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7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오 5,20ㄴ-26)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백성의 회개를 독려하고 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화해’에 대해 가르치시며 형제를 미워하고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은 살인의 시작과
같다고 하신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이 좋을 때는
우애롭고 화평하다. 문제는 화가 날 때이다. 분노를 잘 다스리는 것이 조화로운 삶의 비결이다. 누구나 분노할 수는 있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화났을
때 결정하지 않는다.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는 최악의 결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조’(야마기시즘 실현지 창설자)라는 농부는
어린 시절 ‘사람은 왜 화를 낼까?’라는 물음으로 10년을 궁리했다. 그는 마침내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하는 데 행복한 삶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벼농사와
양계에까지 적용했다. 재세례파인
‘부르더호프 공동체’ 가족은 예배가 시작되면 먼저 감정이 상한 형제를 불러 밖으로 나가서 화해하고 들어온다. 예물을 바치기 전에 그렇게 하라고
복음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길어져 예배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예배보다 용서와 화해를 더 소중히 여기며
사이좋음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믿음에 충실하다. 그들은 대화할 때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마태 18,15)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사랑으로 직접 말하기’라 한다. 기질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공동체 관계가 좋지 못하여 문제의 장본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다른 사람의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기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믿음을 버리고, 타인의 허물을 들추지 말며, 화났을 때 말하지 않기만 실천해도 놀랍게
변화될 것이다.
1984년 미국,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었던 아이오와 작은 마을의 한 초등학교에서 “흑인은 더럽고 나쁜 사람들이에요.”라는 아이들의 말에 교사, 제인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재밌는 실험을 했습니다.
우선 갈색 눈과
파란 색의 두 집단으로 나눈 뒤, “파란 눈이 갈색 눈보다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아이들이다.”라고 말해주고 파란 눈 아이들에게 수업시간 무한
칭찬, 급식시간 먼저 식사, 쉬는 시간 먼저 놀이기구 사용, 더 오래 쉬기 등의 특권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갈색 눈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교사의 차가운 태도였지요.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갈색 눈이
열등하다는 편견이 빠르게 전염되었습니다. 파란 눈 아이들은 갈색 눈 아이들을 무시하고 괴롭혔지요. 결국 하루 만에 친구가 원수가 되었고 학급은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교사는 “사실은 파란 눈보다 갈색 눈이 더 우월하단다.”라고 말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이제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아이들 모두 번갈아 편견을 경험한 뒤 실험 종료하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말 한마디로
너희들이 서로 괴롭힌 것을 봐라.”
교사인 제인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파란 눈과 갈색 눈의 차별에는 근거가 없었음을 고백하고 “눈의 색깔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눌 수 없듯, 피부 색깔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인종차별이 얼마나 근거 없는 행동인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14년 후, 성인이
된 아이들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때 그토록 짧은
시간에 나에게 악마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에 놀랐어요.”
편견은 이렇게 내
안에 악마 같은 마음을 생기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얼마나 이 편견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이들이 옛 계약의 교사들보다 훌륭한 사람이길 바라십니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당시에 못된 사람으로 평을 받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로 인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얼마나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지 보통 사람들은
따라할 수도 없고 그래서 감히 그들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엄청난 말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율법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준수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들을 해야만 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던 것은 율법의 준수 때문이 아닙니다. 철저히 율법을 지키기는 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 인간의 칭찬과 세상의 영광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모습이 아닌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편견 없이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모습, 한 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모습, 약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스스로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될 때 하늘 나라는 활짝 열릴 것입니다.
제나라 재상 관중은
전쟁 통에 길을 잃었을 때 늙은 말을 풀어 길을 찾았습니다. 젊은 말은 빠르지만 늙은 말은 지름길을 압니다. 세월은 지혜입니다. 머물지 않는
세월, 나이 듦은 복입니다(이영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요즘 사람들의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강아지를 키우는 이유는 외로움을 덜고 위안을 얻으려하기 때문이라고 많이 말씀하시는데요. 문제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고, 대신 강아지에 대한 사랑만 커진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집에 가면 아무도
반겨주지 않지만, 우리 집 강아지는 나를 정말로 기쁘게 반겨준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개는 배신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에는 애를 낳는 집은 줄지만, 강아지 기르는 집은 늘어난다고 하더군요. 조만간 15세 이하의 아이보다 강아지가 더 많은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해외토픽의 기사처럼 애완견이 유산을 받는 시대가 올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대한 불신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똑같이 불신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역시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불신이 가득합니까?
