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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 1’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국민국가 거부, 세계체제 차원서 자본주의 분석…세계화 담론 ‘혁명’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근대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 전망을 제시한 ‘68혁명의 적자’로 꼽히고 있다.
전후 서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정치적 사건은 1968년 ‘68혁명’과 1989년 동구 사회주의 몰락이었다. 68혁명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한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를 요구했다면, 동구 사회주의 몰락은 자본주의에 맞서온 현실사회주의 기획의 실패를 함의했다. 두 사건이 지식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68혁명 이후 자본주의 국가 비판과 국민국가의 한계를 다룬 연구들이 대거 등장했고,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시장 체제를 지지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의 위력은 강력해졌다.
월러스틴의 대표저작 <근대 세계체제 1>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1930~ )은 68혁명의 사상적 적자(嫡子)라 할 만하다. 1974년 <근대 세계체제 1>(The Modern World-System 1)을 발표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 그는 두 가지 점에서 이채로운 사상가였다.
첫째, 그는 사회과학의 분석 단위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국민국가를 거부하고 세계체제의 차원에서 자본주의 역사를 분석했다.
둘째, 근대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거시적 전망을 제시했다. 자본주의가 초시간적 체제가 아니라 역사적 체제라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아날학파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 역사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회이론과 안드레 군더 프랑크, 사미르 아민의 종속이론으로부터도 작지 않은 이론적 자극을 받았다. 세계체제론은 마르크스, 브로델, 종속이론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세워진 역사적 사회과학 이론이었다. <근대 세계체제 1>을 발표한 이후 월러스틴은 뉴욕주립대(빙엄튼)의 페르낭 브로델 센터를 중심으로 ‘세계체제 학파’를 이끌었다. 그의 세계체제론이 1980년대 이후 세계화 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
세계체제론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분석 단위에서 일대 전환을 요구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와 베버로 대표되는 고전 사회학의 경우 계급 또는 집단, 국민국가가 일차적인 분석 단위였다. 이런 이론적 가정에 맞서 월러스틴은 주권국가나 민족사회가 아닌 세계체제가 사회과학의 분석 단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기 충족적이고 내적인 발전 동인을 갖는 체제는 ‘소체제’와 ‘세계체제’뿐이다. 이 세계체제는 다시 ‘세계제국’과 ‘세계경제’로 구분된다. 세계제국이 고대 로마처럼 공통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면, 세계경제는 근대사회처럼 복수의 정치체제로 이뤄져 있다. 16세기 이래 세계체제는 재분배적 공납제의 세계제국으로부터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이행했다는 게 그의 해석이었다.
<근대 세계체제 1>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들은 ‘중심부’, ‘반(半)주변부’, ‘주변부’다. 이른바 ‘긴 16세기’에 등장한 유럽 세계경제는 영국·네덜란드 등의 중심부, 스페인·이탈리아 등의 반주변부, 동유럽·히스패닉 아메리카 등의 주변부로 이뤄져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이러한 3분 구조의 국제분업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네 단계로 구분했다. 농업자본주의 단계인 유럽 세계경제의 등장(1450~1640),
중상주의 시대인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1640~1815), 산업자본주의 단계인 세계경제의 지구화(1815~1917),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공고화(1917년 이후)가 그것이다.
<근대 세계체제 1>은 ‘자본주의적 농업과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 농업자본주의를 분석한 저작이었다, 월러스틴은 이후 시대를 다룬 연작을 출간해 왔다.
세계체제론의 메시지에서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역사적 사회체제의 하나라는 점이다. 여기서 ‘역사적’이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확장·종말이라는 생애주기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발전하며 모순이 격화되어 구조적 위기를 일으킴으로써 결국 내부로부터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세계체제론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근대 세계체제 1>은 출간되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초점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 분석 단위 문제, 경제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 설명방식 등에 맞춰졌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를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한 생산 체제라고 정의했다. 이런 이론화에 대한 비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사학자 로버트 브레너의 문제 제기였다. 브레너는 세계체제론이 자본주의 이행을 시장 및 분업의 확대과정으로 이해할 뿐 생산관계, 기술혁신 및 잉여 착취체제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월러스틴을 유통주의자로 몰아세우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월러스틴은 오랜 침묵을 지키다 ‘영국 만세 학파’라고 반비판했다. 그에게 브레너의 주장은 영국 자본주의를 표준적인 발전모델로 받아들이는 서구중심주의적 이론화일 뿐이었다.
세계체제론은 세계화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화는 국제화와 기본적으로 다르다. 국제화가 국민국가 간 교류가 양적으로 증대되는 현상을 말한다면, 세계화는 현대적 사회생활이 새롭게 재구성됨으로써 세계사회가 독자적 차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분석 단위의 전환을 주창한 세계체제론은 이러한 세계화의 개념화와 분석에 결정적 통찰을 안겨줬다.
1980년대 이후 월러스틴은 근대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 글을 발표해 왔다. 그는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문명이 ‘존재의 가을’에 도달했음을 강조했다. 자본주의는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지나치게 커져 체제의 평형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분기의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게 그의 전망이다.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알기 원하는 이들에게 이 체제의 역사적 기원을 분석한 <근대 세계체제 1>을 읽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어판 저작은
<근대 세계체제 1>은 나종일 서울대 명예교수 등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근대 세계체제 2>는 유재건 부산대 교수 등에 의해, <근대 세계체제 3>은 김인중 숭실대 교수 등에 의해 번역됐다.
세계체제론을 한국에 적용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손호철과 논쟁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우리 지식사회에 미친 대표적인 영향으로는 분단체제론을 들 수 있다. 분단체제론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조한 이론이다. 백낙청에 따르면, 분단체제란 월러스틴이 말한 근대 세계체제의 하위 체제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한국 사회라는 국민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특이한 존재를 말한다. 분단의 역사적 현실과 분단체제의 영향을 주목해 그는 한국 사회운동이 다른 나라 사회운동과 구별되는 분단체제 변혁운동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백낙청
이 분단체제론을 놓고 1994년 ‘창작과비평’에서 백낙청과 손호철 서강대 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손호철은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와 같은 자기 완결성과 내적 노동분업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체제’로 파악하기 어렵고, 분단모순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우려했다. 이에 대해 백낙청은 분단이 갖는 특수성과 국민국가적 관점의 한계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손호철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사회학계와 역사학계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사회학계에선 이수훈 경남대 교수가 월러스틴의 사회이론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서인 <세계체제론>(1993)을 내놓았다. <세계체제론>은 <근대 세계체제 1>을 중심으로 세계체제론의 형성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발전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월러스틴이 분석한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특징과 위기를 재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탐구한다. <근대 세계체제 1>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연구서다.
이수훈
역사학계에 이뤄진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연구로는 한국서양사학회가 편집한 <근대 세계체제론의 역사적 이해: 브로델과 월러스틴을 중심으로>(1996)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마르크스 사회이론과 브로델 역사이론이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주목한다.
제2부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위시한 서양 근대사 연구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월러스틴 해석의 적실성을 검토한다. 이 저작은 실증적 연구를 중시하는 역사학자와 논리적 정합성을 중시하는 사회과학자의 대화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와 사회학계 모두로부터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