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1
1월12일[주님 세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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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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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ADT98-RvGE
[서울대교구 안수배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서울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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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늘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하향성의 예수님!>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보여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던 처신이 전 세계적인 주목과 각광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1935~) 전 대통령의 스토리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던 대통령의 월급 가운데 90%를 기부하고 100만 원만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그는 초호화판 대통령궁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경작지가 딸린 허름한 농가에서 출퇴근했는데, 폐차 직전의 털털거리는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며 다녔습니다. 공무가 없을 때는 능수능란하게 트랙터를 운전하며 밭일을 직접 하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특별대우를 항상 거절했습니다. 그가 일반 병원 환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들 사이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남긴 말들은 불멸의 어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농부입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예처럼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좋습니다.”
특혜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의 모습도 크게 돋보입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셨습니다. 특별대우를 받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외아들로서 이 세상 모든 관습이나 율법의 통제나 지배를 받지 않으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특혜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한 평범한 일원으로서 당시 인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측면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정결례를 받으셨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관한 범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세례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이셨기에, 세례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르단강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수님의 자기 낮춤이요, 경탄할만한 겸손의 덕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던지,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하늘이 활짝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그 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이윽고 들려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오늘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항상 자신을 극도로 낮추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특혜나 예외를 거부하고 늘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하향성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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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84Oay6gm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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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의 본질: 아버지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살겠다는 결단>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세례의 필요성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 친히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세례를 받은 사람일까요? 세례의 핵심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시듯 ‘하늘 아버지의 인정’입니다.
아버지는 무엇 하는 분입니까? 자녀가 사회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시는
기둥과 같은 분입니다. 세례는 하늘에 그러한 분이 계심을 믿겠다는 결심이고 인정받는 시간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세례를 받은 사람일까요? 그는 성공회 주일학교는 다녔지만, 실제적인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육체적인 아버지와는 절연했지만, 그는 한 달에 30달러로 살아보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 그 길로만 나아갑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세례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없으니 실패가 두렵습니다.
히스 레저는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로 미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는 이 연기를 위해 6주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캐릭터 노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기를 하고는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28세란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우울증 등으로 복용한 약물 부작용 때문이었습니다.
히스 레저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습니다. 다만 본인만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패가 두려웠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가장 연기를 잘해놓고도 두려움과 우울함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아직은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튜브 파인딩 스타 채널에 ‘군인 아빠의 묘비를 껴안은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지만,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일스는 식당 주차장에서 20달러를 주워 게임팩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한 공군 중령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아버지도 군인인데 이 20달러를 군인을 위해 쓰고 싶다고 주었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무덤을 찾았고 묘비를 껴안고 있는 그의 사진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늘에 ‘살아계십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인정해주고 응원해 주고 계십니다. 마일즈 눈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이 그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오로지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리오넬 메시가 하늘에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이뤄낸 결과를 보십시오. 믿음이 그를 하이에나에서 사자로 만들었습니다. 월드컵 우승까지 시켜가며 나라에 큰 영광을 심어주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라이언은 사자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밀러 대위와 동료들이 죽지 않고 하늘에 살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효과입니다. 우리에겐 하늘에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람은 하이에나로 살 수 있고 사자로도 살 수 있습니다. 하이에나는 먹고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열심히 살지만, 힘이 듭니다. 또 상처라도 입으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그를 버립니다. 그러니 약해 보이면 안 됩니다. 하이에나는 하늘 아버지가 없는 세례 받지 못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안토니오 사지 신부의 『치유의 순간』이란 책에 이와 같은 예화가 나옵니다. 하이에나와 같은 삶을 살며 힘겹게 살던 한 사람이 현자를 찾아왔습니다. 현자는 이 하이에나 이야기해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자가 심하게 다친 하이에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 겸손한 하이에나가 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에 겸손해진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변한 게 없어졌습니다. 그는 다시 외로워졌고 사는 게 힘들어졌습니다. 현자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 현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에 가서 하이에나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사자 아버지가 있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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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24위 복자를 시복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저는 당시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영성 신심 분과’ 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제가 하였던 일은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고, 순교자 영성에 대한 자료집을 만들고, 순교자 영성과 의미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황님 방한을 준비했던 시간이 제게는 큰 기쁨과 영광이었습니다. 시복식이 이루어졌던 광화문 광장에는 교황님이 미사를 봉헌했다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를 박해하던 장소, 많은 교우가 순교했던 장소가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교황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박해와 죽음의 장소가 천상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들이 머물던 장소로 변했습니다. 