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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정으로서의 정의’ 설파…정의를 정치철학으로 복귀시키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존 롤스의 ‘정의론’
롤스는 정의를 사회제도의 제1덕목으로 여기고, 자유와 평등, 효율과 형평 간의 균형을 모색한 철학자였다.
어느 시대나 분과 학문들을 가로질러 그 시대를 주도하는 개념이 있기 마련이다. 서구사회에서 1970년대를 풍미한 개념이 ‘정의’였다면, 1980년대는 ‘공동체’, 1990년대는 ‘시민권’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현재에는 ‘불평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등장에는 대개 천재적인 사상가의 기여가 절대적이다.
1971년 출간된 존 롤스의 대표저작 <정의론>.
1970년대 ‘정의’의 경우에는 1971년에 출간된 존 롤스(John Rawls·1921~2002)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정치란 무엇인가는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행정학·복지학, 그리고 철학과 역사학에까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권력 투쟁인 동시에 갈등 조정의 주체인 정치에 대해선 근대 이후 사회과학이 체계화되면서 숱한 토론이 이뤄졌다. 이러한 정치의 본질 못지않게 중요한 질문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정치가 불가피하다면, 정치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물음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갖는 의의는 정치가 가져야 할 규범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는 데 있다.
<정의론>이 펼치는 주장의 핵심은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 곧 정의라는 것이다. 정의로운 제도만이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고, 이런 정의로운 제도의 설계 및 운영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라는 게 롤스의 정치철학이다.
<정의론>은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롤스가 주창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정의를 철학과 정치학의 중심 주제로 복권시키고, 바람직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을 지식사회는 물론 정치사회 안에서 촉발시켰다는 데 있다. 지식인에게 최고의 영예는 자신의 이론을 청소년들이 배우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발표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어느 나라든 많은 교과서들은 롤스의 <정의론>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등학생들은 <정의론>을 통해 정의의 의미와 중요성을 학습하고 있다.
■‘자유적 평등주의’ 주창
<정의론>은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롤스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권리가 이익에 우선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토대가 될 수 없다. 양도할 수 없는 자유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그는 공리주의를 대신해 사회제도를 공정하게 운영할 수 있는 정의의 두 원칙을 제시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정의의 ‘제1원칙’이라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첫째, 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둘째, 그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에 결부돼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조정돼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
롤스는 제1원칙을 ‘자유의 원칙’으로, 제2원칙을 ‘평등의 원칙’으로 명명하고, 자유의 원칙이 평등의 원칙에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정의론>이 갖는 이론적 전제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사고의 실험이다. 원초적 입장은 개인이 ‘무지의 베일’을 쓴 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조건으로 이뤄져 있다. 롤스가 이런 원초적 입장을 제시한 까닭은 공리주의를 넘어서 타당한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려는 데 있다.
<정의론>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분배하는 ‘차등의 원칙’이다. 차등의 원칙을 통해 롤스는 기계적 평등이 소망스럽지 않은 상황에서 정당한 불평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를 추구했다. 자유주의의 문제의식이 권리의 동등한 분배에 있다면,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은 자원의 동등한 분배에 있다. <정의론>의 기본 문제의식은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비판을 수용하려는,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 효율과 형평 간의 균형을 모색하려는 데 놓여 있다. 롤스의 <정의론>이 ‘자유적 평등주의’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롤스의 <정의론>은 1970년대 규범적 정치철학을 부활시키는 중대한 출발점을 이뤘다. 그는 정치에 대한 당위적 질문에 응답하려 했고, 정치가 추구해야 할 정의의 원리들을 제시했다. <정의론>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마이클 노직이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1974)를, 마이클 왈저가 <정의의 영역들>(1983)을 출간함으로써 서구사회에선 규범적 정치철학에 대한 토론이 풍성해졌다. 롤스의 자유주의, 노직의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왈저의 공동체주의 등이 정치철학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셈이었다.
롤스의 정치철학에 대한 가장 주목할 비판은 왈저,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 마이클 샌델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공동체주의는 <정의론>이 과도한 개인주의의 이론적 가정에 기반해 있고, 인간의 공동체적 특성을 간과하는 추상적 보편주의에 기울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정의론>에 대해 제기된 문제들에 응답하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심화하기 위해 롤스는 <정치적 자유주의>(1993)를 발표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그는 보편적 도덕이론이 아닌 실천적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자신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펼쳐 보였다. 중첩적 합의, 옳음의 우선성과 좋음, 공적 이성이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은 기존 정의론을 현실적 차원으로 하강해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제도의 두 차원은 정치와 경제다. 경제가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게 목표라면,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바람직한 정치란 무엇이고,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롤스의 <정의론> 제1장 제1절을 시작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사상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롤스의 <정의론>은 황경식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됐다. 처음에는 책 제목이 <사회정의론>으로 옮겨졌다가 최근에는 <정의론>으로 바뀌었다. 롤스의 또 다른 주저들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만민법>은 장동진 연세대 교수 등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샌델 열풍’ ‘수저계급론’…여전히 정의에 목마른 한국사회
우리 지식사회에서 가장 주목한 정치철학자가 존 롤스라면, 시민사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정치철학자는 마이클 샌델(사진)일 것이다. 2010년에 우리말로 옮겨진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판사의 주장에 따르면 200만권이나 팔렸다고 하니, 적지 않은 집 서가에 이 책이 꼽혀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본이 출간된 미국에선 이 책이 10만권 정도 판매됐다는 점이다. 2010년에 다소 느닷없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우리 사회 특유의 소용돌이 문화다. 일단 소용돌이가 발생하면 그 구심력은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한다. 이런 소용돌이가 문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 역시 소용돌이를 비켜갈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책이 출간된 2010년이라는 시점이다. 이 책이 열풍을 일으킨 데에는 당시 우리 사회에 존재한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의의 핵심은 절차의 공정에 있다. 공정이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름을 뜻한다. 2008년 촛불집회,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는 권력의 공정성을 환기시켰고, 이는 정의라는 가치에 목마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때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대중적 권위를 가진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됐던 것이다.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경쟁은 공정해야 하고, 약자는 보호돼야 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공정한 경쟁을 중시하는 ‘경제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추구하는 ‘복지국가’가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데에는 이렇듯 정의에 대한 사회적 관심 증대라는 배경이 놓여 있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보수 정치세력마저도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으로 내건 것을 보면 정의의 열풍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현재다. 지난해 화제를 모은 ‘헬조선’과 ‘수저계급론’ 담론에서 볼 수 있듯, 결코 적지 않은 국민들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절차와 제도의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롤스가 지적했듯 국가를 포함한 정치사회의 제1과제다. 국민 다수는 정의에 대한 감각을 이미 갖고 있는데, 정치사회가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게 우리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정의에 대한 감각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가져야 할 제1덕목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