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총선을 앞두고 한국 천주교회와 이명박 정부의 충돌이 거듭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명박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온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핵발전소 확산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해 사안별로 ‘동해안 탈핵 천주교연대’ 등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결합한 ‘천주교연대’를 구성해 환경파괴와 평화를 해치는 국책사업에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이에 이명박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이러한 반발을 억눌러 왔으며, 심지어 총선을 앞두고, 지역 선거관리위원회는 <공직선거법> 제85조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조항을 운운하며 아직 선거기간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 “최근 종교단체 및 종교단체 관련자들이 종교의례 등 각종 계기를 이용하여 특정 정당 및 후보자를 지지, 추천, 또는 반대하는 등 선거법을 위반하는 행위가 발생하고 있다”며 자제를 촉구하는 공문을 천주교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나 사제들 앞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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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수도자 가릴 것 없이 연행하고 구속하는 정권
한편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국책사업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사제들에 대해 연행과 구속을 서슴치 않고 있는 상황이다. 3월 30일 오늘 현재 제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정욱 신부(예수회)는 첫 공판에서 징역 1년, 벌금 15만원형을 구형받았다. 지난 3월 11일 제주지방법원은 천주교 예수회 소속의 김정욱 신부와 제주 늘푸른 교회 이정훈 목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한 바 있다. 이는 1998년 문규현 신부가 구속된 이후 14만에 이뤄진 성직자 구속사건이다. 이에 3월 14일 ‘한국 천주교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가 ‘구럼비 발파 중지와 구속된 성직자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성직자가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 복음적 삶을 실천하는 것을 사법당국에서 인신구속 등으로 규제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앞서 제주지방법원은 2월 24일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불법공사에 항의하다 연행된 11명의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를 업무방해와 특수공무집행방해,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법정에 세우고, 문정현 신부는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이강서 신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이영찬 신부와 박도현 수사는 징역 6개월 벌금 10만원에 집행유예 2년, 송년홍, 정성종, 김창신, 임남용, 두성균, 유정현, 김경민, 김태환 신부 등은 10만원의 벌금형에 처했다. 이날 공판에는 참석한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법이 정의를 위해 집행되어야 하는데, 문자로서의 법만 집행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재판 소감을 전했다.
한편 사제 964명, 여자수도자 2,664명, 남자수도자 107명이 서명에 참여하면서 2011년 10월 10일 출범한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는 이 선고에 대해 “12명의 사제, 수도자에게 내린 선고는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 자연환경 보전과 제주 강정마을 공동체 복원을 위해 투신하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복음적 삶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경찰은 1월 10일 강정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기도회를 열던 여성 수도자 18명과 사제 1명, 심지어 청소년들까지 강제연행했으며, 이에 ‘한국 천주교 여자 수도자 장상연합회’와 ‘제주 평화의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가 1월 3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대성당에서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와 국가공권력의 회개를 위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전국의 여자 수도자 4,023명이 서명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 수도자들은 공개질의서를 통해 조현오 경찰청장에게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종교행사인 미사 도중 경찰들이 미사를 중단시키고 사제들을 고착시키는 등 종교행사를 빈번히 방해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고, 경찰청장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사제들에게 주교란 무엇인가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사제, 수도자들이 대대적으로 연행되고 구속되는 상황에서 주교회의를 비롯해 각 교구 교구장 주교들이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실제로 연행된 사제들 가운데는 제주교구 사제들만 끼어있는 게 아니라, 전 교구에 걸쳐있다. 소송중인 사제들 가운데는 이강서 신부 등 서울대교구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 역시 아무런 발언이 없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인 <주교들의 사목임무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 28항에는 “교구신부와 수도신부나 모두 다 주교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으며 “주교와 교구 사제들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초자연적 사랑의 끈으로 맺어짐으로써 사제들은 주교의 뜻에 자신의 뜻을 합쳐 사목활동에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혼들에 대한 봉사를 더욱 더 증진하기 위하여, 주교는 사제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공동으로, 특히 사목문제와 관련하여, 기회가 닿는 대로, 가능하다면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바란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한 16항에서는 “주교들은 아버지와 목자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기 신자들 가운데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런 의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주교들은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고’(2티모 2,21), 시대의 요구에 자신의 삶을 적응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며 “사제들은 주교들의 관심과 임무를 부분적으로 맡아 일상 사목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므로, 주교들은 언제나 특별한 사랑으로 사제들을 감싸주고, 아들처럼 벗처럼 여기며, 그들의 의견을 기꺼이 듣고, 그들과 신뢰관계를 이루어 교구 사목의 모든 활동을 추진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1970년대의 한국교회 모습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유신정권 아래서 양심선언을 하고 구속된 이후 다른 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나서서 석방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 당시에도 주교들 사이에 유신정권을 둘러싼 다른 판단들이 있었으나, 동료 주교의 석방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또한 많은 주교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의 구속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감옥을 찾아가 주고, 위로했다.” 교회법적으로 사제들은 주교의 수족(手足)이나 다름없다. 사제들은 주교와 한마음으로 일치하여 헌신하는 이들이기에, 주교는 마땅히 “사랑으로 사제들을 감싸주고, 아들처럼 벗처럼 여기며” 사제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함에도, 이번 사태에 직면하여 주교들은 제 사제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는 직무유기를 넘어서 교권의 ‘무자비함’을 소속 사제들이 경험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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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 대한 입장 없는 주교회의
한편 4.11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12일부터 15일까지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열린 2012년 춘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1주기를 맞이해 제안했던 탈핵 관련 성명서 채택을 보류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이 요청한 강정 해군기지 문제와 관련된 주교회의의 지침은 논의되지도 않았다. 강정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교구를 비롯해 각 교구에서 찾아온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경찰에 의해 줄줄이 연행되고, 구속된 상황인데도, 이 문제에 대한 주교들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만약 주교회의에서 이번에 강정 해군기지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동료 주교이며 주교회의 상임의장이기도 한 강우일 주교에 대한 연대 차원에서, 나아가 강정에서 분투하고 있는 사제들에 대한 어버이다운 심정으로 지지를 표명했다면, 사제와 수도자들에 대한 공권력의 무차별한 연행과 구속, 그리고 김정욱 신부에 대한 검사의 징역형 구형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지난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안한 4.11총선과 관련된 성명서 역시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는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자에 따르면, 주교회의는 지난 3월 9일 김희중 대주교 등 7대종단 지도자들이 모여 발표한 19대 총선 관련 대국민 호소문으로 천주교계의 총선관련 입장을 대신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9일 열린 7대 종단지도자 모임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김능환)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날 종교지도자들은 서울 롯데호텔에 모여 19대 총선에 대한 중립적 입장만 확인했을 따름이다.
