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9]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라는 말들을 하지만, 뭔가를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흔히 ‘100세 시대’에 나이 칠십이면 앞으로 30년은 더 살 날이 남았다며 부추기고 삶에 자극을 주지만, 보통사람에게는 태반이 꿈같은 얘기일 것이다. 이번주 휴먼 다큐 <인간극장-군자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1,2부를 보면서 ‘진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며, 최근에 읽은 『미술관에 간 할미』책의 한 챕터가 떠올라 다시 읽었다.
<인간극장> 주인공인 이군자(85) 할머니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원로화가’이다. 올해 미술대를 졸업한 초보이지만 나이가 원로(元老)이다. 8남매의 큰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다녔으나, 가방끈의 한은 길고도 깊어 75세에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졸업한 만학도. 불화(佛畵)도 그리고 민화(民畵)도 그리는데, 그동안 작품이 수십 점이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진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듯, 우리를 미소짓게 만드는 할머니. 대단하시다. 그림 또한 좋다. 노익장이 따로 없다.
또 한 분의 미국 할머니 ‘그랜마(grandmother) 모지스’(1860-1961)를 소개한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농장 일만 했던 평범한 할머니가 일흔이 넘어 76세에 관절염이 심해 바느질조차 할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무명의 숨은 화가를 찾아다니는 한 수집가의 눈에 띈 할머니의 그림. 수집가가 몽땅 사들인 작품을 들고 뉴욕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그의 필은 정확해 한 백화점이 추수감사절 행사때 내건 할머니의 그림과 그녀의 짧은 연설이 미술담당 기자들을 사로잡은 거다. 80세에 뉴욕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30개 넘는 주의 순회전시회를 비롯해 크리스마드 카드에 입혀져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심지어 93세에 타임즈의 표지를 장식하고, 그녀의 얘기를 다룬 다큐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뉴욕주지사가 할머니의 100번째 생일을 ‘그랜마 모지스’의 날로 지정하고, 존 F 케네디는 “미국인의 삶에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고 했다는 거다. 어때,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5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나는 내 삶을 작은 스케치들로 그려왔어요. 오늘 조금, 어제도 조금씩.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마치 기분좋은 하루를 잘 마친 느낌이에요. 그걸로 충분하지요. 삶이 내게 준 것들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봤으니까요. 인생은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할머니의 말씀이다. 정말 감동이지 않은가.
책에 실린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 <이삭 줍는 사람들> <눈덩이> <12월> 등 3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풍경과 소재가 너무 따뜻해 자꾸 보게 되는 등 좋았다. 마흔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해 작가가 된 박완서 선생의 작품들도 떠올랐다. 작가는 <그 많던 싱아는 어디 갔을까> 등 눈을 감을 때까지 700편도 넘는 소설과 글을 남겼다. 또한 일본의 ‘100살 할머니 시인’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할머니의 시 여러 편을 필사해 100세 된 아버지께 읽어드린 기억도 함께 생각났다.
시바타 도요(1911~2013) 할머니는 90세가 넘어 처음 시를 썼는데, 100세에 베스트셀러 시인이 됐다. 부유한 미곡상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10대 때 가세가 기울면서 식모, 재봉 일 등 모진 고생을 했다.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았으나 두 번째 남편을 만나 아들 하나를 두고 평범하게 살았다. 남편이 죽고 오랫동안 독거노인으로 지냈다. 허리 통증으로 클래식 발레를 못하게 되자, 아들이 시를 써보라고 권한 게 92세. 돋보기를 쓰고 연필로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간 시가 산케이(일본경제)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처음 실렸다. 2009년 98세때 3,000부를 펴낸 첫 시집 <약해지지 마>가 일본에서만 15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의 뒤를 이었다 . 100세때 《100세》를 출간했고, 2013년 별세.
할머니의 시 몇 편을 이 신새벽에 감상해 보자. <약해지지 마>라는 제목의 시는 이렇다. <있잖아, 불행하다고/한숨짓지 마/햇살과 산들바람은/한쪽 편만 들지 않아/꿈은/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나도 괴로운 일/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너도 약해지지 마>. 쉬우나, 우리에게 주는 이 감동은 무엇인가? <비밀>은 이렇다. <나, 죽고 싶다고/생각한 적이/몇 번이나 있었어/하지만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아/지금은/우는 소리 하지 않아/아흔여덟 살이라 해도/사랑은 하는 거야/꿈도 꾸지/구름도 타고 싶은걸>. 아흔여덟 살이라 해도 사랑은 하는 것이란다. 꿈도 꾸고 구름도 타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 진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듯하다. <화장>이라는 시를 마저 읽으며 ‘늙은 여심(女心)’도 훔쳐보자. <아들애가 초등학생 때/친구에게/"네 엄마 참 예쁘시다"/들었다며 기뻐한 적이 있어/그 후로 조심조심/아흔일곱인 지금도/어머니 날에 받은 립스틱을 바르고/화장을 하네/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할머니의 시는 화려하거나 어려운 은유(隱喩)가 없어 편하고 좋아 쉽게 읽힌다. 100년의 세월이 빚어낸 연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잃지 않는 유머가 담겨 있지 않은가. "남에게 상냥하게 대한다. 그리고 남이 상냥하게 대해 준 걸 잊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100년의 인생에서 배운 것이다.” 그랜마 모지스, 박완서, 시바타 도요. 인생을 참 아름답게 살다간 멋진 할머니들이다. 화이팅이닷!
덧붙임1: 지금도 활약이 대단한, 100세를 훌쩍 넘긴 철학 전공의 명예교수 할아버지도 있다. 100세 넘어 펴낸 책만 해도 3권이던가. 시인 윤동주와 학교를 같이 다니기도 했고, 왕년에 안병욱 김태길 교수와 함께 '서양철학 3총사'로 이름을 남겼다. 이들은 1920년생 동갑. 97세에 안병욱교수의 손자 주례도 섰다.
덧붙임2: 탤런트 겸 가수 그리고 사회자로도 이름이 높은 만능엔터테이너 '거시기 성님' 김성환 님은 1950년생. 50이 넘어 대학을 10년 동안 힘들게 다니며 석박사과정을 모두 수료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어르신들 무릎관절 무료수술 등 10년째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어제 오후 경기대에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다. 이런 노익장(老益壯)들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