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 그는 지난 25일 말기 암 치료를 받던 병원 관계자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은 본인의 진짜 이름을 쓰고 싶다고 털어놓았는데 29일 세상을 떠났다고 일본 언론들이 전했다.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올해 70세 생일을 맞는 기리시마 사토시는 1975년 도쿄의 한 건물에 폭탄을 숨겨놓은 뒤 터뜨려 파괴한 뒤 추적을 피해 50년 가까이 다른 이의 신원으로 살아왔다. 일본 전역의 경찰서 담에 붙여진 포스터 속 현상 수배 전단에서 웃고 있는 머그숏이 지난 반 세기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극좌 성향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은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도쿄의 여러 기업체 건물에 폭탄 테러를 저질렀는데 기리시마는 그 소속이었다. 이 단체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 운영 반대와 아시아에 대한 연대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가장 대표적인 폭탄 테러는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건물을 공격해 8명의 목숨을 빼앗은 일이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미쓰비시는 과거 식민주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중추로 활동하면서 사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시체를 뜯어 먹는 기업이다. 이번 폭파는 일제의 침략기업과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밝혔다. 한국인 김미례 감독이 이 단체의 연쇄 폭탄테러 사건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다.
기리시마는 1975년 4월 18일 도쿄 시내 긴자 거리의 한국산업경제연구소가 입주한 건물 일부를 폭파하려고 손수 제작한 폭탄을 설치했던 것으로 일본 경찰은 보고 있다. 그는 이 연구소가 일본 전범 기업에 한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거점으로 보고, 일본 경제인의 방한을 반대하기 위해 이런 짓을 꾸몄다.
그 뒤 감쪽같이 사라졌던 그가 다시 정체를 드러낸 곳은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시의 한 병원이다. 그는 말기 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이 기리시마가 맞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신체 조건이 비슷하고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가족 관계 등을 털어놓은 점에 비춰 본인이 맞다고 보고 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전갈반' 멤버로 경찰은 1975년에 놓친 이후로 전혀 행방의 단서를 잡지 못했다. 히로시마현립 오노미치북고교를 졸업하고, 1972년 4월 메이지가쿠인대 법학부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중 구로카와 요시마사와 우가진 히사이치와 만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반'을 결성했고, 일련의기업폭파사건에 관여했다. 폭탄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반'이 출판한 '복복시계'에 실린 제작법을 따라, '늑대반' 소속 약제사 다이도우지 아야코가 직장에서 횡령한 약품들로 제조한 것이었다.
다른 멤버들이 일망타진되었을 때 우가진과 함께 체포를 면하고 도망쳤다. 경찰은 조직에서 가장 막내 격인 둘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는데, 쿠로카와의 집에서 두 사람의 열쇠가 압수되면서 비로소 존재를 포착해 지명수배했다. 우가진은 7년 만인 1982년 체포됐지만 기리시마의 행방은 묘연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들 가운데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멤버다. 또 멤버 가운데 별건의 전과가 없는 유일한 멤버였다.
기리시마는 1987년, 1989년, 1990년에 여러 차례 지정공개수배된 10대 흉악범 가운데 한 명이며, 1987년 한 해에만 수배전단이 700만장 인쇄돼 전국에 뿌려졌다.
어떻게 반 세기 가까이나 거짓 신분으로 살 수 있었을까? '우치다 히로시'란 이름으로 입원해 위암 말기로 치료받고 있었다. 해외 여행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도피 중 해외에 있었다고 보이는 여러 자료가 발견됐다. 가나가와현 후지사와 시의 한 공사업체에서 일하며 낡은 목조 2층짜리 6평 기숙사에 혼자 거주했음이 밝혀졌다. 이웃들은 그를 오카야마현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운전면허증이나 보험증, 금융기관의 계좌 등 신분을 증명할 만한 서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월급은 전부 현금으로 받았다고 전해졌다.
친척은 시신 인수를 거부했으며 경시청은 복수의 친척에게 DNA 자료를 제공받아 기리시마 본인으로 확인되면 용의자 사망으로 불구속 입건할 방침이다.
1월 31일 일본 민영방송 TBS 보도에 따르면 기리시마는 후지사와시의 한 공장에 채용됐다. 종업원 소개로 그를 만난 공장 사장은 그에게 “본 적 있는 것 같다”면서 “수배 전단 사진에 있는 사람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농담 마세요, 저 아니에요”라 눙치고 사장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고 다음날까지 공장을 찾아 근무했는데 2~3일쯤 지나 출근하지 않았다.
공장 사장은 "안경은 쓰지 않고 있었다. 얌전하고 과묵했고, 일을 열심히 했다”고 돌아봤다. 2년쯤 뒤에 우연히 재회했는데, 이때 ‘우치다’는 “후지사와 한 토목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그는 이 토목회사에서 50년 가까이 일하며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치다’란 인물은 단골 술집 직원과 직장 동료들에게 ‘우얀’ ‘웃치’란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원만히 지냈다. 그가 1999년쯤부터 월 한 차례씩 다닌 술집 직원들은 “여느 아저씨와 다를 게 없었다. 음악 듣는 걸 특히 좋아했다”고 돌아봤다.
기리시마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는지 여부도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반일무장전선 멤버들은 미쓰비시중공업 테러 후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자 “숨지거나 부상한 사람은 무고한 일반 시민이 아니다. 식민자”라고 성명을 통해 강변했다. 다만 대다수 조직원이 체포된 후엔 재판이나 저작물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마이니치신문은 무장전선의 테러로 숨지거나 다친 피해자들과 희생자 유족들이 기리시마에게 이런 테러를 벌인 이유를 밝히고 사죄할 것을 바라고 있다고 전했는데 그가 임종 전에 이런 반성과 회한을 남겼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