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 리 커티스라고 좋아하는 여배우가 하나 있다. 트루라이즈에서 아놀드 마누라로 나왔던 아줌만데, ‘조각상’들이 넘치는 헐리우드에서 보기드물게 소박한 마스크를 갖고 있는, 좀 만만해 보여서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배우다.
그 여배우가 처음 뇌리에 남았던 영화가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였다. 무척 흥미롭게 때로는 배꼽을 잡으면서 보았던 꽤 잘 만들어진 코미디물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베타’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다. 개량종 가운데 하프문베타라고 해서, 그 아름다움을 겨루는 세계대회와 이를 주관하는 국제협회까지는 있다는, 종어(種魚)의 가격이 백만원을 훌쩍 넘기도 하는 유명한 고기이다. 성어의 크기가 5~6센티미터 정도인 소형열대어로 국내에 시판되는 것들은 대부분 파란색이나 빨간색의 단색을 갖고 있다. 마치 드레스를 입은 것 같은 화려한 지느러미가 압권이다. 이런 외양의 화려함과는 달리 튼튼하고, 마리당 2천원 정도로 값도 싸고, 움직임이 많지 않아 좁은 공간에도 잘 적응하고, 먹이도 많이 먹지 않기 때문에 물갈이 부담이 덜해 초보자들도 손쉽게 키울 수 있는 어종이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올해 초부터 이른 바 ‘물생활’에 투신, 현재 이 노총각의 원룸에는 난태생 송사리과의 구피, 풍선몰리 등 7마리와 카라신과의 멸치들, 즉 실버팁과 네온테트라 몇 마리들이 두자짜리 어항에, 난두스기수어의 대표주자, ‘녹색복어’ 3마리가 한자짜리 소품수조에 입주해 있다. 아, 얼마전 난산으로 어미를 잃은 노란색 풍선몰리 치어와 그라스구피의 치어 10여마리가 별도의 치어전용어항에서 무럭무럭 크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겠다.
서너달 지나니까, 어항 내의 물도 완전히 잡히고(이른바 여과싸이클이 안정되었다는 의미) 튼튼한 놈들만 살아남은 탓에 더 이상 시체 치울 일도 없어져 조금 심심해졌다. 그래서 뭐 새로운 괴기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내 눈에 뜨인 것이 바로 ‘베타’였다.
원색은 슬프다.
PC모니터에서 처음 베타란 놈의 자태를 접했을 때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이었다. 열대어 쇼핑몰의 호스트는 ‘화려하여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는 어쩌구’라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사랑을 받고’ 있다는 베타는 슬퍼보였다. 목부분부터 꼬리까지 부채처럼 퍼져나온 원색의 지느러미에 뒤덮여 왜소하다기 보다는 함몰되었다 하는 편이 맞을 몸뚱이의 물고기 앞에서 조금이지만, 나는 섬뜩했다. 그래 이 놈이다. 다음 날 오후 나는 청계천7가 ‘물괴기시장’으로 나갔다.
종로에서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 방면으로 차를 달려 가다 처음 나타나는 6호선 지하철역에서 우회전하여 조금만 들어가면 사거리 오른편으로 ‘○○수족관’, ‘○○관상어’ 등의 가게들이 100여미터쯤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가 나온다. 청계시장이다. 애완용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가판에 내놓은 이구아나, 거북이 등속에 넋을 빼앗긴 애들이 내지르는 탄성과 비명으로 이 곳의 오후는 늘 번잡하다.
자, 이제 가판은 일별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수족관 특유의 역한 물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적응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열대어나 해수어의 매력은 생각보다 훨씬 위력적일테니까. 어느 가게건 좌우로 펼쳐진 축양장에 한두자짜리 소형수조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것이다.