교황님은 켈리 주교님을 타일러 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 착한 목자의 마음을 지닌 분을 선택하셨음을 인정하며, 켈리 주교님께서 타일러 교구의 하느님 백성을 훌륭히 섬기실 것이라 믿습니다. 켈리 주교님은 2025년 2월 24일 월요일에 타일러 교구의 다섯 번째 교구장 주교로 착좌하실 예정입니다. 새로운 교구장으로 켈리 주교님을 모시는 타일러 교구에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정화의 표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례는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 또한 거룩한 성사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본명(本名)이 생깁니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도 있지만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이 ‘본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면 저는 ‘가브리엘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제1독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참아내라고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공정이란 무엇일까요? 햇빛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서, 죄인이라서, 배우지 못해서, 여자라서, 난민이라서, 이주노동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공정의 세상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교회로 가져왔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고아나 과부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공정의 세상을 박해 시대의 교우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우들은 함께 기도하였고,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세상이 공정의 세상입니다. 매주 친교를 나누는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공정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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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3,15-16.21-22: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은 주님의 공현 대축일에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였던(마태 2,11)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세례를 통하여 다시 한번 공적으로 선포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은 그래서 제2의 공현 축일이며 이제는 예수님 세례의 사명이 시작되는 날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말씀은 야훼의 종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이사 42,1)로서 야훼의 종에 관한 예언으로 예수님에게서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통받는 종으로서 메시아시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메시아는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염려와 배려, 희생과 자신을 내어놓는다. 메시아는 자신의 사명 앞에 놀라지도 않는다. 꺼져가는 심지를 살리기보다 꺼버리기 쉽고 부러진 가지를 쉽게 자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말이다. 결국은 가난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지만, 그분은 야훼의 고통받는 종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 여기서 성령은 메시아가 부어주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하며, 불이라는 것은 정화작용만이 아니라, 선악을 결정적으로 구분시켜주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예수님의 세례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신다. 여기서부터 당신의 메시아로서의 사명, 즉 세상을 구원하는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사명이 시작된다.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낮추어 봉사하는 겸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님의 세례는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해방하는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마태 26,28) 십자가의 죽음에로의 긴 여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세례를 수난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것이 바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절)로 입증되고 있다. 이사야에서 본 내용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장해준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인간을 더욱더 사랑하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사실, 즉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은 예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21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루카 복음에서 기도에 관한 주제들이(예: 루카 3,16; 6,12;9,28-29; 22,41) 성령과 연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신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강림절에 성령을 기다림과 기도가 연결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4,31 참조) 성령은 바로 겸손과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불로”(16절) 이루어져야 할 우리의 세례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이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변화로서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례의 사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헌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속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며,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참된 종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종으로 변화가 먼저 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와 희생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은 또한 기도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또한 기도에 항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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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느님께서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사건이라면,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참하느님으로서, 죄로 말미암은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더 다가오시어 내 편과 내 짝이 되어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 앞서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며 서른 해 동안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평범한 우리 인간의 이웃으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네 인간 삶의 곡절과 파란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비로써 주님께서는 우리들 틈에 끼시어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시기를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참사람으로서, 인간이 겪는 죄의 상처와 분열의 근본 원인을 밝히시고 없애시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아픔과 타락의 바탕에는 늘 자신을 드러내고, 형제들을 내리누르는 교묘한 형태의 폭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질받는 죄인들 틈에 끼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주도권을 건네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겸손하게 걸어가는 길, 여기에 인류 구원의 핵심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 인류에게 희망이 찾아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머리 위로 홀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며 하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성부와 성령의 화답이요 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힘으로 당신의 남은 사명, 곧 공생활의 여정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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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났으니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15-16.21-22)
1) 예수님의 ‘세례 축일’은, ‘공현 대축일’처럼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내신 일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이 온 세상 모든 민족의 메시아라는 것이 드러난 일이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당신 자신을 낮춤으로써 가장 낮은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세례에 관해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주고받은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마태 3,13-15)
여기서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라는 요한의 말은, 요한 자신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께서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2) 요한이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는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가 없으신 분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스스로 죄인이 되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죄인의 위치로 당신을 낮추신 일입니다. 따라서 두 일은 ‘같은 일’입니다.
