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이야기 451 갑자사화[甲子士禍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와 관련된 사화
윤씨복위에 반대한 선비들을 처형(부관참시)하고 그들의 가족들도 처벌함
연산군 어머니의 원수갚음과 동시에 선비들의 기를 누름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廢黜)되었다가 1480년 사사(賜死)되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한편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연산군은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하였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연관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극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의 명신거유(名臣巨儒)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洪貴達)·주계군(朱溪君) 등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를 제어하려는 신하들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신하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중세력(宮中勢力)과 훈구 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府中勢力)으로 나뉘게 되었고, 임사홍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愼守勤)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연산군의 계속된 실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검색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