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0
1월11일[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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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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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gpur24yA80
[의정부교구 김민준 빈첸시오 아 바오로(야당 맑은연못 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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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내게 부여된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오늘 요한 복음사가는 그 유명한 세례 원조 논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조 논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에 대한 최초 지평을 개척한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습니다. 기술 분야에서 특허를 낸 사람은 특허청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사용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한 음식단지에 갔다가 요란스런 간판들을 보고 좀 웃었습니다. 그야말로 ‘원조논쟁’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집 간판이 50년 전통의 원조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조금 더 가니 원조도 모자라 ‘진짜 원조’라고 강조점을 뒀더군요. 좀 더 지나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오리지널 원조’라고 떡하니 붙여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원조’에 대한 집착은 각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역시 한때 원조 논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세례 하면 당연히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이었습니다. 이름도 세례자 요한이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한때 전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을 전개하며 전국구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거침없는 외침에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에게 인품에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세례자 요하 당(黨)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한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는데...요즘은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훨씬 강력한 빛과 존재감으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이었기에 순식간에 전세는 기울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 억울했으면 이런 표현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보다 늦게 개업해놓고 세례 베푸는 일에 있어 더 큰 성공을 보이는 예수님에게 일종의 반감까지 지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상황이 그런데도 스승은 별 위기감이나 전세를 뒤집을만한 묘안도 내놓지 않으니 더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이 보인 태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쇠락과 반비례해서 급격히 떠오르는 예수님의 존재감 앞에 세례자 요한은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억울함이나 적개심도 품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 원조 논쟁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그 무엇 하나도 감추지 않고 명백하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
요한은 이제 자신이 무대에서 내려올 순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세례자 요한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은 분노하고 억울해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향한 한없는 존경심과 깊은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세주를 위한 자신의 퇴장 앞에서 그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행복해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물러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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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IF603dA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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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요한도 세례를 주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시니 마치 경쟁자가 된 것처럼 나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한 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이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 메시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왠지 세례자 요한을 높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는 모두 아무리 거룩해져도 세례자 요한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오해를 받는 분이 있다면 바로 ‘마더 데레사’입니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마더 데레사가 평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름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믿음이 약해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소명’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평생 로마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로마의 국경을 더 넓히기 위해 변방에서만 살았습니다. 로마에서 떨어져 산 카이사르는 그러면 로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로마를 혼자 지배하려 들었기에 살해당하기는 하였지만, 로마 국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직무’상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달걀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달걀의 노른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과 더 가까운 것은 껍데기보다 흰자입니다. 껍데기는 노른자보다 본질에서 다르고 더럽고 딱딱합니다. 그러면 노른자는 자신과 더 가까운 흰자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더 변방에서 더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 껍데기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몸통과 더 가깝다고 팔뚝을 더 사랑하고 손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끝에서 고생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물론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어쩌면 안의 것을 보살피기 위해 더 고생하는 것들은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둑보다 맨 끝에서 배를 부르는 등대를 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로 말하면 주님과 더 가까운 기도는 ‘관상기도-묵상기도-소리기도’ 순입니다. 저는 주로 묵상기도를 합니다. 관상수도원에 있는 수도자들은 주로 관상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는 거의 소리 기도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 사진에는 항상 묵주를 들고 있고 수도자들과 공동으로 하려면 성무일도와 같은 소리기도가 주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저보다 묵상기도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가-저-마더 데레사’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마더 데레사는 성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계란의 노른자는 스스로 오염된 흰자를 더 고마워할까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려는 단단한 껍데기를 더 사랑할까요? 당연합니다. 자신과 멀어도 자신의 ‘뜻’을 더 충실히 따라준 껍데기를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소명에 어느 정도 충실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모든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더 그렇습니다. 소위 ‘로고스 찬가’(요한 1,1-18)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그분을 증언한 유일한 분으로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길을 닦으라고 보내신 유일한 분이요, 구약으로 말하면 엘리야 예언자와 같은 분입니다.