열대어의 지존이라는 ‘디커’종류는 그냥 눈요기만 하자. 초보에게 ‘디커’는 그림의 떡이다. 회도 못 떠먹는 몇 가지 대형어는 눈길조차 주지 말자. 들릴 때마다 느끼게 되겠지만, 벽에 붙어 이끼를 없애준다는 새끼손가락만한 어린 ‘비파’의 특이한 모습이나, 새끼에 대한 애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니그로’는 언제나 유혹의 대상이다. 그러나 최대 3~40센티까지 큰다는 비파나, 탁월한 번식력의 10센티짜리 니그로는 대부분 한두자짜리 인테리어 수조가 고작일 초보들에게 ‘배보다 큰 배꼽’일 뿐이다. 가장 대중화되어있다는 시클리드종류들 앞에서 나같은 송사리 예찬론자들이라면 ‘역시 못된 놈들이군’하며, 그옆의 착하고 튼튼하기로 최강인 멸치들, 카라신과 괴기들에게 지지와 격려의 눈길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축양장 하단의 어느 수조에서 수면 위를 가득 뒤덮고 있는 수십개의 비닐봉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절반쯤 물이 담긴 각각의 비닐에는 빨갛거나 파란 물고기가 정확히 한 마리씩 들어앉아 지느러미를 ‘펄럭이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놈이 베타다.
왜 비닐봉지일까?
왜 다른 열대어들처럼 넓은 수조를 유영하는 대신, 겨우 속찬 사과 한 알 크기만한 비닐속에 갇혀 주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느러미와 가장 깊은 원색을 지녔음에도 왜 이들은 축양장 하단 그늘 밑에서 비닐에 뒤덮여 부유하고 있는 것인가?
베타는 같은 공간에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도 용납하지 않는다. 일부 고수들이 제브라 같은 고기들과 합사하여 키우고 있긴 하다지만, 대원칙은 합사불능이다. 특히, 같은 베타끼리는 절대적으로 합사가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가 죽어 ‘걸레(베타의 지느러미를 생각해보자)’가 될 때까지 전투를 그치지 않는다. 짝짓기를 위한 아주 찰나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한 어항에 두 마리 이상의 베타는 키울 수 없다. 베타는 자기의 공간에 자기 이외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허용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세상에 베타는 많다.
재미있는 것은 청계시장말고도 여러 곳에서 베타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당장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 표를 찍어주면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을 돕게 되는 것이라던 모 유명의원의 모습은 영낙없이 화려한 베타의 모습, 그대로다. 멀리 볼 필요가 무에 있을까. 내 생활 자체가 베타 천지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나는 철 지난 탄핵논쟁 끝에 친한 친구를 상대로 욕지거리를 뱉고 말았다. 이런 모습은 예전 대학시절의 버릇을 아주 버리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인데, 나는 아직도 화합 보다는 대립에, 토론보다는 논쟁에, 공존보다는 독존에 익숙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변하고 있고, 또 많이 변한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아직도 세상의 너무 많은 것을 상대로 저주하고 독설하고 비난하며 산다는 것이다. 한 때의 나는 그것을 두고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자족했지만, 사실 그 따위것들은 치열함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임을 그때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은 그저 동원된 ‘알리바이’였을 따름이다. 나는 정확히, 남루한 지느러미를 끌어안고 수면위를 부유하는 비닐봉지에 담긴 합사불능의 베타였다. 나는 그 날 빈 손으로 청계시장을 떠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원색과 고독을 좋아한다면, 이 놈을 키워보라 권하고 싶다. 우선은 커다란 와인잔 하나가 필요하다. 잔의 3분지 1정도만 수돗물을 받아 하루 정도 염소가 제거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가까운 열대어샵에서 베타 한 마리를 사와 비닐봉지에 든 물과 함께 와인잔에 넣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물은 일,이주에 한번, 절반정도만 갈아주면 된다. 사료래야 하루에 한두번, 심지어 일주일을 굶겨도 죽지 않는다.
화려해서 놓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어떤 가혹조건에서도 튼튼히 살아남는 강인한 생명력의 베타. 이 놈의 아름다운 유영을 지켜보며, 좀 더 아름다운 꿈, 이를테면 ‘다른 베타와의 합사’따위를 꿈꾸어보는 것도 각별한 즐거움이 아닐까.
첫댓글 오랜만에 오셨네여 여전이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며 저도 베타라는 녀석을 키우면 이 긴긴 여름밤을 견딜수 있을까? 하는 망상에 빠져 봅니다.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긴한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가게 될까.. 겁난다.. 회사에서 키워볼까.. ㅎㅎ
오랫만이군요 함성님^^무더위에 건강조심하시기를...
'다른 베타와의 합사'.........흠..........오묘하고도 신비로운지고.......형~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는 모르는게 없으셔..
완다라는 물고기 ... 좋은영화지요. 즐겁고.
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