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재 이카드 프롤로그

[재여니]

이카드

作者 太上老君

프롤로그

"에구, 허리가 시려오는 게 아무래도 가을이 다 되긴 했나본데."

등 뒤에 나있는 창문을 향해 의자를 돌려놓고 앉은 채, 멍하니 낙엽의 떨어지는 모습을 회색 눈동자로 좇던 룬드는 한숨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늘어놓으며 괜히 호리호리한 허리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올해로 53세, 마법사로서는 한창때의 시작이라지만 육체적인 면으로는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는 나이인지라 전에 없던 통증만큼이나 기분도 쓸쓸해진다.

"...... 정말이지 스승님 따라다니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시절만 해도 팔팔했었는데."

10년 전, 100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저승길로 떠나버린 스승, 로웬의 모습이 떠오르자 차가운 인상을 주는 룬드의 얄팍한 두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평생동안 내내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던 스승에 비해 제자란 작자는 늙었다며 궁상이나 떨고 있다니. 하지만 표정과 달리 스승과의 기억은 업무에 지친 가슴 속을 훈훈하게 데워주었고 덕분에 룬드는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스터."

무감동한 파동을 간직한 목소리, 그 바람에 추억의 고리를 끊겨버린 룬드는 날카롭게 벌어진 눈자락 끝에 심한 주름을 그리면서 창문에서 등을 돌렸다. 반중력 마법이 걸려있는 사무용 의자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반바퀴를 돌자 드러나는 다란 양식의 책상, 룬드는 오른편에서 비취색을 옅게 뿜어내는 수정구슬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엘다임?"
"마스터, 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엘다임,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분명히 오늘은 월말업무검토 때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알고있습니다, 마스터. 그래서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손님께선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그런 막무가내가! ......설마."

자신의 사무실을 포함한 왕실마법사단 본부의 관리를 맡고있는 패밀리어의 이름을 질책하듯 불러대며 언성을 높이던 룬드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맛살을 아까보다 더 고민스럽게 찌푸리며 검지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초조하게 두들겼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고 패밀리어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마...... 마스터, 더 이상 침입자가 시전하는 해제술을......"

잡음 섞인 패밀리어의 말이 꺼져들고 동시에 자신의 지시 이외에는 절대로 쉽게 열지 못하는 출입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힘없이 열렸다. 적어도 룬드의 마력에 버금가는 수준을 가진 마법사의 무단 침입. 하지만 룬드는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은 듯 처음 모습 그대로 태연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열려진 문 사이로 하얀 로브를 걸친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날카로운 눈을 내리깔며 말을 걸었다.

"제법 실력이 늘은 모양이군. 내 주문을 쉽게 해제한 걸 보니 말이다."
"그것 참, 고맙다 못해 눈물 날 칭찬이군요."

배배꼬인 대답을 내뱉으며 들어선 침입자는 스무살을 갓 넘긴 여성이었다. 화사한 금발에 가을 하늘을 닯은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미녀, 잘록한 허리선을 검은 띠로 묶어 금실로 수놓은 로브를 고정한 그녀의 자태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다만 성난 암코양이 마냥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꼬리가 꽤나 사나워 보였는데, 얄팍한 콧등에 걸쳐진 안경 너머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성질 사나운 표정을 쳐다보던 룬드는 오른손을 수정구슬에 올려놓고 천천히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 하지만 상대를 재어보지도 않고 천방지축 날뛰는 성품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구나."

수정구슬에서 은은한 파란 빛이 뿜어지고 동시에 룬드의 책상 앞까지 기세 좋게 다가가던 침입자의 몸이 거칠게 퉁겨졌다. 입구까지 밀려나간 침입자는 눈을 더욱 매섭게 뜨면서 성질을 부렸지만 룬드의 힘은 이번엔 투명한 사슬이라도 된 모양인지 그녀의 몸을 조여들며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하였다.

"불만이 있으면 우선 대화부터 해봐야지. 무작정 폭력부터 쓰다니, 카테리나."

끈끈이에 엉겨붙은 벌레 마냥 꼴사나운 자세로 벽에 달라붙은 여성에게 들려오는 룬드의 말, 하지만 그의 가느다란 눈 속에서 쌤통이라는 감정을 읽은 카테리나가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훗, 패밀리어 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놓은 데 기분 상한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포스 필드를 쓰는 사람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네요."
"글쎄, 확실히 포스 필드라면 심하긴 했지. 하지만 나도 전처럼 멱살이 잡힌 채로 이야기를 나누긴 싫거든."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은 채 룬드가 대꾸하자 카테리나의 파란 눈동자엔 옅은 절망이 스쳐지나갔다. 그 말은 그녀가 매번 써먹은 육체적 위협이란 수단이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치밀하게 자신의 몸을 눌러오는 포스 필드의 힘이 카테리나는 새삼 답답하게 느껴졌다.

"자, 그럼 모델리노 모르헨테여. 무슨 일로 이 인사부장을 찾아온 거지?"