만약 기도의 단계로 본다면 세례자 요한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의 ‘회개’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고 기적을 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을 충실히 수행한 면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사도들 못지 않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자신의 소명상 자신은 ‘회개의 세례’ 자리에 있어야지 그리스도께 가서 그분께 세례를 받으면 최초의 회개의 세례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자의 역할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은 보내도 끝까지 그리스도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거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소명 때문입니다.
삶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그 기도를 통해 받는 기쁨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보다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목소리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듣는 기쁨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분이 커지시는 소식만 들어도 그 기쁨은 매우 충만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기쁨의 충만함은 소명의 충실에서 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달걀부침 하나 뒤집는 것,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는 『하느님의 현존 연습』의 ‘로렌스 수사’(1605-1691)나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 수사’(1579-1639)는 그리스도의 변두리에서 마냥 기뻤습니다. 그만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부가 검은 노예 취급되는 혼혈이었던 마르티노 수사는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나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나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주방에서 평생 일만 하였고 마당을 쓰는 일만 하였다고 해서 누가 관상 수도회의 수도자들보다 영성이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사랑의 현존 안에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랑실천을 했기에 온전히 모든 시간의 삶이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했습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그분의 음악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도의 맛을 느낍니다. 기도의 맛(기쁨)과 기도의 필요성(소명)만 잊지 않는다면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활시킬 힘이 있다면 자신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싸우다 요절한 알렉산더 대왕을 살려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기도를, 그것이 어떤 기도이건 간에, 당신 뜻에 일치하려는 강한 열망으로 했다면, 그 사람을 부활시켜 가장 당신과 가까운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그 사람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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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느 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이야기합니다.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그런데 요한이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29-30)
요한은 참으로 겸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경쟁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인류 최초의 죄는 하느님과 한 경쟁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어느 날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 하느님을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와가 저항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뱀이 유혹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까 봐] ……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람이 자신처럼 되지 못하도록 시기하시고 경쟁하시는 분으로 의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원조들은 마침내 하느님에 대한 의심과 경쟁심으로 타락하고 말지요.
오늘 요한은 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으로 커지셔야 하고 우리 자신은 작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멋진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 최고의 사랑스러운 동반자, 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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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써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 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결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 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이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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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느님께서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사건이라면,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참하느님으로서, 죄로 말미암은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더 다가오시어 내 편과 내 짝이 되어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 앞서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며 서른 해 동안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평범한 우리 인간의 이웃으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네 인간 삶의 곡절과 파란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비로써 주님께서는 우리들 틈에 끼시어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시기를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참사람으로서, 인간이 겪는 죄의 상처와 분열의 근본 원인을 밝히시고 없애시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아픔과 타락의 바탕에는 늘 자신을 드러내고, 형제들을 내리누르는 교묘한 형태의 폭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질받는 죄인들 틈에 끼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주도권을 건네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겸손하게 걸어가는 길, 여기에 인류 구원의 핵심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 인류에게 희망이 찾아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머리 위로 홀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며 하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성부와 성령의 화답이요 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힘으로 당신의 남은 사명, 곧 공생활의 여정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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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1) 여기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뒤의 4장 2절에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상황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물의 세례’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 강림 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공관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르 1,14-15), 여기서는 예수님의 활동 시기와 세례자 요한의 활동 시기가 조금 겹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의 기록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라는 말은, “어떤 유대인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비교하면서, 어느 세례가 더 사람을 깨끗하게 하느냐에 관해서 시비를 걸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했음을 나타냅니다.
<뒤의 4장 1절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고, 세례자 요한에게 가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2)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라는 요한의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다.”라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라는 말은,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하고 사람들을 메시아께 인도하는 일을 하는 안내자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시다.”라고 요한이 증언했을 때, 몇 명은 그 증언을 믿고 예수님에게로 갔지만(요한 1,37), 요한의 제자들 대부분은 그냥 요한 곁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라는 말은, “너희는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나의 증언을 들었다.”라는 뜻입니다.