이날 김능환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번 제19대 총선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이 온전하게 선거결과에 반영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종교지도자들의 협조를 요청했으며, 종교지도자들의 호소문 역시 ▲바르고 깨끗한 선거실현 동참 ▲선거법 위반행위 지적 ▲정당ㆍ후보자의 정책・공약을 꼼꼼히 비교하고 따져봐 실현 가능한 공약을 제시한 정당과 후보 선택 ▲투표독려라는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내용의 호소문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정리한다면, 주교회의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자신의 예언적 사명을 포기함으로써, 시대의 징표를 읽고 복음적으로 판단할 교도권자의 의무에 적절히 응답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세계 정의에 관하여”>(1971. 주교시노드)는 인류를 모든 억압적인 상황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이 세계에 정의를 구현하고 이 세계의 변혁을 이룩하는 것은 곧 “복음 선포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라고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 메시지는 이 세계에서의 정의에 대한 요청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영역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한 사례들을 거부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
서울대교구, 교권의 막판 뒤집기
한편 이번 춘계 주교회의가 한국사회의 긴급한 과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이런 어쩡쩡한 입장 표명 때문인지, 이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번복한 사례가 일부 교구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교회의 정기총회의 결정과 상관없이,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이미 지난 2011년 12월 5일 정기회의에서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총선 후보들을 대상으로 정책 질의를 하여, “그들이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참된 일꾼인가를 선별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 특히 천주교 신자 후보에게는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묻기로 한 바 있다.
이에 인천, 수원, 대전, 대구, 안동, 부산교구 등은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 총선 후보자들에게 정책질의서를 발송하고 결과를 주보 등을 통해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 교구들은 나름의 사정을 들어 정책질의를 포기했으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내부 논의를 통해 정책질의를 하기로 결정했으나, 교구 차원의 결재과정에서 무산되었다. 구체적으로 누가 이 질의서 발송을 반대했는지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서울대교구의 형편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만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등이 서울대교구 정책질의서를 바탕으로 질의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척 당혹스러운 결정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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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럼비처럼 개발사업으로 펜스에 둘러쳐진 명동성당 들머리 일대 |
이번 총선에서 서울지역에서 선출될 국회의원은 전체 300명 가운데 48명으로 16%를 차지하며, 그래서 서울지역은 선거의 항배를 가름할 만큼 중요한 곳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불행히도 한국천주교회가 서울지역 후보들에 대한 정책 검증을 포기했다는 것은 불행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서울대교구는 아마도 예전과 똑같은 입장을 반복할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생각이 다른 이들이 많아서”라고. 만일 그렇다면 4대강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포함해 이번에 각 교구에서 총선 후보자들에게 발송한 질의서에는 한결같이 4대강 사업과 정부의 핵 확산정책,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주교회의 또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에서 줄곧 4대강 원상회복, 탈핵, 해군기지 건설 중단을 요구해 왔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 공식 입장에 수긍하지 않는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서울대교구는 다시 한번 ‘질문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서울대교구의 유력인사들 가운데 “이런 질문 자체가 정치적 간섭행위”라고 주장해 왔던 이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서울대교구는 다시 한번 4대강 사업과 관련한 정진석 추기경의 발언이 빚었던 사태의 연장선에서, 명동성당 개발 사업과 관련한 재원조달과 관련해 예언자적 발언을 삼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세계정의에 관하여>라는 주교시노드 문헌 38항의 내용을 곱씹으며 제 가슴을 쳐야 할 것이다. 아직 우리 교회는 충분히 정의롭지 않다. 그리고 이번 총선결과와 관련해 정작 서울대교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주교회의나 서울대교구나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애정남'이 필요하다.
“교회가 정의를 증거해야 한다면, 교회는 먼저 사람들 앞에서 감히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눈에 정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교회 안에서의 행동 규범, 교회 재산, 그 생활양식 등을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