<외양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워 계셨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시작이었고, 세례를 받으신 일은, 그 수난의 중간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는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공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표현으로는 예수님께 하신 말씀이지만, 뜻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4) 신앙인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이 ‘십자가 수난’에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십자가에 연결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각오했고, 또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거나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라고 배우는데,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인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죽었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새 생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새 생명’의 완성을 바란다면, 땅에 있는 것, 허무한 것은 버리고, 위에 있는 것, 영원한 것만 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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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운동 바오로 신부님]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성탄시기 동안 우리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성탄 대축일의 의미와 예수님께서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공적으로 드러나신 공현 대축일의 의미를 묵상했는데, 그런 성탄시기가 끝나는 날이 바로 오늘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준 세례는 죄를 씻는 회개 예식이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죽음을 상징하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예식이 세례자 요한이 준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시면서 세례의 필요성을 말씀하시고, 승천 전에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 28,19)고 명령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이기 때문에 세례를 자진해서 받음으로써 모범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 삶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라는 점입니다. 세례 때 물속에 잠김으로써 죄에 대해 죽음을 맞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애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다시 올라오면서 새 삶을 살듯이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우리 역시도 세례를 통해 성령을 선물로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 신앙인으로서 우리 역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이라고 1독서는 가르쳐 줍니다.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는 삶을 묵묵히 뚜벅뚜벅 살아가시길, 그래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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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하는 아들(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나타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란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전통적 표현입니다.(이사 42,1; 시편 2,7 참조)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이야말로 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희망과 기쁨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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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갑조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람은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없이는 사랑도 미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언제나 무엇이든 자기 소유로 삼는 성질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왜 요한은 “자격”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고민해 보기에 앞서 오늘 복음에서 자격이 있고 없음에 연연하지 않는 요한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나타나 예수님 위에만 내리셔도, 하늘에서 예수님만을 향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말씀이 들려와도 아무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자격은 어떤 역할이나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근간 또는 경력을 말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격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자격으로 사람 사이에서 차별을 두며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안위만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인위적인 자격으로 인하여 어떠한 장애를 겪지 않습니다. 마치 계절이 그렇고 나이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마치 물속에서 곧장 올라와 물기를 채 털어내지 못한 예수님의 모습, 곧 갓난아이의 모습이 하느님의 마음에드는 아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능력도 삶의 고해(苦海) 앞에서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자신만의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의식은 참으로 위험천만하며 극단으로 치닫을 수 있는 이기심의 발로라 생각됩니다. 신앙심은 저울로 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믿음이 깊고 얕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어떤 자격을 갖기 전의 갓난아이의 상태가 하느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는 현장이라고 봅니다. 굳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종교심은 사람의 결핍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습니다. 늙고 병들 처지에 닿게되면 누구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 시간,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며, 그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불과 세례의 오묘한 손길은 무언가를 깨닫게도, 느끼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무엇을 해서 어머니의 마음이 기쁜 게 아닙니다. 갓난아이 자체로 어머니의 마음은 기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잣대를 줄여가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일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요, 차별의 앎을 여의는 신앙생활이 마음의 세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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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관우 스테파노 신부님]
<비상시 행동 요령!>
한 해가 저물어 가던 지난 연말 우리 사회를 관통했던 말은 ‘비상(非常)’이었습니다. 비상의 사전적 의미는 ‘신속하게 대처해야할 뜻밖의 긴급한 사태’입니다. 긴급한 사태를 모든 국민이 목격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말로 듣고, 역사책에서 봤던 그 일이 눈앞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신속하게 대처했습니다. 긴박했던 위기 상황을 단시간에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 한강 작가의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던 군중을 향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로 씻겨진 몸이나 옷에는 언제고 다시 먼지가 쌓이고 오물이 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과 불로 새겨지는 징표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위기가 찾아왔을 때 활활 타오르고 활동하십니다.