먼저 믿으십시오. 미움이 가득합니까? 먼저 사랑하십시오.
내가 먼저 바뀌어야
주변도 바뀝니다.
하느님이 무지
싫어하시는 것 -이기정신부-
사람이 부르는
아름다운 많은 노래에서 대표적 단어는 사랑일 겁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사람일 겁니다. 사랑에 죽고 사는 인생 맞지요? 그런데 점점 대상이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자신, 재물, 권력, 등으로요.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며 창조된 인간은 외모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았으니 우리도 사랑밖엔 할 줄 몰라야 맞아요. 사랑의 반대인 욕, 흉
같은 걸 하느님은 무지 싫어하시는 것도 맞지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오
5,22)”
<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
-전삼용신부-
어떤 분이 자신
안에 안 좋은 성향이 있어 벗어나려 해도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한다며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죄를 지을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 지옥에 갈 것이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끔은 우리
삶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이 자신 안에 있다고 느끼고,
자신은 그렇게
가리옷 유다처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뱀이 한 마리씩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 뱀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뱀이 있어야 자유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는 것이 결국 영원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알아야합니다.
뱀은 나를 유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나는 뱀과
하느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존재입니다.
자신이 뱀과
하나라고 느끼며 선택권을 포기한다면 그것 자체가 죽음인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박진식씨가 쓴
책입니다.
그분은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다들 우량아라고 부러워할 만큼 건강한 유년 시절을 보내었답니다.
그런데 일곱 살
무렵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답니다.
아홉 살이 되자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답니다.
우리는 잠시 그
책의 서문만이라도 읽어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의
몸이 점점 돌로 변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믿기 어렵겠지만
제게 바로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불가사의한
질병의 열쇠는 인체에 꼭 필요한 칼슘의 쓰임새에 있습니다.
칼슘은 뼈를 만드는
석회(石灰)물질이라서 인체가
필요로 하는 양보다 부족할 경우 골격 형성이 지체되거나 뼈에 공간이 생기는 골다공증이 발생합니다.
반면에 필요한
양보다 지나치게 많이 생성될 경우에는 남아서 필요 없게 된 칼슘이 서로 뭉쳐져서 석회석이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몸을 돌로
만들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칼슘의
저주’가 제 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학 용어로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앞의 문장을
과거형으로 말했습니다.
아미
25년 전에 시작된
증상인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20년 전에 저의
증상을 한마디로 ‘불치병’이라고 진단하면서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서른둘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세월보다 두 해를 더 살았으니 기적이다 싶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아도는 칼슘이
온몸에 가득 쌓여 결국 신체의 마지막 보루인 심장까지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증상이란 심장을
손아귀에 쥐고서 서서히 조여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칼슘에 포위당한 온몸의 고통으로 인해 혼수상태가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십 년이
넘도록 죽음을 유보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생사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가호도 있었겠지만 운명의 장난에 굴하지 않으려는 저의 의지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없었다면 저는 병원에서 말한 대로 오래
전에 생명의 끈을 놓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 병은 이미
병원의 손길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그 흔한 진통 주사 한 대 제대로 맞지 못하고 원시인처럼 견뎌냈습니다.
그렇다고 제 병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악화되고 있지만 그 육신의 절망을 견뎌냈을 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폐마저 30%
정도 석회화가 끝난
제 몸은 이제 한계에 다다라 내일을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한다 해도 제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잔혹한
생매장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절망과 굳세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족하나마 제 삶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역사(役事)였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의
눈물겨운 투쟁이었습니다.
남들은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남긴 저의 인생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비록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없지만 예정된 운명보다 십수 년을 다 버텨오고 있습니다.
적으나마 제 삶의
의미를 참고 싶어서입니다.
