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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7월17일 월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수도회] 거짓 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의 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탈출 1,8-14.22
† 복음 마태 10,34─11,1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우리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를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적당히 따르거나 미지근한
신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는 충돌이 불가피하지요.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충돌할 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척해야 하는지, 그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정말 지혜를
다해 최선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요.
더욱이 내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가족과 불화가 생기거나, 또는
가족이 부당한 대우나 박해를 받는다면, 그 어려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시련이 주어지더라도 예수님만을
우리의 최고 가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저마다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앞날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십자가는 결국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상반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과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 점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따르면서
2017년 가해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8-14.22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종종 아동학대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됩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참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힘없는 아이, 더군다나 아직 이 세상
안에서 할 일도 많은데 아동학대로 너무 짧게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는 뉴스는 우울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배우자의 학대 행위를 알고서도 아이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방관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체벌이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그런데 살해의 가능성이 있는 체벌이었고 따라서
아이가 느낄 공포와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절대로
방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러한 방관자의 모습을 취했을까
싶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요? 사랑한다면 더욱 더
그런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오히려 함께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빙자한 더 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잘못을 행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은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평화는 폭력의 묵인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만히 있음으로 인해서 평화를 완전히 깨뜨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사랑도 또 평화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고, 죄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부활 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도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실 정도로 ‘평화의 주님’ 아니십니까? 그러한 분께서 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을 하실까요?
그러나 앞선 이야기를 통해 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세상의
평화를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짓된 평화를 주님의
말씀이라는 칼을 통해서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악을 제거하는 칼, 온갖 불의와 다툼을 제거하는
칼입니다. 이 칼을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향해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평화, 잘못된 사랑을 진짜 평화나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따르면서 진짜 평화와
사랑을 위해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인만이 주님의
커다란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다(퀴리부인).
아버지의 89번째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천재
영국의 예술가이자 조각가인 헨리 무어 경의 이름 앞에는 항상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왔습니다. 그런 그가 80세 생일에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내가 왕립 미술학교를 다닐 때에는 탁월한 조각가가 30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40년 후에 겨울 10명이 남더니, 60년이 지나고 나니
겨우 3명만 남았습니다.”
그의 말은 자신이 천재라기보다는 조각을 계속해 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실력이 나아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끈기가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천재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갔던 카페에서의 멋진 커피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거짓 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의 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 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거짓 평화를 도려내는 주님의 칼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10,34) 이어 가족들끼리 갈라서게 하려고 오셨다
하십니다(10,35).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5,9)이라
하셨던 분께서 이제 와서 말을 바꾸시어 저주를 내리시고 분열을
일으키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이 원하는 거짓 평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세상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가짜 평화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평화의
가면을 쓰고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불의와 분열을
조장하는 ‘삶의 독소’입니다. 그런 평화는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와
무관한 차가운 장벽의 침묵일 뿐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나
자신을 향한 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탐욕과 교만,
이기심을 도려내기 위한 정화의 칼이기도 합니다. 그 칼로 세상에
재물과 권력에 대한 집착의 끈을 잘라버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망상과 욕망의 뿌리를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주님의 칼로 먼저 나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거짓 평화를 칼로 도려내고, 하느님의 참 평화를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은 거짓
평화를 도려내기 위한 하느님의 칼을 주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칼은 지배하려드는 힘의 칼이 아니라 사랑의 칼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칼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강이 흘러가도록
해주는 정의의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이 칼로
세상에 참 평화를 이루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거짓 평화를 과감히 도려내는 결단이 없이는 결코 이 세상에
하느님의 평화를 이루는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이 쉬운 일입니까? 사실 결단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고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선택하는 결단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겪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데 참 평화가 찾아올까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데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 삶의 가치기준과 방향이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경험과 돈과 능력을 향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을까요? 집착과 편견, 무관심과 무자비, 그리고 불의와
불평등이 팽배한 삶의 자리에 주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10,3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참 평화를 위한 결단과
평화의 도구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럼에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주신 칼을 손에 들고 목숨을 바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늘 주님을 삶의 첫자리에 두고, 정의의
실천을 통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는(10,42) 자비를 전함으로써, 온 세상에 참 평화를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2017년 가해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 10,34-11,1)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비극적인 역사’란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편안한
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건너갔던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월이 흐르고, 요셉도 세상을 떠나자
찬밥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혹독하게 부려먹었습니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습니다.”