우리 삶에 ‘비상’이 걸릴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통해 접하고 만났던 그 일이 나에게 현실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원동력을 성령과 불의 세례로 우리에게 심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상 행동 요령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시는 분” 그분께 먼저 청하는 것이며, 묻는 것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과거에 있었던 지난 역사가 아닙니다. 현재를 돕고 산자를 구하는 지금도 타고 있는 불과 같으며, 성령께서는 늘 활동하고 계십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늘 예수님의 행적을 따르려 하고, 그분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것은 비상시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잘 대처하고 헤쳐 나가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며, 그분께서 늘 함께하고 계심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과 불의 세례를 통해 삶에 비상이 걸렸을 때 가장 먼저 하느님을 찾고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하라 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비상’, ‘비상’에 당황하지 마시고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공정과 정의를 세우시고 의로운 이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께서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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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오.3,17)
우리 모두는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로 태어 납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아름답거나 위대해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기에 우리는 아름답고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홀로 아름답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에 아름답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추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 삶에는 빛이 없습니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다른 이름은 주님이요 빛이십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 우리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존재에서 사랑을 주고자 갈망하는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주님의 인호가 우리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거저 주는 것입니다. 목숨도 바치며 주는 것입니다. 경제적, 심리적 계산으로 손익을 따지며 주고받는 사랑은 하나의 거래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저 주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는 사람임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사는 세상에서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미숙한 삶을 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으며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미워해도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주님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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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잡초는 해로울까요? 해롭지 않을까요? 농사짓는 분들은 이 잡초 때문에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잡초를 뽑고 나면 분명 그 자리는 깨끗해지지만, 뒤돌아서면 전에 뽑았었던 자리에서 또 잡초가 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에는 해로워 보이지만, 땅을 보호하는 큰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 잡초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렸습니다.(참고로 미국의 과수원은 우리나라 과수원과 크기가 남다르지요.)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극심한 토양 침식과 모래바람이 일어나 몇 년 치의 농사를 망쳐버린 것입니다. 잡초가 사라지자, 토양이 황폐화된 것입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잡초도 너무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나에게 해로워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세상 전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이도 해롭다면서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결코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만을 위해 창조물을 만드신 것이 아니기에, 그 어떤 창조물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세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인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범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세례이기에, 주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면서 우리 모두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뜻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철저히 주님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의 일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서 제거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러나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세례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모든 이를 포용하시려는 주님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갈라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면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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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를 청하오니>
루카 3,15-16.21-22 (세례자 요한의 설교,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를 청하오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
물이시여!
날마다
나를 씻으소서
나의 빈말을 씻으소서
나의 헛짓을 씻으소서
나의 죄악을 씻으소서
나의 위선을 씻으소서
나의 가식을 씻으소서
나의 이기심을 씻으소서
나의 무관심을 씻으소서
나의 거칠음을 씻으소서
나의 옹졸함을 씻으소서
나의 게으름을 씻으소서
그리하여
늘 처음처럼 새롭게
하느님의 사람이게 하소서
불이시여!