이제 제게 죽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모레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만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지라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겨울 햇살이 졸고
있는 마루에 엎드려
박진식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지적하며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테는
그의 책 「신곡」에서 지옥
입구에“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는 글귀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절망 자체가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만
희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절망한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지금까지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어도 절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길 수 있으니
주님께서 싸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고 구원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분이 기대하시니
우리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에제키엘18,21-23) -김대열신부-
에제키엘 예언자는
정말로 우리가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희망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말씀입니다.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혹시 이 말씀을
나와는 상관없는 악행을 일삼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틀 전 묵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저 악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겠다는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단지 신앙이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한다는 의미였을까요? 아닙니다. 물론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이 분명 죄를 피하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우리는 죄인의 모습으로 살다가 삶을 마무리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인정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은 죄를
상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를 가톨릭적
용어로 보속(補贖)의 삶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다시 잘 살아보겠다는 결단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이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선의 실천이 보속의 행위인 것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인의 죽음이 아니라, 악인이 선한 길로 돌아서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과 보속의 삶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에제키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깊이나 횟수가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이해가 가능할 때,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복음이 말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비로소 만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순결
-이수철신부-
오늘은
마음의 순결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모든
수행의 궁극목표도 마음의 순결입니다.
순결한
마음은 자비이자 지혜입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 하느님을 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생각도 말도 행위도 깨끗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지금 여기에' 삽니다.
하느님
역시 과거를 보시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를 보십니다.
판단
기준도 과거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깨끗한 마음으로 만듭니다.
지금
여기를 살게 합니다.
새삼
깨끗한 마음은 고정적 실재가 아닌 유동적 실재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에제18,26-28).
의인과
악인은 고정적이 아님을 봅니다.
회개할
때 의인이요 의인으로 살았어도 악을 저지르면 악인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의인으로 잘 살았어도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살면 다 소용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역시
초점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지금 여기서 공정과 실천을 살 때 깨끗한 마음의 의인이요 그는 죽지 않고 삽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근본적인 회개를, 마음의 순결을 요구합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일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순결뿐입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마음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살인
이전에 마음의 살인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형제를
'바보!'라고, 또 '멍청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마음으로, 말로의 살인입니다.
마음이
순수는 사랑입니다.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결코
이런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는 이런 살인과 같은 언행은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여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멘.
-조재형신부-
인간과 동물은
유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을
합니다.
죽고 싶은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원망과 분노도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마음은 나도
몰라!’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됩니다.
Enneagram(애니어그램)은 사람의 마음을
9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MBTI(엠비티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16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저는 생각이 깊은
유형이 아닙니다.
직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유형도 아닙니다.
내면의 깊이를
파고드는 성격도 아닙디다.
남들 앞에서 일을
주도하는 성격도 아닙니다.
저는
감성적이며,
협조자형입니다.
논리와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만나면 답답합니다.
일을 추진하기
보다는 인간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편입니다.
맹자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4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교육은 이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자비심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를
배반할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을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을
때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늘
모범생이었고,
예수님께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은 그 끝이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하였고,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려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바보,
멍청이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나 행위를 듣거나 보고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의 사랑, 자비와 용서가
없었다면 오늘이 없을 것입니다.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오상선신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해도 나
때문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는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의 고의가
아니라도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 때문에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쨌거나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청하며 그를 위해 보속의
기도를 바쳐주는 일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구요? 하느님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시니까요.
오늘
행여라도 나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가진 형제가 없는지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맘으로라도 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를 위해 작은
기도와 희생을 바쳐보면
어떨까요?
깨어나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자!
-기경호신부-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웬만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고, 필요한 것들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세생활 뿐 아니라 영성생활도 유행처럼 새로운
것이 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영성생활의 항구함과 열정, 치열한 도전이 사라진 채 안일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오늘의 말씀들은 이런 우리에게 강렬한 도전을 던진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비극적인 제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하여 어려움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경고한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는 회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집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위험, 선과 악 사이의 치열한 투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므로 전쟁의 위협은 적다고 믿었고, 한편이 침략해 오면 반대편 세력이
구출해주리라 믿었다. 이런 방심과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는 무사 안일함 때문에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예루살렘은
58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오늘
복음말씀도 영성생활의 안일함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계명과 신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안일함’을
버리고 ‘더’ 사랑하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서둘러’ 타협하라’는 좀 더 근본적이고 폭넓은 삶을 요구하신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삶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마태 5,20). 옛 정의는 살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새로운 정의는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조차 금한다(5,22).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다 살인자이다.”(1요한
3,15). 화해를 촉진시키는 형제적 사랑은 하느님께 바친 희생제물을 보다 풍성하고 가치 있게 해준다.
