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0: 8-14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이 부분에는 “니므롯”이란 인물에 대하여 비교적 많은 말로 진술됩니다. 그 목적은 아마도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주의자인 것을 지적하려는데 있을 것입니다. 성경 기자들은 적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미래에 나타날 적 그리스도 안디오코 에피파네스에 대하여 길게 말하였습니다(단11장). 사도 요한은 바다에서 나올 짐승(대 적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에 대하여 길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세한 기록에 의하여 신자들의 주의(注意)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와 같은 자세한 기록을 보고 적 그리스도를 잘 식별하고 신앙생활에 경성해야 됩니다.
1. 본문 8절은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입니다.
1) 구스가 에디오피아의 왕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모세는 구스의 아들 니므롯 한 사람의 역사만을 여기서 중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비상하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더욱이 우리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는 그 당시에 상당히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높여 주었다면 그들은 그 때문에 권세를 부리거나 왕권을 휘두르며 우쭐하지 않고 다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백성들의 법에 따라서 그들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 이상의 어떤 권위를 행사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트로구스> 픔페이우스(Trogus Pompeius)에서 져스틴(Justin) 이 이 사실을 상고시대의 경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3) 이제 모세는 니므롯이 마치 사람이라는 사실마저 잊을 만큼 가장 존경받는 지위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노아는 아직도 살아있었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위대하고 덕망이 높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군림(君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또한 탁월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온건하여 자기들보다 열등한 자들과 똑같은 평등성을 계발하고 지도하여 강제로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자진해서 존경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니므롯의 야심은 이런 순수한 존경의 한계를 파괴해 버리고 뛰쳐나간 것입니다.
4) 더욱이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이 문장에서는 그 폭군이 불명예에 대한 영원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게 되면 자연히 인간들 가운데서도 평온한 업무처리가 이루어지며 행정이 확립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누구든지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면 기꺼이 다른 사람의 사회성을 계발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히브리어 라는 말의 의미에 관하여 그것은 원래는 ‘사냥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문법학자들이 언급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때로는 ‘음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 그러나 니므롯이 온건한 사냥꾼이었든지 혹은 난폭하게 먹이를 위한 사냥을 하는 사람이었든지 간에 모세가 니므롯이 사나운 사람이며 사람이라기 보다도 거의 짐승에 가까운 자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라는 표현은 니므롯이 인간들의 질서를 초월해서 자신을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교만한 사람들이 텅빈 자만심으로 도취되어 떠다니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을 구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처럼 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2. 본문 9절은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입니다.
이 구절이 미래시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니므롯이 아주 강하고 거만한 자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세를 부리는 폭군을 말할 때는 니므롯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롬이 번역한 것이 더 만족스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강력하고 난폭한 사람에 관하여 마치 니므롯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속담으로 그의 이름이 사용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최초의 폭군으로 된 그를 모든 말로 비난을 받게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3. 본문 10절은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니므롯의 제국의 온상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또한 대도시들이 니므롯에게 예속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도시들의 창건자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때부터 그 도시들의 의로운 성주(城主) 들을 축출해 버리고 자기가 군림(君臨)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갈네(Calneh)에 대하여는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암6:2). 그러나 바벨론이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이 그렇게 굉장히 넓다거나 불경건한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굉장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지역이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기름졌기 때문에 위치적인 편리함으로 인하여 후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 도시가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라는 점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그의 책 <정치학>이라는 곳에서 이곳을 다른 도시와 같은 류(類)로 보지 않고 일개의 행정지방인 도(道)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는데 즉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세미라미스의 창건 도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도시는 건립된 것이 아니고 다리를 서로 놓아서 이 도시에 소속시키고 미화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시날 땅은 구별시키기 위한 표(note)로 추가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애굽에도 다른 바벨론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지금은 카이로라고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의문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다음 장에서 그곳에 큰 탑이 건립되기 시작되어 그것으로 인하여 언어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 결과로 이름까지 그렇게 붙여지게 되었다고 첨가하여 말할 때 니므롯이 어느 정도로 바벨론의 폭군이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여기서는 문장의 순서가 뒤바뀌어 ‘도치법’(倒置法)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후에 탑의 건립에 관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면에서 우선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첨가하기를 그 탑의 건립이 처참하게 제지를 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의도는 한 도시를 건립하는 데로 쏠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는 예변법(豫辨法)으로서 실제 사건보다 먼저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동일한 이름으로 그 도시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후에 가서 보다 최근의 사건으로 부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추정(推定)을 하게 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곧 이때에 그토록 방대한 사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무척 많았을텐데 그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서 거주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점에서입니다. 그리고 또한 니므롯이 자기 명성과 권세를 염려하여 전전긍긍한 나머지 그들이 진전하지 못하게 할 욕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니므롯은 그곳에 유명한 기념비를 건립하여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조금이라도 관계를 했다고 하면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배격하지는 않습니다.
4. 본문 11-14절은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입니다.
앗수르는 셈의 후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언급된 이유는 니므롯의 이웃 지방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에 그곳에서 난폭하게 축출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들이 도저히 제지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람에 대한 습관화된 결과들입니다. 거기서부터 고대의 속담인 ‘큰 왕족들은 큰 도적들이다’는 말이 기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권리보다 더 큰 욕망과 야심이 난무하며 횡행하는 곳에는 막대한 침해를 사람들에게 입힐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를 거의 붕괴시켜 버리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의 의견을 채용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앗수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그에게서 기원된 한 지방의 지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그 의미는 곧 니므롯이 자기의 광대하고 풍요한 왕국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탐욕에 더욱 채찍을 가하여 그 제국의 경계선을 앗시리아에까지 밀고 들어가서 거기서도 대도시들을 건립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은(사23:13) 오직 유일하게 이 의견에 대치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들짐승의 거하는 곳이 되게 하였으니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케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선지자는 갈대아에서 앗시리아 사람들이 도시들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그곳의 거주인들이 황무지 사막과 같은 곳에서 방황하며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는 그 후에 일어났던 이 왕국들의 다른 변화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앗시리아가 그들의 주권을 유지하고 있는 그 때는 그들이 헤아릴 수 없는 부요로 번성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이 자기들에게 예속시킨 갈대아는 오랫동안의 평화로움으로 미화되고 인구도 매우 증가되어서 마치 그들에 의하여 창건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기를 갈대아가 기회를 타서 그 제국을 장악하게 되자 니느웨의 파멸위에서 바벨론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