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어느 곳으로 피해야 합니까 又
吾佛大聖人이 能空一切相하여 成萬法智라도 而不能即滅定業인데 況博地凡夫耶아. 居士는 既是箇中人이라 想亦常入是三昧니라. 昔에 有僧이 問一老宿하되 世界恁麼熱하니 未審커라 向甚麼處回避리오하니 老宿이 曰에 向鑊湯鑪炭裏하여 回避니라. 曰하되 只如鑊湯鑪炭裏에 作麼生回避리오하니 曰하되 衆苦不能到라.
우리 부처님께서 모든 모습을 비워 온갖 법의 슬기로움을 이룰 수 있더라도 정해진 業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번뇌 속에 놓인 범부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사께서는 벌써 화두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 또한 삼매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한 노스님에게 “세상이 이렇게 뜨거운 고통이니 어느 곳으로 피해야 할지가 궁금합니다”라고 물으니, 노스님께서는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으로 피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저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 세상의 재앙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모든 괴로움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願居士는 日用四威儀中에 只如此做工夫하여 老宿之言을 不可忽이어다. 此是妙喜의 得効底藥方이라. 非與居士와 此道相契하며 此心相知라면 亦不肯容易傳授하리니 只用一念相應草湯下언정 更不用別湯使어다. 若用別湯使이면 令人發狂하리니 不可不知也니라. 一念相應草는 不用他求라 亦只在居士의 四威儀中에 明處는 明如日하고 黑處는 黑似漆이니라. 若信手拈來하여 以本地風光으로 一照하면 無有錯者하여 亦能殺人하며 亦能活人하리라. 故로 佛祖가 常以此藥으로 向鑊湯鑪炭裡하여 醫苦惱眾生으 生死大病일새 號大醫王이라.
바라건대 거사께서는 날마다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다만 이와같이 공부할 뿐, 노스님의 말씀을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저의 효력 있는 약 처방입니다. 거사님과 이 도가 꼭 들어맞아서 이 마음이 아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이 처방도 쉽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생각에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초탕을 쓸 뿐이지, 다시 다른 탕약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탕약을 쓰면 사람들을 경솔하게 만드는 것이니, 반드시 이 내용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 생각에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는 약풀은 다른 데서 구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다만 거사님의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에서 밝은 곳은 태양처럼 밝고 검은 곳을 옻칠처럼 검은 곳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대로 집어서 본지풍광으로 한번 비추면 잘못될 게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 스님께서는 언제나 이 약으로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나고 죽는 큰 병을 치료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들을 의사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不識이라 居士는 還信得及否아. 若言하되 我는 自有父子不傳之祕方이라 不用向鑊湯爐炭裡하여 回避底妙術이라하면 却望居士의 布施也하노라.
거사께서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만약 “나에게는 본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전하지 않는 오묘한 비방이 있기에,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도 피할 수 있는 묘술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저는 도리어 거사의 가르침을 받을까 합니다.
☞ 화두를 챙기는 사람이 화두를 빼놓고서 모든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도리가 있는가. 화두를 떠나면 화두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다. 화두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출처: 禪 스승의 편지,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첫댓글 “저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 세상의 재앙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모든 괴로움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만약 “나에게는 본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전하지 않는 오묘한 비방이 있기에,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도 피할 수 있는 묘술을 쓰지 않는다”
두 말씀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도 피하는 묘술을 쓰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라고 생각하면 맞는 것인지요?
본래 없는 것을 있다고 찾을 필요가 없다라는 말씀인지?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저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 세상의 재앙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모든 괴로움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
재앙 속에 들어가 버리면 재앙이 더 이상 행세를 할 수가 없음.
번뇌가 온 몸을 뒤덮을 때, 번뇌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해탈 이룰 자리.
번뇌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번뇌가 더 이상 행세를 못함.
조금 다른 이야기로 비유 들면,
말 안 들으면 죽인다, 고 겁을 줄 때,
그냥 내가 죽어버리면 겁을 더 이상 줄 수 없음.
내가 안 죽을려고 그럴 때야 협박이 통하지만,
죽을려고 드는 이에게 협박은 통할 수가 없음.
또 태풍이 몰아칠 떄,
태풍의 중심은 태풍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니 오히려 태풍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도 한 방법.
만약 “나에게는 본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전하지 않는 오묘한 비방이 있기에,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도 피할 수 있는 묘술을 쓰지 않는다”
---요 문장은 위 아래 문맥과 이어서 보면,
내(대혜선사)가 고구정녕히 일러주는 말,
즉 일념상응하여 본지풍광의 자리에 들어가 버리면 바로 재앙을 피할 수 있다!라는 말을 거사님은 이해하시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말을 듣지 않고 '나에게는 아주 오묘한 비방이 있기에 끓는 물에 들어가고 아궁이 속에 들어가는, 그런 묘술(?)은 쓰지 않겠다,
라고 한다면!
내가(대혜) 오히려 거사님께 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라는 말씀인 듯.
一念相應草는 不用他求---지금 이 자리가 바로 부처 이룰 자리!
단, 이 문장이 지금처럼 이어지면,
즉 "一念相應草 不用他求, 亦只在居士 四威儀中에 明處는 明如日 黑處는 黑似漆. 若信手拈來하여 以本地風光으로 一照하면 無有錯者하여 亦能殺人하며 亦能活人하리라"로 되면?--> 조금 달리 해석해야 할 듯.
일념에 바로 듣는(낫게 하는) 풀은 다른 데서 찾지를 않는다.
또한 거사의 4위의 중에 밝은 곳은 해처럼 밝고 어두운 곳은 칠흙같다.
만약 믿음의 손가락으로 집어 본지풍광(본래 자리)으로 한번 비추면(일조) 잘못이 없어 살인도 활인도 가능하다.
--->본래자리의 무한 능력 무한 공덕을 이르는 듯.
비법을 다른 데서 구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일념에 상응하면 바로 이것이 본지풍광으로 이런 본지풍광은 사람을 살리게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 스님께서는 언제나 이 약으로 끓는 물 뜨거운 아궁이 지옥 속에서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나고 죽는 큰 병을 치료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들을 의사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의 병을 낫게 하시는 비법은 언제나 '진리' 그 자체죠.
가령 병에 걸린 이는 '병이 없다(병무자성, 空)'는 것을 알게 하여 일거에 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생사의 병에 걸린 이들에게는 '생사가 본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고요.
생사가 본래 없는 자리, 이게 바로 본지풍광입니다.
그래서 응병용약하시지만, 궁극의 부처님이 병낫게 하시는 방법은 본지풍광을 비추는, 그리고 알게 하는 것이지요.