나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금까지 신자로서, 수도자로서,가족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국가와 지역사회의 시민으로서
할 만큼은 하고 살아왔다. 나 정도만 살아도 잘 사는 것 아닌가’ 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는가? “지금 나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오늘만 같아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틈날 때 하는 기도나 영적독서, 물질적인 약간의 희사나 시간 날 때 하는 봉사로
신앙인으로서의 도리는 다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나 영성생활은 늘 ‘아직도 더’만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더’, ‘먼저’, ‘서둘러’를 내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지렛대로 삼고 사랑의 춤을 추어보면 어떨지. 지금까지 해오던 것보다 ‘더’ 열정을
불태우고, ‘더’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며,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자! 그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내놓고, 기도나 성경공부나 봉사에 앞서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먼저’ 받아들이도록 하자! 하느님과의 관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꼬이고 맺힌 매듭을 미루지 말고 ‘서둘러’ 풀도록 하자! 우리 모두 눈을 뜨고 있으나 잠자고 있는 영혼과 의식을 일깨워 어떤
상황이나 어떤 관계에서도 주님의 영을 품고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답게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아봤으면 한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김기현신부-
”지난
5일 동안 재속
사제회 양성 피정이 있었습니다.
열 명의 양성자와
동반하는 신부님 세분이 함께 피정을 하였는데,
주로 그 내용이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얘기하고 듣는 것이었습니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마도 공동체를 만드는 기본이어서 그런 작업을 길게 하는 거 같습니다.
그것이 다 끝나고는
사도적 성찰에 대한 이론 설명과 실습이 있었는데요.
그 안에서 조금
느낀 것이 있습니다.
보통 그 과정이
관찰 -
판단
-
실천으로
이루어지는데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관찰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사건이 선택이 되고 나면,
그 사건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시는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봅니다.
먼저 신부님이 그
사건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주시고,
다른 신부님들은
사건 안에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조금 더 명확히 드러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건에 대한 이해가 있게 되면 판단을 하게 되는데,
그 형태가 충고나
지시의 형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 안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는 모습입니다.
각자가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구절이나 그 이유에 대해서 들려주는 겁니다.
그 작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요.
준비하면서
마음속으로 ‘이 짧은 시간에
찾은 말씀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 분의
신부님들이 찾은 성경 말씀과 그 이유에 대해서 들으면서 놀랍고 신선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말씀들이 그 사건들의 다양한 차원을 비추어 주고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새삼 발견하게 하여 주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어야 하는 거구나..
여럿이 함께
바라보고 식별하여야 더 풍요로울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공동 식별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조금
있었고,
‘함께 하면 풍요로울
수 있다.’
는 깨달음이 제가
피정 중에 받은 작은 은총이라면 은총입니다.
그 동안 해 온
것은 개인적인 기도 안에서 식별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는데요.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고 고민하고 식별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을 조금 더 잘 바라볼 수 있고,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혼자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는 신앙이 될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공동체든,
레지오든,
다른 단체
활동이든..
무엇이든 간에 작은
소그룹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의 자비와
풍요를 더 깊이 알고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작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시편 저자와 같은 신앙을 고백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선배 신부님이
외국에서 양성을 받으실 때
여덟 명 중에 한
분은 암으로 돌아가시고,
한 분은
마다가스카의 주교가 되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원로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나는 천국에
가고,
하나는
지옥(?)에
가네~”
-한상우신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화해를 모르고
사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참된 화해의
의미를 미사
전례안에서 강하게
일깨워주십니다.
화해는 미움과
원망을 주님 앞에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화해를 통해
우리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자녀들이
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화해의
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할
것은 무엇보다
화해입니다.
화해는 주님의
사람들을 우리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해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예물인
관계의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화해는
자신만의 상처와
아픔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진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진심은
서로를 아프게
했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화해의
기쁨은 진심어린 생명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예물을
봉헌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절정은 서로 화해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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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