3)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라는 말에서 ‘신부’는 좁은 뜻으로는 그리스도교를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는 바로 ‘나의 잔치’이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잔치’입니다.>
‘차지하다.’는 ‘구원하다.’이고,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신랑 친구’는 결혼식에서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 즉 사람들을 메시아께 인도하는 일을 하는 세례자 요한을 뜻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은 내가 나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표시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질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의 뜻은, “이제 그분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나의 일은 끝났다.”입니다. 이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사명 수행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지만, 이 말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 수행은 끝났고, 이제 자기는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서 제 때에 물러나는 것도 겸손이긴 한데, 어떻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무엇으로도 예수님을 가리면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만 바라보다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음을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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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요한 5,14)
여러분은 기도를 하면 잘 이루어집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데 하느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걸까요?
그건 아마도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이 부족하던가, 아직 때가 아니던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에 따라 청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세 번째가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의 논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만 그분을 알 수 있고, 그분의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라 살다보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을 알게 된 사람은 복됩니다. 그 뜻에 따라 청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1요한 5,16 참조)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베푼 것은 요한이 원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세례를 베푸십니다. 요한이 시작한 세례운동이 예수님을 통하여 확장되고 완성됩니다. 물로 시작한 세례가 성령과 불로 완성됩니다.(루카 3,16)
요한에게서 배웁니다. 내가 시작한 일이 다른 사람을 통해 계속되고 확장, 발전되는 것이 더 큰 기쁨이란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 보통은 '원조' 논쟁을 통해, 먼저 시작한 나의 존재가치가 더 우월함을 증명하려고들 하지요. 원조 음식점들처럼 말입니다.
"나의 시작은 보잘것 없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욥 8,7 참조)라는 구절을 우리는 내가 이루어야 할 무엇으로 해석하기 쉬운데, 그 끝이 창대하게 되는 것은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여겨야 하겠습니다.
나는 시작한 것으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 보잘것 없는 시작을 창대하게 만들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면, 나는 또다른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나의 성장과 발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장과 발전을 보며 크게 기뻐하는 요한의 모습에 한참을 머무르면서, 내가 추구하는 기쁨과 행복은 어떤 것인지 다시한번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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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요한은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을 드러내었고, 예수님은 당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요한은 자신을 비웠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명하셨습니다.
겸손은 내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주님의 말씀과 뜻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도 듣지 못합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성취욕에 사로잡히면 주님의 말씀이나 다른 사람의 말은 귀찮게 들리고 권위의식으로 고집만 커집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은 하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가능성을 늘 열어놓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확신에 찬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더 먼 미래를 보며 두 발 뒤로 물러 날 줄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지나치게 확신하면 우리는 광적으로 됩니다. 지혜는 비판적으로 자신과 역사를 성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지금 또한 역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형태의 억압과 폭력은 겸손하지 않아 자신이 커지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서로가 커지려고 하면 분쟁이 생기지만, 서로가 작아지려고 하면 평화롭게 됩니다. 겸손을 몰라 자신의 뜻만 고집하면 시노달리타스의 지혜를 모으기보다 힘으로 사람들을 누릅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은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덕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듭니다. 힘으로 사람과 세상을 누르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기 위해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작아지고자 하는 요한의 마음은 겸손의 시작입니다.
작아질 줄 아는 겸손함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한 필수 덕목입니다. 작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요한과 주님을 거부하지만, 작아지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지혜로 평화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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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의 사회 친구 중에는 벌써 희망 퇴직한 친구들이 꽤 됩니다.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권했고, 이제 이 회사에 자기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퇴직하고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하는 일자리만 있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50대에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 참 속상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80이 넘는 나이임에도 서로 데려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이 최강야구의 감독이 바로 80대의 김성근 감독님이십니다. 최강야구 단장이 직접 찾아가 “감독님,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80대에도 취업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80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80대에도 사람들이 불러줄까요? 80대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지금 자리에서 일류, 즉 그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모습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들 만큼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고유함을 찾기보다 남들 따라 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면 끝까지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르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를 대치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남처럼’이 아닌 ‘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유함은 주님 안에서 그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때, 나의 고유함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던 사랑과 존경이 이제 예수님께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점점 줄어들고, 역사 안에서 사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원조 맛집이 있는데, 그 옆에 똑같은 메뉴로 식당이 생겼습니다. 원래 원조 맛집이 더 장사가 잘될 것 같지만, 오히려 나중에 생긴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입니다. 원조 맛집의 주인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옆집이 장사 잘된다고 기뻐할까요?