(탈출기 1장 14절)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는 반복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이집트 등 당시 초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수시로 침략,
대량학살, 유배를 당하며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애써 건립한 성전들이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똑똑한 젊은이들은 포로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남의
나라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중세,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대량 학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과 살해, 그리고 마침내 나치에 의한 600만 명의
희생...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역시 돌아보면
잠시라도 태평성대를 누려본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호시탐탐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는 열강들
사이에서 호된 시련의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침략과 약탈, 전쟁과 대량학살, 강제 징용, 강제노동, 그리고
위안부, 남과 북의 극단적 대립과 전면전으로 인한 100만 명의
희생...
지난 세기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 하나
있더군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연합국들은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전범국가에 대한 철저한 응징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주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서
전범국가인 독일에 대한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고 또 다른
전범국가인 일본에 대한 분리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엉뚱하게도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미소간의 냉전 틈바구니 속에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친일파, 등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했습니다. 그 결과 한 국가, 한 민족이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맙니다.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분단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도
큰 비극이 계속되고 있음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 모진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꾸준히 민족의 해방과
재 건국을 희망했으며, 마침내 그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굳게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한 번 흔드시겠지요. 그리고 말끔히
정화시키시겠지요. 그래서 참 주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혹독한 세월을
온 몸으로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최단기간에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초고속 성장을 일궈냈습니다.
우리 역시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에
힘입어, 오랜 소원을 성취하는 그날이 오리라 확신합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분 섭리의 손길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는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분명 함께 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늘 희망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
◈ [수도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마태 10,34-11,1)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흔들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한 결단의 칼입니다.
탯줄을 잘라내듯 평화는 주님께 돌아서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칼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평화와 칼은 함께 걸어갑니다.
평화는 칼을 보여주고 칼은 평화를
보여주듯 부활은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살아있는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말씀의 칼이며
칼을 칼답게 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매순간이 기도이며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평화일수록 생생한 회심을 동반합니다,
결단이 없는 삶은 변화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할지는
묵상하는 시간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이란 평화를 살아내야 할 우리의 결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가는 삶이 결단이며 평화임을 믿습니다.
평화와 칼은 함께 걸어갑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 10,34─11,1
지난주에는 ‘성소국장 회의’가 있었습니다. 사제양성을 위해서 함께
고민하는 신부님들의 모임이라서 만나면 반갑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시간입니다. 서울교구는 사제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고,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교제를
제작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함께 나누었고, 다른 교구의
신부님들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제양성을 위해서 헌신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역시 더욱 분발 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사제 양성 지침’을 새로이 발표하였고, 이번
성소국장 모임에서는 사제 양성 지침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습니다. 새롭게 발표된 사제 양성
지침은 3가지 차원에서 준비되었습니다.
첫째, 인류애를 가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제직이 삶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애를 가진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지식을 쌓아야 하고, 종교의 틀을 넘어서
이웃들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둘째, 영성을 지닌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위지파 사람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지나쳤습니다.
사제는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지나쳤습니다. 율법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지식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고민할 때
자라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영성은 사제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
갈 수 있었던 것은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제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며,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셋째, 식별을 잘 하는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식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식별을
잘못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고, 남자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파라오가 그릇된 식별을 하게 된 원인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나와 상대방을 갈라놓고, 불신의
벽을 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별의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을 잘하면 마음에 위로가 오고, 그것이 지속됩니다. 반면에
식별을 그릇되게 하면 두려움이 오고, 고독이 깊어집니다. 식별을
잘 해도 고독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위로로 변할 것입니다. 위로가 되는 식별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점차 두려움으로 변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칼을 주러왔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마태10,34-11,1)
칼을 주러왔다.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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