날마다
나를 사르소서
나의 탐욕을 사르소서
나의 의심을 사르소서
나의 절망을 사르소서
나의 증오를 사르소서
나의 저주를 사르소서
나의 교만을 사르소서
나의 독선을 사르소서
나의 비겁을 사르소서
나의 무지를 사르소서
나의 왜곡을 사르소서
그리하여
늘 처음처럼 새롭게
하느님의 사람이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날마다
나를 살리소서
나의 믿음을 살리소서
나의 희망을 살리소서
나의 사랑을 살리소서
나의 참됨을 살리소서
나의 착함을 살리소서
나의 올곧음을 살리소서
나의 따뜻함을 살리소서
나의 아름다움을 살리소서
나의 부드러움을 살리소서
나의 너그러움을 살리소서
나의 나다움을 살리소서
나의 당신다움을 살리소서
그리하여
늘 처음처럼 새롭게
하느님의 사람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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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에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났음이 큰 기쁨이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은 영원한 생명, 구원의 초대이기에 더더욱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여러분, 본인의 생일을 기억하시죠? 세례받은 날은 언제인가요? 이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성사 때 한 약속을 감사와 확신을 가지고 쇄신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인 군중의 틈에 끼여서 죄 외에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시며,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은총과 자비가 충만한 그분이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없애주시기 위해 우리의 비참,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을 취하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포기와 버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서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은 하늘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날이요, 내 인생을 천상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기념해야 합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으신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태어난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을 양육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성사 때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이 더욱 충만해 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녀의 표징으로 새 이름,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이름을 자주, 불러야 하고 새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 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모이겠어요? 노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유유상종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의 매력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와 미사참례를 즐겨하고 전교를 기뻐하며 성경 공부를 그리워하는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휴대전화 보는 시간을 줄이고 성경 말씀에 집중해 보십시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양분을 얻는 시간입니다. 기도 해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약속했습니다.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끊어 버립니다!” 세상의 논리, 인간의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방식에 따라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삶을 약속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고 늘 푸른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든 소금 역할을 하는 3%의 사람이 있다면 그 곳은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세례성사 때의 약속을 일깨우는 은총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 3,4-5)
더 큰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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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2)
신자들 가운데 몇몇 분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죄인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 라며 의아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의미로, 우리와의 아름다운 연대와 동행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더 충만하게 되시고 드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여”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의로움 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의로움의 시작은 자기의 뜻을 낮추고 아버지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준비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내일부턴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이미 5세기 초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주님의 세례를 연결해서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을 긴밀하게 잇는 찬가를 불렀습니다. 『우주 만물 그분을 소리 높여 부르고 동방박사들 그분을 소리 높여 부르며 별이 그분을 소리 높여 부르노니, 보아라, 이분이 임금님의 아들, 하늘이 열리고 요르단강에 거품 일고 비둘기 나타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노라!』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죄인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 시대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그릇된 삶을 뉘우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행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몸소 받으심으로써 죄 없는 분이 죄인들인 우리와 같아지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신 까닭은 바로 우리와 같아지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세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낮춤 임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갈라 3,13-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사건은 숨겨져 있던 당신의 신적 정체가 계시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2)하고 말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다 함은 예수님에 의해 열어질 새로운 세상은 곧 평화의 왕국임을 암시해 줍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비둘기는 징벌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창세8.11)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인간이 태초에 지은 원죄는 교만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조물주이신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교만이 바로 원죄의 단초, 시발이었습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닫혀진 하늘 문이 구세주 예수님의 낮추심으로 오늘 요르단강에서 열린 것입니다. 하늘을 열리게 만든 사건은 진정 ‘낮춤, 겸손’의 결과입니다. 이 낮춤과 겸손이 하늘과 땅의 막혔던 장막을 찢어버리고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가장 작은 자로서의 낮추심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 역시 예수님 앞에서는 끊임없이 작은 자로서의 겸손을 보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루2,16).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3, 30)
중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루쉰’(1881~1936)은 1918년 그의 첫 작품인 「광인일기」에서 현대인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합니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 모두들 매우 의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얼굴을 훔쳐본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작은 고비 하나 넘는 일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스승과 제자, 원수들과 서로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 한패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견제하면서 죽어도 그 한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겠단다.』 문지방 한 발자국을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낮춤의 표지입니다. 이 같은 낮춤이 없었기에 인간과 인간 사이, 하늘과 인간 사이의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도무지 실행하지 않았기에, 문지방 한 발자국을 넘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시고 먼저 요르단강에 들어가시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신 것은 부유하신 당신께서 가난한 우리와 같아짐이고, 같아짐을 통해서 죄인을 우리를 당신의 부유함 곧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시려 함입니다.(2코8,9참조) 우리 모두를 당신과 함께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함으로써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는 분명 몸을 씻고 죄를 씻는 종교 예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천상 잔치에 초대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2)