세례자 요한 역시 화가 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고유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이라는 자기 고유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기 목적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으며, 주님 뜻에 따라서 자기 고유함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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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나와 나의 그분 사이에>
요한 3,22-30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분의 나와 나의 그분 사이에>
욕심 가운데에 으뜸은
사람 욕심일 테지요
사람을 제 것 삼으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이에요
모든 욕심의 뿌리가
사람 욕심 아닐까싶네요
사람을 갉아먹는
온갖 더러운 욕심들은
사람 욕심의
또 다른 얼굴들이고요
돈이든 힘이든 자리든 연줄이든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안달하는 까닭도
그저 사람을 얻기 위함 아닐까요
자기 사람 만들려다 안 되니까
자기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의 사람이니까
시샘하고 미워하고 욕도 하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사람 사는 세상에 말이지요
내 사람 네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그냥 사람이지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그를 빚으신 분의 사람 말이에요
그분의 사람인 내가
그분의 사람인 누군가를
마치 그분 없는 나의 사람인양
어찌 나에게 얽어맬 수 있을까요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놓아주어야지요
오직 사람 내신 분에게 사람을
곱게 보낼 수 있도록 말예요
그분께서 앞서 보내신 내가 늘 그분처럼
모든 이를 정성껏 보듬어야겠지만
내가 결코 그분을 가리는
거추장거리 안 되길 바랄 뿐이죠
누군가 나와 함께 하기에
마냥 좋고 편하고 행복하다 한다면
나를 통해서 그분을 만났으리라 생각하며
살며시 옅은 웃음 지으면 그뿐이고요
어쩌다 누군가 나에게
그저 머물려는 듯싶으면
내가 아니라 그분이라며
한걸음 더 가라고 다독여야지요
사람을 내신 그분은 커지시고
그분이 내신 나는 작아져
나는 아쉬움 없이 사라지고
그분만 남는 언젠가 마침내
나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내가 아니라 나의 그분을 만나기를
사람 욕심 찌꺼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부족한 마음으로나마 기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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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고,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봅니다. 어떤 이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소신도 없어야 하고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고 합니다. 오늘날 정치판이 가관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헌신과 희생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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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나의 발견인 겸손>
-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를 깨닫는 과정은 나를 아는데에서 시작한다. 그 끝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알고 어진 자는 자신을 사랑한다.”<순자>
자신을 알아서 사랑하는 자가 지혜롭고 겸손한 자입니다. 지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매력적인 사람들이요 존재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흡사 예수님의 배경처럼 생각됩니다. 자기는 사라지고 예수님을 환히 드러내는 배경의 겸손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소망”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커져서
텅 빈 공(空)이 되고
작아져
흔적없는 무(無)가 되어 살 수는 없을까
물러나
하늘 배경이 되고
내려와
땅 마당이 되어 살 수는 없을까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무아(無我)의 삶이겠다
진아(眞我)의 삶이겠다”<1999.12. >
이런 경지야 말로 겸손의 절정이자 극치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고 세례자 요한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이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품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준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요한의 겸손한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흡사 두분이 경쟁관계에 있는 듯, 질투심이 날만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합니다.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반응이 그의 겸손과 지혜를 반영합니다. 마음이 투명하기가 가을 하늘같습니다. 전혀 질투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예수님의 존재가 하늘 섭리의 결과임을 깨닫는 지혜로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이듯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이 겸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충만하다. 그분의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랑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요, 신부는 우리 믿는 이들이요, 신랑의 친구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신랑 예수님의 기쁨은 그대로 세례자 요한의 기쁨입니다. 겸손의 기쁨, 겸손의 아름다움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배경처럼 자기가 전혀없는 세례자 요한의 순수한 마음, 아름다운 겸손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세례자 요한이야 말로 겸손의 모범입니다. 겸손의 여정은 날로 그분 예수님은 커지시고 나는 날로 작아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날로 작아질 때 나는 “없어지는(lose)”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참나를 “발견하게(find)” 됩니다. 예수님은 날로 커지고 나는 날로 작아질수록 참나의 실현이자 구원입니다. 자기를 잃음으로 자기를 얻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요한 사도가 말하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겸손한 이들의 청을 들어주시며,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지켜 주시어 악마가 손을 대지 못합니다.
