’이라도 된 것처럼 무리한
요구를 늘어놓습니다. 반면에 직업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손님이 오는
것도 짜증이 나는 듯 그저 불친절하기만 한 직원들도 더러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손님도, 영원한 직원도 없다는 것이죠.
사회는 혼자 살아가는 공간이 아닙니다.
여럿이 모여 살아가며 그 안에서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때론 손님이고 때론 직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우리 모두는 ‘노동자’이고, 바로 이
‘노동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나만이 ‘사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직원도 ‘사람’입니다. 나만이 ‘사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공무원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탁월한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둔다. 교회의 사회 교도권은 이 권리들이 법체계
안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중 몇 가지 권리를 열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아 왔다. 그것은 곧 정당한 임금에 대한 권리…
자신의 양심과 존엄성이 모독을 받지 않고 일터에서 자신의 인격을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이 있다”(『간추린 사회 교리』 301항).
사회는 ‘나’와 ‘키오스크’가 만나는 공간이 아닙니다.
‘나’와 그리고 나만큼 소중한 ‘너’가 만나는 곳입니다.
따뜻한 만남으로만 가득한 세상을 기도해 봅니다.
※ 키오스크 [kiosk]=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 단말기
글 : 沈載寬 Samuel 神父 –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