세례란 그렇습니다. 내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니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모든 일을 마치려 합니다. 이렇게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주님의 길이 되고, 주님의 종이 되며, 주님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과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약 그러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함을 잊지 마십시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행해야 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셨던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주님 마음에 드는 아들과 딸이 되도록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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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서의 육적 탄생인 첫 번째 탄일이 그의 어머니께서 성령을 입은 날이라면, 이제 이 두 번째 탄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입은 날입니다. 곧 오늘이 예수님의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일인 셈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탄생’이요,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첫 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내 마음에 드는 이,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을 공정하게 펴리라.”(이사 42,1)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일을 선포합니다(사도 10,38).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탄생일인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세례와 함께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다시 탄생하는 이 두 번째 탄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현장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 현장에서는 ‘두 가지’ 신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루카 3,22)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첫 번째 탄생 때는 주님의 천사만 나타났을 뿐인데, 이제 두 번째 탄생 때는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께서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창조의 장면과 같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의 ‘영’이 물위를 휘돌아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셨던 것과 같이, 이제 똑같은 ‘성령’께서 요르단 강물 위로 내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린 ‘성령’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고 은총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죄 사함이 열리고 구원의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탄생인 ‘세례’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가리킵니다(로마 6,4). 그리고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2코린 5,17; 로마 8,9). 곧 ‘성령’ 안에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써,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살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 놀라운 일인가요!
이는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까닭입니다(1코린 12,13). 그리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의 힘과 성령의 개입으로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디도 3,4-5). 이로써 우리는 주님을 옷 입듯이 입고서(갈라 3,27),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셨습니다.
참으로,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십니다. 그러니 세례 받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곧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콜로 2,12)
세례 현장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선포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아버지로부터 선포된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비추어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2편에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는 왕에게 적용한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 선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축성하시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우시는 당신 나라의 ‘왕’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로써, 당신의 아드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이토록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거룩해지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다고 스스로 설명하셨지만, 사실은 세례와 함께 우리 죄인과 같이 된 사건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 죄인이 되신 사건입니다. 바로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낮추시어 “반역자의 하나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이사 53,11-12) 죄인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저희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바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 ‘생일’이요, ‘의롭게 된 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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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마음 안에서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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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의 축복>
-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이자 연중 제1주일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성탄시기의 이벤트 축제도 오늘로써 끝나고 이젠 평범한 연중시기의 시작이요 예수님의 본격적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결과를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시작하라. 모든 시작은 위대하다.”<다산>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결같은 삶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지극히 어려운 일도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세상의 큰 일도 그 시작은 미약하다.”<도덕경>
그러니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어제 2025년 희년을 맞이한 연중 첫 토요일, 교황님은 바오로 6세 홀에서 8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주신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희년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도록 초대한다.”
“희망하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To hope is begin again)”
시작의 위대함을, 늘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는 교황님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미사중 화답송 후렴도 참 흥겨웠습니다. 주님의 세례 축복과 동시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축복도 연상되어 힘이 났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방금 노래한 화답송 후렴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평화의 복’이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 또한 평화의 복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네가지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어제도 강조했지만 겸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 바로 지혜입니다. 요한도 예수님도 겸손의 대가입니다. 정말 겸손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아니 겸손 자체가 축복이니 겸자무적입니다. 요한이 자기를 아는 겸손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이런 요한에게 자신을 낮추어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역시 겸손한 분이십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정도로 유난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사랑처럼 기도에도 늘 초보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언제 어디나 눈들면 하늘이요, 기도하지 않으면 일상에 묻혀 자기를 잃어버리기 십중팔구입니다.
다음 대목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
이제 예사 하늘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하늘길이, 하늘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알면 알수록 모른다는 사실에 저절로 겸손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살아나는 영혼이요 기도하지 않으면 시들어 죽는 영혼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신원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축일은 바로 우리의 세례 축일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복된 신원이 세례를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말씀은 그대로 나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보다시피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실현임을 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의무와 책임입니다.
넷째, 사명입니다.