제1독서 요한1서, 주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 역시 겸손한 분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겸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작아진 겸손한 사람, 사도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예수님께 정통한 요한인지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예수님을 알고 참나를 아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참 멋지고 아름답고 겸손한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요한이나 막상막하의 겸손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겸손입니다.
하느님께 태어나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참되신 분 하느님 안에서 있을 때 참나의 상실이 아니라 참나의 실현이요 발견이요 구원입니다. 요한 1서를 멋지게 장식하는 사도 요한의 마지막 말씀이 평생화두로 명심할 말씀입니다.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우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참된 겸손의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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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겸손과 세례>
오늘 복음은 내일 주님의 세례 축일을 앞두고 주님과 세례자 요한이 한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의 세례가 더 정통인지 설왕설래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지요. 그리고 두 분의 제자들 사이에는 경쟁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세례자 요한도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려는 분이 아니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분이고 그런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게 하는 분들이었으면 두 분은 경쟁하셨을 겁니다.
나란히 횟집을 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들어오게 하려고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꾼들처럼 경쟁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고, 요한은 자기를, 그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우리를 주님께로, 주님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그분들이 베푸는 세례이고, 우리의 세례는 그 인도를 따라 주님과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분 사이에 경쟁은 없고 서로를 추어줍니다. 주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 가운데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고,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오늘 복음에서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모두 하느님을 지향하면 그분 앞에서 모두 작아지지만, 세상에서 자기의 성공을 지향하면 서로 경쟁하며 커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경쟁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그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저 경쟁을 멈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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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거절도 수락도 사랑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믿는 바인데 요는 그 믿음이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그 확신인지 성찰케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단계와 정도가 있지요. 불신이 있고, 의심이 있고, 흔들리는 믿음이 있고, 흔들림이 전혀 없는 믿음 곧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불신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나 의문은 가질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은 차별이 없으시니 그에게도 주셨는데 그가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경우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셨지만 인간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주저하거나 변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뜻에 맞으면 다 들어주시지만 당신 뜻에 어긋나는 것은 청하더라도 주시지 않습니다. 마약을 달라는 자식의 청을 들어주는 부모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랑의 거절을 경험한 우리는 온당한 청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신할 수 있고, 그래서 이젠 하느님께 청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벌려고 하는데 이런 불신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는 거절도 수락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에서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하고, 그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요 더 큰 사랑 또는 다른 사랑을 위한 거절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선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왠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서 더 이상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나눔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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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1)세례자 요한의 믿음과 겸손!>
오늘 복음(요한3,22-30)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마련하러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로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가 아닌 주님의 세례인 예수님의 세례로 이동해 갑니다.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그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7-30)
이는 '세례자 요한의 분명한 자신의 신원에 대한 고백이자 신앙고백'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고, 자신을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로, 그리고 신부인 교회의 한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믿음과 겸손!'
믿는 이들이 머물고 있는 공동체 안에 세례자 요한이 간직했던 믿음과 겸손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인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와 삶의 공동체 안에 세례자 요한의 믿음과 겸손이 커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예수 그리스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믿는 이들이 모두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교황도, 추기경도, 주교도, 사제도, 신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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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요한 3,28)
<(2)파견된 사람들!>
오늘 복음(요한 3,22-30)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셨습니다.
자신을 신랑이신 예수님의 친구로 비유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견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파견된 우리들!
파견되었다는 것은 파견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들은 먼저 항상 겸손한 자세로 파견한 분의 뜻과 파견한 분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늘 기억해야 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수많은 성인성녀들'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3,27)
우리도 '파견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니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기쁘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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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작아지는 길을 기쁘게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또한
작아지는 길입니다.
작아질수록
단순해지는
이 길입니다.
자아의 집착을 벗고
주님께 순명하는
순명의 길입니다.
그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작아져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작아져야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작아진다는 건
비워낸다는 것입니다.
성탄은 작아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순간 작은 성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의 길이
작아지는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보다도
더 작아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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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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