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이야기 조금 더
중국 미술사 책에는 일반적으로 왕유의 그림을 싣지 않는데. 그 왕유 이야기를 좀 더 하자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당-송 시대의 그림 이론가들이 왕유 이야기를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술 사학자들은 왕유의 그림을 직접 보았다는 그 시대의 미술사가들이 한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지난 날의 문인들이 그림을 즐겼던 기분으로 그림을 보도록 합시다.
왕유는 안록산 난 때 받은 심리적 충격으로 소심하고, 우울한 기분이 깊어졌다. 노자와 장자를 많이 읽었고, 불교에 심취했다. 그의 시에는 그의 이러한 정서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왕유는 장승요와 오도자의 그림을 섭렵한 후에 청록이 아니라 수묵으로 나아갔다. 그리기 보다는 바림(색을 연하고 진하게 먹이기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筆線을 만들었다. 이러다 보니 왕유의 필선은 누에가 실을 뽑듯이 약한 선도 아니고, 오도자처럼 응징힌 기운이 느껴지는(오도자는 표현주의에 가깝다.) 필선도 아니다. 자기의 고유의 필선을 만든 것이다. 필선이 분방하면서도 완곡하다. 변화가 다양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왕유의 시대에는 아직 준법(峻法)이 나타나지 않았다. 왕유의 필선은 피마준의 선구 역할을 한다고 했다. 피마준으로 그린 동원의 그림과 맥이 닿는다고 했다. 한편 이사훈의 청록 산수에는 부벽준의 선구적인 모습이 보인다.(피마준은 아니다.) 송대가 되면 중국의 산수화는 부벽준과 피마준이 나타나면서 한 단계씩 발전한다.
첫댓글 왕유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