굳이 12등급 중 4등급에 해당하는 자신의 직급 명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룬드. 그 의도야 뻔했다. 오늘만큼은 같은 사부를 모시며 사이좋게 지내던 아저씨가 아닌 철저한 상관으로 대하겠다는 뜻. 이것으로 또 다른 수단인 칭얼대기도 쓸모가 없어진 셈. 어쩔 수 없이 카테리나도 하급자로서 예의를 담아 대답을 꺼냈다.

"이번 인사발령에 관해서 불만이 있습니다, 아라킨 델로아."
"아, 그래. 분명히 부대장으로 임명되었지. 그런데 불만이라니? 윗사람 눈치 보는 거 싫어하는 자네 성격을 감안해서 이번 인사를 추천한 건데, 이상하군."
"부대장도 부대장 나름이죠."
"무슨 말이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룬드가 되묻자 카테리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사납게 뜬 눈동자로 그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빈정거리던 목소리를 뾰족하게 세우며 룬드의 얼굴에 쉴새없이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로란드 코로니아라는 정규 부대에서 오우거 동굴의 봉인라던지 엘-라이드의 마법방어력을 개량한 것 등, 많은 공적을 세우고 있는 마법사가 한적한 수도 주변의 조그만 마을에서 폐물이나 실패작들이나 처리하는 루르 코론의 대장으로 임명 받으면 기분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아니, 그래도......."
"아, 그래요. 물론 저도 슬슬 지휘관으로서 경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싶은 거겠죠. 하지만 굳이 신형 엘라이드를 개발하는 카슈로토 코론이라던지 요룡 테르나딘의 봉인지를 지키는 나르빅 코론 같은 곳도 놔두고 왜 하필 그런 곳을 고르신 거죠? 어디 납득할 만한 변명을 해보시죠?"

잠시동안에 불과했지만 카테리나의 말에 있는 대로 들쑤셔진 머리가 아파오는지 룬드는 이마를 짚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찬찬히 숨을 고르는 카테리나를 완전히 질렸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 내가 준비해 놓은 말을 잘도 미리 말하는 구나."
"워낙 뻔한 답변이니까요."
"하긴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린 룬드는 수정구슬을 매만졌다. 그리고 포스필드가 풀린 게 믿어지지 않았는지 팔다리를 주무르는 데 정신 없는 카테리나를 묵묵히 쳐다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직 어리긴 어려."
"네?"
"아아, 아니. 그것보다도...... 카나. 네 불만은 이해하지만 역시 이번 임명은 순순히 받아들였으면 좋겠구나."
"룬드 아저씨!"
"물론 장로회에 이의를 신청하면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인사가 결정될 수 있겠지. 하지만 카나야, 국경지방에서 있던 너는 잘 모르겠지만 로웬 님이 돌아가신 후로 궁정마법사들끼리 파벌 경쟁이나 암투가 심해져서 말이다, 자칫하면 너 같이 우수한 신진마법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질시에 제거되기 십상인 상황이구나. 그러니까 한 일 이년 자중한다고 생각하고 루르로 가주었으면 좋겠구나."

창문 너머에서 죽은 잎사귀를 떨구는 나뭇가지의 앙상한 모습만큼이나 쓸쓸한 표정을 짓는 룬드에게 카테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멱살도 잡게 할 정도로 얄밉게 냉정하긴 했지만 자신의 사부이자 양아버지인 로웬 뮨 모르헨테의 제자 중에 은근하면서도 가장 확실하게 챙겨주는 이는 룬드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이번 결정이 섭섭하긴 했지만 룬드가 저런 표정까지 짓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카테리나는 다소 맥빠진 투로 중얼거렸다.

"하는 수 없죠. 언젠가 현자의 탑에 들어가기 전까진 까라는 대로 까야지 별 수 있겠어요?"
"...... 미안하다."
"됐어요. 그런 상투적인 말. 그리고 정 미안하면 다음 인사발령 때엔 좀더 신경써달라구요. 아무튼 이젠 볼 일 다 마쳤으니까 이 모델리노는 이만 작별을 해야 겠군요. 그럼."

사과를 구하는 룬드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 카테리나는 들어올 때 만큼이나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를 밟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기능을 온전히 회복한 패밀리어에 의해 조용히 문이 닫히자 그녀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룬드는 아까보다 훨씬 괴로운 주름살을 이마에 그리며 중얼거렸다.

"...... 이젠 너만이 스승님의 유일한 제자가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미안한 거다. 너나 스승님께."

제목이 좀 썰렁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무튼 시작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긁적이느라 연재 속도는 느리겠지만 아무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크v의 글틀 

[[康銘]명이v]

<이카드>라.. 아직 무엇을 뜻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히 흥미롭군요. 언젠가 더 많은 내용을 연재하시면 감상 한 번 써야겠습니다. 물론, 그 감상의 질에 대해서는.. [...]

[_Karych_]

소설을 전개하면서, 상당히 재미있어 질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키릴]

언제나 프롤로그는 의미를 깊이 두지요,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