묵묵히 사명을 수행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우신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대로 보고 배워야 할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껴저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예수님의 사명수행을 통해 입증됨을 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주님의 빛’이 되어 예수님의 사명수행에 함께 참여함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무이겠습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셨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자 예수님이요 이런 주님을 닮아 주님과 함께 이웃을 무지의 질곡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베드로 역시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사명 수행에 충실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배우는 가르침이 참 유익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 세례 축일이요 우리 세례 축일이니 초발심의 자세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기도, 신원과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고 실천하며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루하루 온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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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령의 세례>
어제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주님께서 한 곳에서 세례를 베푸시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내용이고 오늘은 그 축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받으시고 베푸신 세례의 의미를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요한의 세례는 물의 세례이고 주님의 세례는 불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물의 세례는 죄를 씻는 세례이고, 불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태우는 세례이고, 성령으로 그리고 새로운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입니다.
우리는 질문합니다. 세례를 베푸실 분이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실 분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느냐고.
맞습니다. 죄를 씻는 세례라면 주님께서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되레 세례의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선포되신 것이며 우리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모범을 따르는 우리도 이제는 물의 세례에 머물지 말고,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령의 세례를 사는 것일까요?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삶을 사는 것은 우선 죄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는 삶이 아닙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많은 신자가 그리고 수도자까지도 죄를 벗어나는 것에 급급하기에 정작 살아야 할 성령과 사랑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 미움의 고통이 너무 커 미워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고백성사도 수도 없이 봅니다만 매번 실패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미운데 미워하지 않으려는 것은 뭘 하면서 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고, 그래서 이런 노력은 성공하기 힘들 뿐 아니라 성공한대도 미워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죄짓지 않거나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것과 같습니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 수렁에 빠지듯 죄 가운데 허우적거릴 뿐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렁에 빠지면 구조대의 도움이 필요하듯 죄의 수렁에 빠졌을 땐 구원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주님께 내려와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듯이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해야 하고 우리도 주님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로 주님께서 장엄하게 선포되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영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나야 합니다.
주님의 영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세례이고, 이렇게 될 때 육의 영은 물론 악령도 우리 곁에 얼씬거리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주님처럼 악령과의 한판승부는 거쳐야 합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 가시어 악령과 대적하십니다.
광야 그곳은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며 악령만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선 아무 도움도 없이 오직 성령과 함께 악령과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빵의 유혹을 악령으로부터 받으셨을 때 뱀의 유혹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달리 빵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느님께 직행하여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배를 채우십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예도 같은 방식으로 단숨에 초월하십니다. 그러자 악령은 두 손 들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갑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받으시고 주신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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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
<다시 태어남!>
오늘 복음(루카3,15-16.21-22)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내일부터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인 땀의 신비를 묵상하는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공관복음에서 함께 전해지고 있는데, 마태오 복음(3,13-17)과 마르코 복음(1,9-11)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지만,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3,21-22)은 예수님의 세례를 간략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우리 세례의 예표, 곧 우리의 세례를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물에 잠기셨다가 물에서 올라오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세례는 씻김의 예식입니다. 세례는 다시 태어남의 예식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미 받은 우리의 세례를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구체적인 이슈(사건) 앞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저도 이번에 마산교구 서품식과 새 사제들 첫 미사에 함께하면서, 21년 전 저의 서품을 기억하면서 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다시 태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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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요한 3, 21)
구원의
기쁜 소식이
우리들에게
열렸습니다.
세례가 필요한
우리들 삶에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오십니다.
세례는 사랑이며
사랑은 기도의
구체적인
실행입니다.
순종은
구체적인
사랑의
회복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
우리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관계의 세례이며
변화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사랑받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사랑받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공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세례의 길은
하느님의
길입니다.
그 길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말씀과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선하게 사는
길입니다.
선하게 사는
길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느님께
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열려있는
사람은
역사와
민중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낮춥니다.
세례는 현실의
모순과 교만을
치유하는
대평등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를
통하여
주님의 참모습을
만납니다.
모든 부정을
거부하고
모든 우상화의
유혹 앞에서도
끝까지
신앙인의 삶을
살게하는 것이
세례이며
세례의 참된
정신입니다.
하늘을
열게 하는
세례의 참된
삶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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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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