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학 순
루소는 <사회계약설> 제3장에서 “최강자라 할지라도 힘을 정의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으면 항상 강력하지는 않다”고 했다. 방법이 무인가? 그에 의하면 사회 내부의 제도적 조직망과 거기 구성원의 정서적 친화력을 어떤 초월적 전제에 결합할 신조가 존재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다니엘 벨은 이렇게 말했다. 근대사회는, 고대사회나 중세사회와 달리, 어떠한 방법으로 든 사회성원에 대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광범한 문맥에서 이데올로기(ideology)의 기능은 가치의 구체화, 즉 좋은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규범적 판단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가장 강제적인 사회에서 조차도 그 강제의 정당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 전체를 강제수용소로 만들지 않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을 정당성의 기반인 정통성에 전임(轉任)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북한 독재정권의 ‘백두혈통’주의가 생각난다] .
오늘날, 통상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어떤 힘 — 정치력, 금력, 무력, 필력, 명성 등 — 을 배경으로 자기 또는 자기 집단의 생각이나 가치를 전체의 생각이나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러므로 순수한 이념과 달리 다소 또는, 경우에 따라, 매우 부정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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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ology는 생각이나 관념을 뜻하는 희랍어 ‘idea’와 학문 또는 연구를 뜻하는 ‘logie’의 합성어다. 18세기 말엽 프랑스 계몽주의철학자 트라시(A. D. de Tracy)는 인간의 관념이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하는 지를, 신앙과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이론화 하고자 했다. 그는 관념을 감각지각(sense perceptions)으로 환원함으로써 관념이 신앙과 권위로부터 정화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념의 과학(science of ideas)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D. Bell, 1967, The End of Ideology, p. 395)
그 용어의 부정적 함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시작된다.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다진 그는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인 학사원에서 윤리학과 정치학 강의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도덕과 애국심을 파괴하는 무책임한 이론가들을 이데올로기주의자(ideologue)라고 비판했다. 공화주의자로서 나폴레옹은 철학자들 사상에 공감했지만 1804년 황제 자리에 오른 그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 정통성(orthodoxy)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ibid, p. 395)
19세기 중엽 마르크스와 함께 ‘이데올로기’라는 말의 뜻이 다소 이상하게(curiously) 변환된다. 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사회적 장치라는 것이다 (ibid, pp. 395~397). 마르크스가 이처럼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론에 사용하면서 그것의 현대적인 일반적 의미가 이렇게 자리 잡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특정 지배집단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공유된 생각이나 신념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집단 간에 체계적이고 뿌리 깊은 불평등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 발견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집단이 보유한 차등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A. Giddens, 1989, Sociology, p. 727)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구조주의자 알뛰세(1918~1990)에서 이데올로기는, 거짓된 허위의식일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개인이 주체로 형성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핵심개념이다.
그의 1970년 에세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어떤 관념적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담론, 실천을 뒷받침하는 믿음이고 의미이다 (D. Macdonell, 1987, Theories of Discourse, p. 27). 이데올로기는 관념적인 어떤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를 형성하는 가족, 교육, 종교, 정치, 법, 노동조합, 언론 등 존재물을 가진 제도 곧 국가장치들에 들어있으며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이데올로기를 생산/재생산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서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의식은 [불가불]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다” (ibid, p. 27).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 의식으로써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누구도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삶을 살 수 없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홍길동은 조국의 위대한 영웅이다’는 내용의 담론(discourse) − 철학적, 정치적, 문학적, 종교적 등 특정 맥락 속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언어활동(말하기, 글쓰기) − 을 반복한다. 이것은 말하기, 글쓰기를 통해 어린 학생들의 의식에 이데올로기를 심는 것이다[세뇌]. 이에 커가는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 의식’으로써 생각하고 실천한다.
알뛰세르의 분석에 의하면, 법은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더 잘 반영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우리는 누구나 ‘법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가상관계(immaginary relations) 속에 살고 있음에도, 그 가상관계를 실제관계(real relations)로 생각하고 실천하게끔 하는 의미의 체계 또는 믿음의 체계이다 (ibid, p. 27).
뿐만 아니다. 알뛰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 의식’을 가진 개인은 불가불 이데올로기적 생각과 실천으로써 스스로 주체를 형성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인 언론이나 학교나 법정에서 당신을 ‘시민’으로 호명(interpallation)해서 담론하면, 어릴 때부터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 의식이 형성되어 온 당신은 스스로 그 호명에 맞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존재 곧 ‘이데올로기적 주체’이다.
이쯤에서 글을 마치도록 하자.
이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해 뒷바침 된 북한의 3대세습 독재체제가 생각났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거기 독재적 일들, 독재적 광경들이 문득문득 생각에 떠올랐다.
언론에서, 인민의 입에서, 인민대표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 천편일률적인 말, 말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세습독재자에 대한 그 열광적인 꼭두각시적 찬사와 몸짓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리박스쿨이 생각난다.
전 리승만 대통령, 전 박정희 대통령. 이 두 분의 성함을 딴 리박스쿨이다.
그 스쿨 설립자들의 목적은 두 분의 국가적 업적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두 분의 국가통치 방식과 과정의 정의로움과 정당성을 일찍부터 학생들 의식에 ‘리박주의’ 이데올로기를 심는 것일 것이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으니 그 설립자와 열렬 협력자들을 함 보고싶다. 도대체 어떤 면면들인지?
두 분을 팔아서 내심 대를 이어 자신들의 모종 이익을 꾀하고자 하는 사람들 아닌지.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한 상태라고 좌우를 떠나 전국민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나라가 둘로 쪼개질 판이라고 걱정들 한다.
그런데도, 애국에 찬 표정으로 떵떵거리며 대문짝만하게 ‘리박스쿨’이라니!
그 애국이 과연 지하의 두 분께서 진정 원하시는 애국방식일까?
전인권이 생각에 떠오른다.
그렇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지요.”
우리 다 함께 노래 부르면 두 분께서 ‘그래, 바로 그거야!’ 흐뭇해 하시지 않을까…
<kang40la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