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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30. 내 멍에는 쉽고
마 11: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무지와 불신앙과 죄악에 빠져 있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마을들과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초청을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영육으로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들에게 그는 편히 쉬게 하시겠다는 구원의 초청을 하신 것이다.
이 초청은 초청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인격이심을 보인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는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안식을 주신다.
1] 수고하고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2]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는 현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
* 마 23: 2-7 –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3] 다 내게로 오라.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invitation)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 만큼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고 계신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4]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마지막 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킨다.
성도가 주께로 가면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다.
본문은 '내가' (*,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다. 놀라운 초청이다. 세례자 요한은 회의에 빠져 있고, 이 세상은 무관심 속에 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큰 불신앙 속에 빠져 있지만, 예수님은 다시 구원의 놀라운 초청을 하신다. 이 초청은 초청자 예수님의 신적 인격을 보인다.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 있으랴!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있으랴!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그런 상태에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편히 쉬게 하신다. 단지 그에게 오기만 하면 된다.
5]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
세상일에 시달려 안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피곤한 인생들, 무거운 짐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본문은 이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기록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머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쉴 때만이 참 안식이 있다고 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고 기쁨과 평강이 있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안식과 평강을 줄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은 나름대로 안식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강구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초대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모른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본문의 귀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고하는 자와 무거운 짐 진 자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 정신과 육체에 쉼을 얻고 있지 못하는 모든 사람임을 말해 준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공통된 형벌이다.
인간은 땀을 흘리고 애써야만 먹고 살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드리워지는 짐 때문에 고통스럽고 괴롭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고통과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며,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큰 자비와 긍휼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지체하지 말고 응답해야 한다.
(2) 하나님의 하실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인간 편에서 해야 할 두 가지 일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짐과 고통을 직접 치료하고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또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쓴 뿌리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들을 제거하고 치료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을 안겨다 준다. 그러나 이렇듯 하나님께서 해야 할 모든 일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성취되었고 완성된 채 우리의 앞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악에서 떠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고 은혜를 베푸시고자 해도 우리가 여전히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뜻을 돌이켜 우리에게서 떠나고 만다.
인간이 끊임없이 악과 대항하여 싸우려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지며 참된 안식과 평강이 넘치게 된다.
(3) 믿는 자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무엇인가?
① 자기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확신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용서함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다면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귀의 미혹에 빠져 심한 죄의식에 시달릴 때가 많다. 그들은 자기의 죄가 이미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죄악 속에서 신음하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멍에 아닌 멍에에 얽매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약속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② 죄의 유혹과 옛 습관과 사워야 한다.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죄의 유혹, 그리고 나쁜 옛 습관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우리가 이미 과거의 죄에서 벗어났고 용서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아직도 끊임없는 죄의 유혹이 밀려오고 있으며,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과거의 습관들이 되살아나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의 원주민을 모두 몰아내기까지 계속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원주민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한 채 그들과 동거하게 되자 그들의 죄악 된 습관에 차차 물들어가,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의 길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우리의 죄와 옛 습관들과 대항해 끊임없이 싸우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안식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③ 영원한 안식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에 대해 늘 사모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히브리 기자는 우리에게 안식할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 히 4: 9-10 –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우리가 성경에 약속된 천국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안식을 생각할 때 세상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고도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마 11: 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스스로 낮아지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며 그를 본받는다.
예수님을 믿는 길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가 명하신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제자의 길이다. 그의 멍에는 성도의 직분과 봉사자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므로 스스로 낮아지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마음' (*,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였다.
* 사 42: 2-3 –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 사 53: 1-2 –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스가라 선지자도 메시아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
* 슥 9: 9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다.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2] 나의 멍에를 메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다.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생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져 달라고 당부한다.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3] 내게 배우라.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Schmid).
결국 완전한 신앙생활에의 부름이다. 예수님을 믿는 길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가 명하신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제자의 길이다. 그러나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 안에 들어와 보면, 그의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가벼움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참 지식과 믿음을 얻었고 신적 구주께서 주시는 구원과 안식을 얻었으므로,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따르며 배우자.
4] 그러면 너희 마음이
'마음'(*, 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된다.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5] 쉼을 얻으리니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으리니'(*, 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어구는 렘 6: 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하셨다.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 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집어씌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주며 평강을 가져다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마 11: 30. 내 멍에는 쉽고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그것은 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믿음 안에 들어와 보면, 그의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가벼움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식과 믿음을 얻었고 구주께서 주신 구원과 안식을 얻었으므로,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며 배워야 한다.
1]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쉽고'(*, 크레스토스)란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 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예수의 멍에는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한 바 있다(F. R. Fay).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 요일 5: 3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다.
(3) 항상 예수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는 것이다.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메는 것이다.
(5)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길은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므로 스스로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며 그를 본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르는 참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과 쉼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 안에 들어와 보면, 예수님의 멍에는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니고 쉽고 가벼움을 알게 될 것이다.
2] 예수님의 초청
초청은 손님을 청하여 부르는 것을 말한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대개가 기쁜 마음으로 이를 수락하여 초청한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그 관례이다.
(1) 내게로 오라.
① 예수님의 초청
우리는 직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그것은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에게로 나오는 사람을 모두 기쁘게 맞이해 주신다.
자신이 죄인이든, 가난한 자든, 병든 자이든, 누구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
예수님의 초청은 신분의 고하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무런 제재나 제한이 없는 초청으로 오늘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고 계신다.
② 예수께 나가는 자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죄를 범한 인생은 죄의 와중에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속 범죄함으로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 롬 6: 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러한 인생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즉 율법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그 형벌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아울러 영원한 안식을 약속받았다.
예수께서 주시는 안식은 값없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그것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라 도저히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께로 나오시오. 그리고 그를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즉시 그의 평강과 위로는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①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멍에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자기가 지신 멍에를 지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여 기쁘게 짊어지신 멍에다.
하나님께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 8)라는 심정으로 멍에를 기쁘게 지셨으며, 우리를 향하여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 28)고 하시면서 멍에를 지셨다.
우리도 예수께서 지신 멍에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메고 그의 뒤를 따라야 한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 이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친 것도 그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기 때문이다.
충직한 소는 그 주인을 위하여 멍에를 맨다. 성도들은 그들의 주인인 예수님을 위하여 멍에를 메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신 이웃을 위해서도 기꺼이 멍에를 매야 할 것이다.
② 우리가 메는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매어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마 28: 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매고 있는 성도의 멍에에도 적용된다. 멍에는 힘이 들고 괴롭다. 그러나 성도의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져 주시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가장 복되고 은혜로운 초청이라 할 수 있다.
(3) 내게 배우라.
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학생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는 모든 규칙을 준수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학문을 배워야 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이다. 그를 배우는 일처럼 값진 일은 없다. 배운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열심히 배웁시다. 그러면 그의 인격과 성품,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까지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우리는 예수께로 배운 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배움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 마 28: 19-20 –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배운바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회개했는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
기독교는 단순히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삶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에 대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심치 말고 믿고 그의 소원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참 안식을 누려야 한다.
주께서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주 안에서 쉼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다. 우리는 그 평안을 누려야 한다.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길이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