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전씨(玉山全氏) 경산전씨(慶山全氏)라고도 한다.
경산(慶山)을 관향(貫鄕;시조(始祖)의 고향(故鄕)) 하고 있는 성씨(姓氏)가 있어 소개 하여 본다. 보통 큰 도시 주(州)를 쓰고 있는 지역을 관향으로 많이 쓰고 있는데, 우리 경산을 관향을 쓰고 있는 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 경산이 옛날에는 그 만큼 꽤 괜찮은 큰 고을 이였다는 것이다.
옥산(玉山)은 경산(慶山)의 옛 이름이다. 경산은 경북 중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진한)시대에는 얍량소국 또는 압독소국 이였는데, 사로국에 합병되어 신라 선덕여왕11년(642) 김유신을 군주로 추대되어 압량주가 설치되고 삼국통일의 튼튼한 기초를 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경덕왕(750)이 장산군(獐山郡)이라 칭하여, 고려 초 까지는 장산현(獐山縣)으로 축소되어 부르다, 충선왕2년(1310년)에 왕의 이름을 피하여 경산으로 바뀌었다.
압독국 시절에는 옥산부(玉山府)가 설치되어 원님이 거주 하는 핵심 역할도 하였다, 옥산(玉山)은 지금은 동내 이름으로 남아 있고 장산(獐山)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이름으로 남아 있다.
장산지(獐山誌)를 보면 경산의 주 생산품이 옥(玉)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옥산은 옥이 생산이 되어 옥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기록도 있으며, 현 아파트를 짓고 있는 구(舊) 새한자리의 야트막한 산 이름이 장산지에 보면 부옥산(浮玉山)이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27대 충숙왕 4년(1317)에 국사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하고, 34대 공양왕2년(1391) 왕비노씨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가 조선 태조 때 현령으로 강등되고 14대 선조34년(1601)에 왜적으로 인하여 퇴폐되어 대구(大邱)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학명재(鶴鳴齋)는 옥산군(玉山君) 전영령(全永齡)과 상장군(上將軍)전의룡(全義龍)을 위하여 후손 한경(漢慶)이 건립한 재사로 1972년 중건되었다. 재사는 정면 5칸 측면 한 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 형(中堂夾室形) 구조이며 전면(前面)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退間)을 두었다.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대명리 소재하며 동학산 소나무 숲을 오가며 학이 크게 운다고 동내이름이 대명동(大鳴洞)이 되었던 것이다, 학이 날아가는 것을 막을 려고 병풍산이 있고, 풍수학적으로 학이 날고 있는 산세의 형국의 동학산(動鶴山)이 있으며, 학이 노닐던 학바위 학이 날아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위한 비보사찰의 경흥사(慶興寺)를 학의 머리 부위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의 먹이가 많은 산상습지 쉰 마지기와 대명천 과 남천을 비롯한 너른 들판, 이 지역에는 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널려 있다.
경흥사는 임란당시 사명대사가 이 절에 머물 먼서 어려운 이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스님들로 이루어진 승병(僧兵)을 훈련하였다고 하니 이르러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러한 사연이 신빙을 더해 주는 것은 임란 당시의 유명한 의병승장으로서 널리 활약을 하였던 기허당 영규(靈圭)대사가 충청도 계룡산 갑사에서 경흥사 까지 왕래 할 때의 절의 위세는 대명천의 물이 쌀뜨물 색으로 물들었으며 많은 솥으로 밥을 짖다보니 절 이름 까지도 정(鼎)절로 부르기도 하였답니다.
전영령 상장군의 묘 터는 대명천으로 기가 맺혔지만, 그 흐름을 찾아보면 백두산에서부터 한반도의 기가 시작되어 백두대간으로 이어져 태백산에서 낙동정맥으로, 사룡산에서 다시 비슬지맥 으로 상원산 동학산 으로 이어져 이곳 상장군 묘 자리 까지 달려온 그 기상 명당 중 명당입니다. 옥산(玉山) 전 씨여 영원 하라- 경산이여 영원 하라 -
성씨(姓氏)의 역사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부여에서 왔으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BC18년 백제(百濟)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十濟)공신(功臣)으로 환성군(城歡君)에 봉해졌다.
중시조(中始祖)는 고려 개국공신 팔공산 동수전투에서 순절한 팔공신중 한사람인 충열공(忠烈公) 전이갑(全以甲)으로 모시며, 가창 행정리 한천서원에 배향하고 있다.
2000년 인구 조사 시 전씨가 493,419명의 3%정도인 옥산 전씨는 15,659명 이였다.
전씨(全氏)는 도(都)시조(始祖)인 전섭(全聶)으로부터 18본이 분적 되었으며,
옥산(玉山)혹은, 경산 전씨(慶山全氏)의 시조(始祖) 전영령(全永齡)은 도시조 전섭의 27세 손이다. 전씨 대동보(全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신종 때에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종3품)을 지냈고 옥산군(玉山君:지금의 경산)에 봉해졌다.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해서 그를 시조로 삼고 옥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집성촌으로는 달성군 구지면 유산리, 합천군 덕곡면 장동, 영천 화북(화북댐 으로 수몰), 창녕 대합, 밀양하남읍 남전리, 가까운 곳은 압량, 대구 파동 이다.
인물로는 고려때 문과한 전백영를 비롯하여 조선때 무과 전덕운 전무성, 전양, 전윤중, 전응명, 전침, 전희림. 문과는 전경창, 전응창, 전한, 전헌.
경오보 내역
고려 신종조(高麗 新宗朝)갑오(甲午)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봉(鳳)옥산군(玉山君)금(今)경산고호(慶山古號) 자손(子孫)잉관(仍官)
묘(墓) 경산군(慶山郡) 남면(南面) 납석촌후(納石村後) 실전(失傳)1961년 신축십월(辛丑十月)에 경산(慶山) 남천방(南川坊) 신석곡(申石谷) 내(內) 대명동(大鳴洞) 학명재(鶴鳴齋)內(장내)에다 이설단(移設壇)하여 단향(壇享)으로 향사(享祀) 하고 있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 묘공여(墓公與)합단(合壇).
신호위(神虎衛)
고려 초기 병권(兵權)이 지방의 호족(豪族)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상황 아래서 고려 정부는 병권을 중앙으로 집중 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6위는 이들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여 국가의 공병(公兵)조직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성종은 중국 당나라의 부병제를 벤치마킹 하였던 것 이였다. 농민층을 주요한 선군(選軍)대상으로 삼았고, 교대로 중앙에 번상(番上)하게 하였다. 6위 가운데 주력을 이루는 것은 좌우위, 신호위, 홍위위 의 3위로서 이들은 6위의 전체 병력42령(1령=1천명) 가운데 32령을 차지하였다.
신호위는 보승(保勝) 5영(領)과 정용(精勇) 2영으로 총7,000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소속된 무관직으로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1명,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1명 아래 여러 직위로 구성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